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80)화 (80/112)

080. 루블리안과 봉인 (9)

그 미친놈이 내 세계에 왜 있어. 나만큼이나 의문이 가득한 목소리인지라 신 또한 연유를 모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와 루블리안이 내 고유 세계에 있는 줄 알고 온 건가 싶기도 했다.

[그것도 스물두 살의 시현을 본 뒤에 다시 이동하는, 어.]

마지막 음절과 함께 내 몸이 뒤로 당겨졌다. 익숙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날 끌어안은 커다란 품이 익숙해 몸을 맡길 때, 공간이 변칙적으로 울렁이다 일그러졌다. 그 사이에서 금발이 나타나고, 안색이 창백한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었다.

“안녕, 자기야.”

느른한 음성이었으나, 미약하게 건드려도 끊어질 실 같았다. 시간을 되돌리기 전의 평행 세계 루블리안에게서 조급함은 찾아볼 수 없어서 그런가, 위태롭다는 감상과는 달리 상당히 부조화했다. 붉은 입꼬리마저 간신히 올린 느낌이었다.

아주 작은 단서라도 발견하기 위해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샅샅이 살피니, 내 어깨를 감싼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자신이 아닌 저 미친놈에게 시선을 두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시현, 저 평행 세계 루블리안한테서 마신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요. 축복과 가호는 여전한 것 같은데…… 깃들었다는 느낌은 완전히 사라졌어요.]

신의 말대로라면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알아서 마신한테서 벗어났다는 거다. 어떻게? 거기다 그러면 지금 마신은 본래 육체로 돌아간 건가. 해답을 알 수 없는 의문이 늘어갔다. 미궁에 빠진 기분이다.

“왜 왔는지 모르겠는데. 다시 돌아가지 그래, 아저씨?”

“애새끼한테 줄 관심은 없으니까 조용히 좀 할래. 어려서 그런가…… 낄 때 안 낄 때를 구분 못 하네.”

머리를 굴리느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나를 대신하여 대답한 루블리안의 말을 맞받아쳤다. 이 세계로 오기 전에 봤을 때는 확실히 시간을 돌리기 전과 달랐다. 노련하기보다는 어수룩했다. 그런데 지금의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시간을 돌리기 전과 상당히 흡사했다.

그새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만나자마자 여러 의문을 선사한다.

“아저씨는 늙다리가 다 돼서 그런가…… 눈치 없이 자기보다 어리고 창창한 사람 사이에 끼어드네.”

고개를 들어 루블리안을 보니 그는 비소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그의 입매가 삐뚜름했다. 갑작스럽게 끼어든 저 미친놈 때문에 속이 단단히 꼬였나 보다.

이해는 가지만, 이러고 있다가는 평행 세계 미친놈이 쓰러질 게 분명했다. 파리한 낯과 식은땀 때문에 피부에 달라붙은 축축한 머리칼 그리고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이 이를 증명했다.

“왜 왔는데, 너.”

그렇기에 대화에 난입했다. 여기서 쓰러지면 귀찮게 누가 치운단 말인가. 저 미친놈을.

“자기한테 도움 좀 구하려고.”

“우리가 도움을 주고받을 사이가 된다고 생각하나 보지.”

협조시키게 만들까 했던 내가 할 말은 아니었으나, 저쪽은 그 사실을 모르니 되었다. 내 등을 받히는 품에 느슨히 몸을 기댄 뒤에 고개를 까딱였다. 대답해 보라는 거였다.

“어느 정도는 되지. 자기 목숨, 내가 살리던 거 아니었나.”

“……내가 살려 달라고 한 적은 있고?”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긴 하지. 그래도 들어는 볼 거면서 왜 튕겨, 자기야.”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방금보다 가느스름하게 접힌 눈매 끝에 달린 확신이 눈에 들어왔다. 시간을 돌리기 전의 기억 탓에 저쪽도 나를 잘 아는 게 문제였다.

반박할 수가 없어 한숨을 한 번 내뱉자, 내 어깨에 내려앉는 무게감이 느껴졌다. 사락거리는 머리카락 소리에 그게 루블리안의 머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여보오.”

“왜요, 남편아.”

“……네?”

한 뼘 간격을 사이에 두고, 신이 정성스레 빚은 얼굴이 멍청해졌다. 오늘이 가기까지 오롯이 그만 생각해 주기로 한 약속을 못 지켰기에 삐질 게 뻔해 미리 선수를 친 거였다.

지금은 지워진 과거인 용사일 적 초에서만 쓰던 존댓말과 남편이라는 말에 얼이 나간 루블리안은 그대로 두고,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응시했다. 원래도 심기가 불편한 것 같더니 그게 더 심해졌다. 어둡게 가라앉은 푸르른 눈동자를 보다 입을 열었다.

“부탁이 뭔데.”

“마신의 축복과 가호를 벗어날 방법이 필요해. 계약은 끊었는데 그게 남아 있어서 귀찮게 굴고 있거든.”

기생 중일 때 마신은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니 계약을 끊으려는 걸 마신이 모를 리도, 두고 볼 리도 없었다. 아마 마신은 그걸 막기 위해 그만두라는 명령을 내렸을 테고, 명령을 들을 리 없는 저 미친놈은 페널티를 고스란히 받았을 거다.

거기다 축복 및 가호를 받으면 머릿속을 통해 대화가 가능해진다. 즉, 지금 마신이 저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머릿속을 맘대로 휘젓고 있을 거란 뜻이다. 그래서 저리 안색이 나쁜 거고.

“그런데 자기는…… 난잡한 게 취향인가 봐.”

위아래로 훑어내리는 시선이 강렬했다. 이 말을 처음부터 하고 싶었다는 것 같기도 했다. 저게 무슨 헛소리인가 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발. 안 하던 욕이 목구멍 아래를 돌아다녔다. 말이 아닐 꼴을, 루블리안에 의해 새겨진 자국이 다 드러나고 흐트러졌을 게 분명한 꼴을 저 미친놈에게 보이다니.

“우선 아저씨는 우리 여보 취향에 안 맞아. 가망 없으니까 신경 꺼.”

어느새 정신을 차린 루블리안이 울긋불긋할 게 분명한 내 목을 보란 듯이 잘근 씹고 핥아 올렸다. 아릿한 곳이 씹히니 자연스레 어깨가 움찔거렸다. 배 속이 들끓는 기분에 손을 들어 그의 머리에 댔다. 찰랑이는 금발이 손가락 사이사이에 들어참과 동시에 힘을 줘 쭉 밀어냈다.

아쉬움을 달래려는 건지, 삐졌다는 걸 티 내려는 건지 내 손을 한번 물고서야 떨어진다. 대형견이 따로 없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나한테만 하는 짓을 보면 개보다는 여우에 가깝지만 말이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애새끼 얼굴이 취향이면 나도 취향일 텐데.”

가까스로 서 있으면서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바닥에서 붙은 발을 떼 내게 다가왔다. 나른한 음성으로 여유로움을 가장할 때부터 생각했지만, 진짜 독한 새끼다.

“셋이서 붙어먹는 그런 난잡한 취미는 없지만…… 자기가 원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어.”

“내가 그런 걸 원할 것 같아?”

“없겠지. 자기는 언제나 그랬으니까.”

건조한 물음에 돌아온 답 또한 삭막했다. 푸르른 눈동자는 저번보다 어둑했다. 맑음은 사라지고 미약한 광기가 기저에 깔려있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나오는 ‘자기’란 호칭도 그렇고. 꼭 시간을 되돌리기 전의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마주하는 기분이다.

그다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여보는 왜 이렇게 사람이 좋아요?”

“……내가?”

안고 있던 팔을 풀고 나를 제 뒤로 숨긴 루블리안의 말에 반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상의 좋은 사람들이 다 죽었나. 어떻게 하면 나를 그렇게 볼 수 있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루블리안을 좋아하는 나라지만, 나는 절대 루블리안이 좋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개새끼라면 모를까. 그가 다른 사람한테 했던 짓거리를 하나둘 떠올렸다. 역시 불가능하다.

“귀가 썩는 말들을 다 들어 주고 있잖아요. 그냥 무시해도 되는데.”

뒤를 돌아 나를 걱정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본다. 진심 반,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긁으려고 하는 마음 반인 듯했다.

“우리 자기가 사람이 좋긴 하지……. 아니면 어떻게 저런 애새끼의 어리광을 일일이 받아 주겠어.”

나긋한 음성에는 비웃음이 스며 있었다. 말싸움이 몸싸움으로 변질하는 것도 시간문제일 듯했다. 그보다는 저 미친놈이 쓰러지는 게 먼저일 것 같기도 하다만.

둘을 말릴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나는 엇나간 대화를 바로잡았다.

“둘 다 그만하고. 만약 널 도와주면 우리가 얻는 이득은?”

평행 세계 루블리안에게 협조를 구하려던 건 마신이 그의 몸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미 마신이 저 몸에 없는 상태인데 협조를 구할 게 있나. 물론 저 미친놈은 머리가 좋고 능력이 뛰어나긴 했다. 시간을 되돌리기 전을 기준으로.

지금은 어떨지 몰랐다. 내막을 알지는 못하나, 어떠한 일로 인해 하는 행동과 어투가 유사해진 것처럼 능력도 그럴 거란 보장이 없었다.

나를 가린 루블리안에게서 빠져나와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바라보았다. 파르르, 그의 입꼬리가 떨렸다. 상태가 아까보다 안 좋아 보였다. 저런 상태로 말씨름을 한 것도 재주였다.

“그건…….”

결국 상체를 수그리고 이마를 짚던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흐트러진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마법을 써 기절한 그를 침대로 옮겼다.

“도와줄 거예요?”

“쟤?”

“네에.”

루블리안은 침대를 가리키는 내 검지를 접었다. 그러고는 주먹이 된 내 손을 감쌌다. 따뜻한 온기가 찬 내 살갗을 데웠다.

“굳이 우리가 도울 필요가 있나. 계약이 끊겼다면, 마신이 저 몸을 차지해 인간을 몰살할 일도 없을 텐데.”

솔직히는 우리에게 돌아오는 득이 괜찮다면 도울까도 싶었지만, 축복과 가호가 있기에 마신이 잠든 저 미친놈을 통해 지금 이 상황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어 거짓을 입에 담았다.

“그렇긴 하네요.”

내 뜻을 알아차린 듯 루블리안이 장단을 맞췄다. 만개한 꽃처럼 웃는 걸 보니, 진심으로 돕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그럴 만하긴 해서 아무런 말도 얹지 않았다.

“우선 나가자.”

쓰러진 그가 일어나면 알림이 오는 마법을 방 안에 걸며 말했다. 여기에 있다간 마신에게 감시당하는 꼴밖에는 되지 않는다.

“좋아요. 저도 단둘이 있고 싶었어요.”

원래도 그렇지만, 같은 공간에 있기도 싫은 건지 루블리안이 선뜻 수락했다. 나는 다시금 덮치듯 안는 루블리안에게 몸을 맡겼다. 일렁이는 시야 속 눈에 비치는 광경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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