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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81)화 (81/112)

081. 루블리안과 봉인 (10)

좀 전보다 사위가 순식간에 어둑해지고, 어쩐지 퀴퀴한 냄새 사이로 여러 향기로운 향이 섞여들었다. 등 뒤로 닿는 벽은 차가웠다. 녹녹한 이끼가 낀 것 같기도 했다. 주위를 둘러보다 알아차렸다.

여기 거기다.

어린 루블리안과 구경하기로 약속했었던 번화가의 골목.

물론 지금이야 다 지워지고 사라진 과거지만 말이다. 하필이면 왜 여기로 온 건지. 루블리안의 의중을 헤아릴 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 올린 나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루블리안을 빤히 응시했다.

드리워진 그림자 속에서도 그의 금발은 형광등을 켠 것처럼 빛이 났다. 그건 투명한 바다 빛 눈동자도 마찬가지였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나 혈색 짙은 입술 등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선연한 애정에 반쯤 홀린 듯이 눈을 떼지 못했다. 깜빡이지도 못했다.

“여기로 온 이유가 궁금해요?”

“읏.”

온통 불그스름한 자국으로 가득한 목덜미를 은근한 손길로 매만지니, 입술 새로 조금은 새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즉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여긴 실외였다. 이런 개방된 곳에서 그런 신음을 낼 수는 없었다.

물론 어두컴컴하고, 다른 사람이 발을 잘 들이지 않는 골목이긴 했다. 그렇다 해도 밖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또 괴롭히네요.”

엄지로 살살 목을 쓸던 루블리안의 음성이 나직하게 귓가에 떨어졌다. 너 때문이지 않냐는 속내를 읽어 낸 건지 그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왠지 모르게 그 웃음소리가 여름날의 해변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같았다.

달게 눈웃음 짓는 루블리안은 아공간에서 로브를 꺼내 들더니, 내게 입혔다. 어깨에 가벼운 옷자락이 내려앉았다. 꼼꼼히 단추까지 채워 잠근 그가 입술 도장을 찍고는 말했다.

“저도 밖에서 여보의 예쁜 소리를 들려 줄 생각은 없어요. 그냥 당신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그런가 자제가 힘든 것뿐인데……. 노력할게요. 그러니까 애꿎은 입술은 그만 괴롭혀요.”

“왜. 또 입술이 너한테 말 걸어?”

한쪽 입꼬리에 입을 맞추고는 다른 쪽 입꼬리에도 입을 맞추기 위해 수작을 부리던 게 떠올라 물었다. 타박보다는 장난에 가까운, 가볍고 단조로운 투였다.

“네에. 너무 깨물려서 아프다는데요?”

“그건 내 목이 말한 것 같은데.”

그러니 그만 좀 만지작거리라는 뜻을 내포한 내 말을 들은 루블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는 장난스러움을 한 입 베어 문 입술로 조곤조곤 속삭인다.

“으응? 아니에요. 시현의 피부는 더 괴롭혀달라고 하고 있는데요. 특히 여기가요.”

허벅지 사이가 닿을 듯 아슬아슬하게 다리가 비벼지고, 로브를 벌리고 들어온 손이 갈비뼈 부근을 어루만졌다. 살결을 어루만지던 손이 더 위로 올라가려는 걸 제지했다. 단숨에 분위기를 바꿔 농밀한 접촉을 해오는 루블리안 탓에 몸에 열이 올랐다. 새어 나오는 숨결이 뜨거웠다.

“자제, 한다며. 여기 밖이야.”

아쉬운 눈길로 나를 지긋이 보던 루블리안이 눈을 깜빡였다. 느릿한 움직임에서 갈등이 묻어났다. 내게 더 닿고 싶어 하는 욕구가 적나라했다.

“있잖아요, 시현.”

“안 돼.”

“키스도요? 약속도 어겼으니까 한 번만 해 주세요. 찌인하게.”

부러 ‘진하게’라는 말에 강세를 둔다. 샐샐 눈웃음을 치며 얼굴을 들이미는데, 당연히 내가 해 줄 거라 여기고 있다.

얄미워서 그의 코를 꼬집었다. 그다지 힘이 들어가지 않아 아프지 않았을 텐데도 아픈 척을 한다.

“안 해 줄 거야.”

“왜요?”

“하면 너 자제할 수 있어?”

한쪽 다리를 접어 올려 루블리안의 허벅지 사이의 끝을 쿡 찍었다. 단단하기도 하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놀란 듯 루블리안의 입이 벌어진다. 붉은 입술이 열리자, 더 축축하고 붉은 혀가 얼핏 드러났다. 그에게 옮은 건지 외설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려 해 고개를 거세게 저었다. 한쪽이 정신을 놓은 만큼, 내가 붙들어야 했다.

“이렇게 건드려놓고…… 너무 잔인한 거 아니에요?”

“별로.”

“시현, 진짜 속도위반에는 관심 없어요? 얼른 제 동정 떼주세요, 네에?”

노골적인 단어 선택에 사레가 들렸다. 계속해서 조르는, 신이 공들인 낯에서는 부끄러움 한 점 없었다. 진짜 뻔뻔하기 이를 데 없다.

“내키지는 않지만, 시현이 원한다면 뒤도 대,”

“넌 좀 부끄러움을 알아야 해.”

한 자 한 자 힘주어 발음하자, 루블리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내 붉은 입꼬리를 올린다. 장난기가 가득한 모습에 또 무슨 말을 할지 불안해졌다.

“그렇지만 부끄러움을 모르는 게 제 매력 아니에요?”

아까보다는 양호한 대답이었다. 자신감에 가득 차 간드러지게 웃는 모습은 그 어떠한 사람이라도 사로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게다가 시현이 수치를 알잖아요. 저는 모르니 딱 알맞지 않을까요?”

저게 무슨 궤변이란 말인가. 앞으로도 모르리라 선언하는 게 상당히 어처구니없었다. 헛웃음을 흘린 나는 로브에 달린 후드를 집어 썼다. 위쪽 시야가 약간이지만, 가려졌다.

“갑자기 후드는 왜 뒤집어써요?”

“계속 여기 있을 거 아니잖아. 게다가 지금 한창 용사가 나타났을 시기일 테니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여기로 온 거면 다른 꿍꿍이가 있을 테다. 그게 어두컴컴한 골목에서 이루어지지는 않을 듯했고.

……이럴 때가 아닌데도 평화로워서, 어쩐지 폭풍전야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는 엄지와 검지로 후드를 잡고, 아래로 당겼다. 시야가 더욱 좁아져 루블리안의 하관만이 눈에 들어왔다. 피부가 하얘서 그런가 유일하게 진한 색을 띠는 그의 입술이 유독 도드라졌다.

“어떻게 해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용사 제의를 거절한 네가 눈에 안 띌 리도 없고.”

지금은 머릿속에서 싹 지워졌지만, 엿봤던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기억 중 동료 제의를 거절하자 신관이 달라붙었던 일이 있던 것 같다. 아마 루블리안한테도 그리 달라붙었으리라. 생각하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런 내 기분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루블리안이 나를 꼭 끌어안았다. 후드가 쓰인 머리 위로 무게감이 느껴진다. 어쩐지 둥글면서도 뾰족한 게 머리에 닿았는데, 그게 루블리안의 턱이란 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후드를 쓰지 않고 인식 장애 마법을 거는 건 어때요?”

말을 하면 필연적으로 턱이 움직인다. 루블리안이 내 머리에 턱을 올린 상태였기에 움직임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렇게 하면 여보는 좋아하는 남편 얼굴을 볼 수 있고, 저도 제가 좋아하는 여보 얼굴을 볼 수 있는데. 싫어요?”

후드 너머로 루블리안이 내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크게 들려오는 부스럭 소리가 낯간지러운 목소리를 덮었다. 그의 목소리를 좋아해서 그런가, 어쩐지 방해받은 기분이다.

루블리안이 지금 내 얼굴을 못 봐서 다행이었다. 열이 몰리는 느낌이 드는 게, 분명 발갛게 달아올랐을 테다.

“나중에.”

“지금이 아니라요?”

“어. 그보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 도와줄 생각이야?”

말을 돌리기 위해 미친놈 이야기를 꺼냈다. 어차피 늦든 빠르든 그가 일어나기 전에는 해야 했던 이야기였다.

대답이 돌아오기 전, 발밑으로 마력이 섬세하게 일렁였다. 나는 빠른 전개로 인해 순식간에 사라진 마법진의 일부를 상기했다. 루블리안이 인식 장애 마법을 쓴 듯했다.

“당신이 원한다면요. 시현은 그 아저씨를 돕고 싶어요?”

포옹을 푼 뒤, 자연스럽게 깍지를 낀 루블리안이 나를 이끌었다. 걸을수록 점차 어둠이 희미해졌다. 골목 입구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도왔을 때 얻는 게 괜찮다면.”

“예를 들어서 뭐가 있는데요?”

“괜찮은 거?”

“네에.”

골목 입구에 다다랐다. 골목을 덮친 어둠에서 벗어나자, 해가 지고 있음에도 사람 수가 상당한 번화가가 눈에 들어왔다. 저번보다 화려하게 꾸며진 게 무슨 축제라도 있나 싶었다.

별 감흥 없이 주변 살피는 걸 그만두는데, 불쑥 분홍 솜사탕이 시야에 들어왔다. 희고 곧은 손의 주인은 루블리안이 분명했다. 후드를 잡은 채 고개를 들어 올리니, 그가 미려하게 웃고 있는 게 보였다.

“너 먹어.”

“여보도 한 입만 먹어요. 아아.”

솜사탕 일부를 떼어 내고서 내 입가에 가져다 댄다. 나는 입을 벌려 솜사탕만 빼먹었다. 다행히도 손가락이 입에 들어와 휘젓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달아.”

“확실히 다네요. 그래서 시현은 뭘 얻으면 도와줄 거라고요?”

드물게도 루블리안이 대화 주제를 다시 끌고 왔다. 정말 듣고 싶은가 보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영원히 우리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다거나?”

물론 저걸 대가로 걸려면 마신의 축복 및 가호를 없앨 방법부터 찾아야 하지만 말이다. 신에게 이에 관해 물어보려던 순간이었다. 갑작스럽게 루블리안의 걸음이 멈췄다.

한 걸음 앞섰던 나는 후드를 조금 들춰 루블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는 새빨간 사과 같은 얼굴을 한 채 주름이 선명할 정도로 눈을 꾹 감고 있었다. 무언가를 인내하는 표정이었다.

“너 뭐해.”

“잠시만요, 시현. 저 지금 시현한테 키스하고 싶은 거 참는 중이에요.”

[와, 진짜 꼴불견이네요…….]

질린다는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평소보다 잔잔히 나타난 탓에 두통이 일지 않았다.

‘신.’

[네, 시현.]

용건을 말하기도 전이었다. 내가 뭘 물을지 눈치챈 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신의 축복 및 가호를 없애는 방법 물어보시려는 거죠? 그런데 그건 정말 방법이 없어요. 마신이 직접 축복을 거두거나, 봉인되는 수밖에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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