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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79)화 (79/112)

079. 루블리안과 봉인 (8)

오래전부터 루블리안이 내게 미쳤듯 나 또한 루블리안에게 미쳤음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모르겠는가. 상대를 위해 죽음을 무릅쓸 수 있다는 마음가짐을 오래도록 품어왔는데.

비정상적임에도 사랑은 사랑이었다.

하여간 그러한 감정은 품은 지 오래였으나, 저런 말에 응해주고 싶어질 줄은 몰랐다. 아닌가. 일찌감치 그러고 싶었으나, 그간 감정을 고이 접고, 또 접어놔서 모른 건가. 아무튼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루블리안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으니, 그가 서서히 다시 한번 고개를 수그렸다. 가벼이 닿았다가 떨어지는 부드러운 촉감과 열감이 뺨을 간질였다.

“시현, 하루만 봉인 생각을 미뤄 주세요.”

“…….”

“많은 걸 바라지 않아요.”

달짝지근한 음성이 귀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이어 루블리안이 움직였다. 나보다 위에 위치하던 그가 꿈질거리며 아래로 내려왔다. 덮고 있던 이불이 밑으로 내려가고, 침대 시트 주름이 그의 몸놀림에 따라 새로이 새겨졌다. 바스락 소리는 덤이었다.

갑작스럽게 거둬진 이불 탓에 낮은 온도의 공기가 내게 달라붙어 체온을 앗아갔다. 그런 나를 아는 듯이 내 겨드랑이 아래쯤에 얼굴을 둔 루블리안은 나를 힘있게 끌어안았다. 그가 움직이기 전, 가슴팍에 둘렸던 팔은 자연스레 허리에 휘감겨 있었다.

“오늘이 가기 전까지만. 딱 그때까지만 오로지 제 생각만 해달라는 거예요.”

“싫다고 하면?”

루블리안이 말을 건 순간부터 오늘 봉인에 대해 생각하는 건, 물 건너갔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럼에도 긍정 대신 질문을 한 까닭은 아까 무단횡단을 언급하며 나를 놀리려 했던 것에 대한 앙갚음이었다. 물론 이에 돌아올 대답이 궁금하기도 했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질문에 루블리안은 조금 눈을 키웠다. 금빛 속눈썹이 깜빡이는 눈꺼풀에 덩달아 흔들렸다. 곧 금가루를 뿌려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을 만큼, 그의 속눈썹은 금을 아주 얇게 세공하여 만들어진 것만 같았다.

“으음.”

장난기를 가득 머금은 입술에서 고민하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도르르, 여전히 아름다운 색을 품은 눈동자가 굴러간다.

일부러 한 행동이 분명했다. 루블리안은 내가 자신의 어떤 행동에 시선을 떼지 못하는지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남편을 몇십 년간 방치하고 수절시킨 우리 여보의 양심을 건드리겠죠?”

“뭐?”

반문이 툭 튀어나왔다. 순간 내가 제대로 들은 건가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루블리안의 말을 잘못 들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그만큼 황당했다.

“시현이 시간을 돌리기 전부터 지금까지. 저는 제 순결을 지키면서 살아왔는걸요. 물론 혼자서는,”

“그만 말해.”

느물거리는 루블리안의 말을 토막 내며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러자 그가 내 손바닥에 입을 맞추고는 뜨겁고 축축한 혀로 뭉근히 핥아 올렸다. 생각도 전에 손이 나갔을 때부터 예상했던 바였다.

어떠한 수를 쓰더라도 풀리지 않을 듯이 얽힌 시선이 끈끈했다. 청명한 눈동자가 열망을 품기 전에 손을 떼었다. 다시금 분위기가 농밀하게 바뀌면 조금 전보다도 환기하기 힘들 테다.

옷으로 가려진 살갗까지 빼곡하게 불그스름한 반점과 잇자국이 새겨지는 건 사양이다.

“그래서 해줄 거예요?”

문제는 붉은 입술로 느릿하게 제 아랫입술을 핥는 루블리안의 행동이 꼭 유혹처럼 느껴졌다는 거다. 무심결에 침을 삼켰다. 내가 바라던 것과 다르게 분위기가 흘러갔다.

아슬아슬한 줄타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도권을 잡아 오려던 차였다. 내 허벅지 사이로 단단한 다리가 끼어들었다. 그러고는 뭉근히 다리 사이의 끝을 누르는 감각에 열이 확 솟구쳤다.

“루블리안!”

“네에. 여보 남편 왜 불러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낯으로 루블리안이 말끝을 늘어뜨렸다. 그만하라고 하고 싶었으나, 계속해서 살살 자극을 하는 통에 아랫입술을 꽉 깨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입 밖으로 민망한 소리가 흘러나갈 것만 같았다.

옷 속으로 침투한 커다란 손이 잇자국을 낸 부근을 매만졌다. 원래도 아릿한 곳에 자극이 더해지니 저절로 발끝이 곱아들었다.

“왜 입술을 깨물어요. 피 나면 어떡해요.”

너 때문이잖아. 그리 대답하고 싶은 걸 꾹 참으며 마음을 다스렸다. 가증스럽기 그지없으면서도, 걱정스러운 음성에 속절없이 기분이 두둥실 떠올랐다. 내가 루블리안을 너무 많이 좋아했다.

옷 밖으로 벗어난 루블리안의 한 손이 윗니에 괴롭힘당하는 아랫입술을 빼내었다. 그 순간 참았던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으……. 그만, 읏.”

“네에. 그만하지 말라고요?”

“아니, 미친, 아으…….”

단어들이 따로 놀았다. 제대로 된 문장이 만들어지질 않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머릿속에 적색경보가 떴다. 나는 내 아랫입술을 누르는 엄지를 깨물고 신음을 참아냈다. 강한 자극에 정신이 엉망이었으나, 간신히 부여잡았다. 달뜬 숨이 입술 새로 흘렀다.

“해줄 거죠, 시현?”

입에 끈적한 사탕을 머금은 듯한 다디단 음성이 귀를 덮었다.

지금 이 행위가 얼른 대답하라는 재촉인 동시에 사리사욕을 채우는 거란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 대답을 원하면 그만 좀 움직여야지. 한 손으로 뒤로 도망가지도 못하게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으면서 어처구니가 없다.

“해줄, 흐으, 게.”

내 말에 루블리안이 움직이는 걸 멈췄다. 확언이 마음에 든 모양인지 반질거리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보며 말을 이었다. 드디어 완전한 문장을 내뱉을 수 있었다. 비록 흐트러진 호흡에 중간중간 말이 끊겼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그만, 좀, 자극해.”

“다시 한번 말해주시면 그럴게요.”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애교를 피운다. 목소리에 집중하겠다는 듯 눈을 꼭 감고, 두른 팔을 풀어 두 손을 모은 모습은 천사가 따로 없다.

방금까지 애가 타도록 자극하던 사람이 아닌 다른 인물 같았다. 여전히 내 허벅지 사이에 들어찬 그의 다리가 같은 인물임을 증명했지만 말이다. 나는 얽힌 다리가 풀릴 정도로만 뒤로 물러난 후, 상체만 움직여 그의 귀에 입술을 대고는 속삭였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네 생각만 할 테니까 그만 좀 해.”

너무 좋아서 못 견디겠다는 얼굴로 루블리안이 꿈틀거렸다. 이윽고 고운 눈꺼풀이 들리고 끝없는 애정으로 반짝이는 눈동자가 드러난다.

“어떡해요, 시현.”

“이번에는 왜.”

“다른 사람이 당신 목소리 듣고 홀릴 것 같아요…….”

귀에 스며든 음성이 꼭 이미 홀린 사람처럼 몽롱하여, 하마터면 저 말도 안 되는 말에 고개를 끄떡일 뻔했다. 사람을 홀릴 목소리를 가진 건 내가 아닌 루블리안이었다.

“다른 사람이랑 이야기할 때는 마법이라도 거는 거 어때요? 헬륨 가스를 마신 것처럼요.”

루블리안이 아닌 이랑 이야기할 때마다 목소리가 미니언처럼 변하는 상상을 해봤다. 종내에는 상상이 박시찬, 김민식 그리고 이리형과 대화할 무렵에 다다랐다. 나는 곧장 표정을 싹 굳히며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 된다.

“헛된 생각 그만해. 그럴 일 없을 테니까.”

“정말요?”

괜히 얄궂게 눈을 가느스름하게 휜다. 아쉬움 한편에 존재하는 재미가 눈에 비쳤다. 나는 루블리안의 이마에 약하게 딱밤을 날렸다. 그러고는 힘없이 바람결에 이끌리는 듯 속삭였다.

“어. 그리고 할 거면 내가 아니라 네가 해야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단조롭기만 한 음성에는 진심이 꾹꾹 눌려있었다. 눈치가 빠른 루블리안은 이미 알아차린 듯했다. 그가 온 세상을 가졌나 싶은 얼굴로 환히 웃었다.

어찌할 도리 없이 시선을 빼앗겼다. 이 정도면 가져가도 되냐고 친절히 물은 루블리안에게 쥐여준 격이다.

이미 한계에 달했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더 좋아질 수가 있나 싶었다. 나로 인해 저런 행복한 얼굴을 지으며 웃는데, 더 안 좋아질 리가 있나 싶기도 했다. 두 가지 생각이 충돌하다 섞여들기 시작할 차였다.

“시현. 당신이 지금 어떤 눈인 줄 알아요?”

장난기는 쏙 빠진, 웃음기가 만만한 음성이 들려왔다. 똑같은 높이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터라 따뜻한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루블리안이 고개를 앞으로 빼낸 탓에 코와 코가 살포시 맞닿았다.

간단한 행동이었으나, 날 사랑한다는 걸 귀로 들은 것만 같았다. 살포시 움직인 게, 톡 건드려도 깨질까 봐 무섭다는 듯이 부드럽게 움직인 게 특히 그런 느낌을 줬다.

“제가 사랑스러워 미치겠다는 눈이에요.”

만개한 벚꽃이 뺨에 핀 루블리안이 속살거렸다. 이어 살짝 고개를 내빼며 내 코를 약하게 물었다가 놓아 준다.

어쩐지 그 애정 어린 행위가, 루블리안이 내 살갗을 물고 핥고 빨아댈 때보다, 내 중심을 자극할 때보다 간지러웠다. 심장이 더할 나위 없이 기분 좋게 뛰었다.

“……네가 나를 너무 잘 아는 걸 어떡해.”

무어라 답할지 고민하다 뒤늦게 한 대답은 탓하는 뉘앙스가 가득했다. 그러나 루블리안이 실망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었다. 그와 지낸 세월 동안 그러한 모습을 보지 못했으며, 내 말에 입꼬리가 찢어져라 웃고 있는 루블리안이 바로 앞에 있었으니 말이다.

루블리안은 자신이 나를 잘 안다는 사실과 내가 자신을 사랑스럽게 봤다는 사실, 그 두 가지를 인정한 게 좋은 듯했다. 그러니 저리 밝게 웃고 있는 거겠지.

“그만큼 시현도 절 잘 알잖아요.”

그럼 우리는 서로를 잘 아는 거네요.

읊조리는 루블리안은 뿌듯한 기색이 완연했다. 그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겠는지 내 뺨을 따뜻하게 감싸고는 쪽쪽 입을 맞췄다. 턱 끝, 입술, 콧방울, 미간, 눈꼬리, 눈두덩이, 이마. 턱을 치켜들고는 얼굴 곳곳에 꼼꼼히 입술을 붙였다가 떼어 냈다.

기쁨 때문인지 한껏 고양된 게 눈에 들어왔다. 눈가며 뺨이며 귓가며 발갛게 달아오르지 않은 데가 없다.

“시현.”

“왜.”

“시현.”

“이름만 부르지 말고. 원하는 걸 말해.”

흘러나온 음성은 다른 때와 똑같았다. 평이하고 고저 없는, 그런 음성이었다. 그러나 루블리안은 그 속에서 뭘 찾아낸 건지 풋사랑에 빠진 어린 소년 같은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내 입술을 제 입술로 꾹 눌러 비볐다가 떼어 낸다. 촉 하는 소리가 귀에 퍼졌다.

“그러려고 했는데, 시현이 꾸준히 대답해주는 게 너무 귀여워서요.”

“너…….”

“네?”

“아니야.”

네가 그런 소리를 할 처지냐는 소리를 할 뻔했다. 그야 그럴 것이 루블리안 시선의 내가 사랑스럽고 귀, 여운 것처럼 내게 루블리안이 그러했으니 불가항력이었다.

루블리안이 내게 추궁하려는 건지 입을 여는 순간,

[시현!]

커다란 음성이 내 머릿속을 강타했다. 절로 만면이 구겨졌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충격에 손을 뒤로 젖힌 뒤 손목 부근으로 옆머리를 둥글게 문질렀다.

[죄송해요……. 지금 좀 급한 상황이라 경황이 없어서. 괜찮으세요?]

‘괜찮아. 그런데 무슨 일이야.’

그러나 대답은 딴 곳에서 나왔다.

“시현. 평행 세계 그 아저씨가 마법진을 파훼했어요.”

“……결계 마법진?”

“네. 파훼하려면 적어도 50년은 걸리는 게 정상인데, 마신의 힘이라도 빌렸나 봐요.”

짜증이 가득 밴 어조였다. 루블리안은 자존심이 상해 보였다.

그러나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결계 마법진은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몸에 여전히 마신이 기생한다는 사실을 모를 적, 마신보다 약한 신과 인간인 루블리안의 합작품이었다. 더군다나 쓰인 게 마력이었다. 마력이 신의 힘에서 파생되었다고는 하지만, 본래 신의 힘과 비교하면 턱없이 약했다.

안일했다. 루블리안을 만난 것에, 떨어지지 않아도 될 가능성에 도취한 게 틀림없었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신에게 물었다.

‘지금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어디에 있어?’

[잠시만요. 확인을…… 어?]

예상치 못했다는 반응에 우선 여기로 오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로 간 건지 의문이 들 타이밍에 목소리가 이어졌다.

[시현의 고유 세계에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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