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 루블리안과 봉인 (7)
자유자재로 내 머릿속을 들락날락하는 듯한 루블리안은 이번에도 내 뜻을 알아차린 건지 웃음을 터뜨렸다. 청아한 음색이 방 안 전체를 메웠다.
완전히 접힌 눈에 즐거움이 가득했다. 저 청명한 눈동자가 내게 향할 때마다 착각이 일곤 했다. 혹시나 저 눈동자는 세상의 온갖 따스한 감정들로 만들어진 게 아닌가 하는. 물론 다른 사람을 대하는 걸 보면 바로 정신을 차리지만, 그만큼 루블리안은 나를 볼 때마다 아주 사랑스러운 존재를 보듯 웃었다.
지금 또한 그랬다. 선명히 보이는, 마르지 않는 애정이 범람해 기어코 나를 덮쳤다. 애정이란 이름의 바다는 그 어떠한 것보다 찬란했다. 푹 잠겨 숨통이 막혀도, 허우적거릴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이대로 잠겨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라면 모를까.
“루블리안.”
내 손에 뺨을 비비는, 고롱대는 고양이 같은 낯의 루블리안을 눈에 담았다.
선천적으로 다정을 손에 쥔 사람이 있다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그리고 나는 명백히 후자에 속했다. 더불어 원체 낯간지러운 소리를 하지도 못했다. 그런 나를 조금씩 변화시키는 게 루블리안이었다.
“나한테도 네가 가장 소중해.”
원래라면 뺨을 어루만지는 걸로 대신했을 속내였다. 이렇게 세상 빛을 보지 못했을 속내였다.
굳건했던 것들이 루블리안이라는 재해에 하릴없이 흔들렸다. 곧 와르르 무너져 다시 처음부터 차근히 쌓아야 할 만큼이나.
“……그냥 그렇다고.”
그러나 나는 이 변화가 나쁘지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루블리안에 의한 변화니까.
내 말이 끝나자, 묵직한 정적이 방 안에 내려앉았다. 웃음을 거둔 루블리안이 열렬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누군가 본다면 돈이라도 떼먹었냐고 물어볼 정도로 노골적이고 끈질기게.
“시현. 역시 더하면 안 되겠죠?”
“미쳤어?”
내게 새긴 흔적을 눈으로 훑는 걸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미 아리도록 붉은 자국을 새겼으면서 뭘 더한다는 말인가.
“당신에게 미쳐 있다는 거 알면서 왜 물어요.”
“짐승 새끼도 아니고, 여기서 더 뭘 하겠다는 거야.”
열띤 시선이 아래를 향하는 걸 보자마자 루블리안의 코를 꼬집었다.
“아야.”
아프지도 않으면서 앙살을 부린다. 이내 부러 서운하다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는데,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꼬집힐 만한 발언을 했으면서 잘못 하나 하지 않았다는 듯한 태도를 고수했기 때문이었다.
“너 때문에 온통 불긋한 거 안 보여?”
“보여요. 예쁜데 더 새기면 안 될까요?”
엄지와 검지로 그의 코를 잡은 탓에 코맹맹이 소리가 들려왔으나, 루블리안은 그 목소리까지 소화해냈다. 이렇게 잘 어울려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개소리는 개소리였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더 하다간 그 아찔한 감각에 못 이긴 내가 혼절할 테다. 과장이 섞이긴 했으나, 버거우리란 사실 하나는 명확했다.
단호하게 끊어내는 날 보며 루블리안은 방긋방긋 웃었다. 잡힌 코 위 유연하게 휘어지는 눈매가 내 시선을 잡아챘고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 안 돼요?”
순식간에 내 손을 잡아 내린 루블리안이 조금 전과 달리 또렷하게 발음했다. 이어 조금 더 내게 밀착하고는 잇자국과 붉은 자국이 가득한 내 목을 살살 쓸어내렸다. 느릿하면서도 뭉근하게 문지르는 손길에서 불순한 의도가 느껴졌다.
“이미 온갖 곳에 했으면서 뭘 더한다는 거야.”
“으음. 온갖 곳은 아니지 않아요?”
다른 쪽 손의 검지가 종아리에서 허벅지로 움직였다. 바지 위를 은근히 쓸어올리는 감각에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돋아났다.
나는 곧바로 루블리안의 손을 잡아챘다. 깍지를 낌으로써 움직임을 제한한 뒤 한숨처럼 목소리를 흘려냈다.
“나랑 같이 내 세계에서 산다며.”
“그랬죠?”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얼굴이었다. 다소 열띤 시선에 빈손으로 루블리안의 눈가를 가렸다. 고운 비단 같은 머리카락이 살짝씩 손등을 간질였다.
“거기서 우리 미성년자라니까.”
“스릴 넘치는 속도위반은 별로예요?”
위쪽을 가려 하관만 드러났기 때문인지 장난스럽게 올라간 입꼬리가 두드러졌다. 하지만 그보다도 속도위반이라는 말이 귀에 꽂혔다. 어떻게 저런 말을 얼굴 한 번 붉히지 않고 하는지. 덕분에 내 낯만 뜨거워졌다.
“난 신호를 준수하는 사람이라.”
“그럼 무단횡단을 한 적도 없어요?”
놀리려는 심보가 그득한 목소리였다. 짓궂게 질문하는 루블리안은 국적이 대한민국이라 생각될 만큼이나 자연스럽게 그의 고유 세계에는 없는 것들을 입에 담았다.
머리가 비상하면 그만큼 쉬이 정보를 제 것으로 만드는 건가 싶었다.
“해 본 적 있죠?”
“그만 물어보고 잠이나 자.”
오가는 대화의 끝이 보이지 않아 급히 마무리 지었다. 계속 이러고 있다가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루블리안이 원하는 대로 되리란 예감이 들어서였다.
무어라 반박하려 한 건지 루블리안이 입을 움직이는 찰나, 내가 그의 어깨를 힘 있게 끌어당겼다. 그의 턱이 내 어깨에 닿았다. 불편한 자세일 텐데도 그는 불평을 호소하지 않았다. 그저 몸을 굳혔다.
“얼른.”
“……아직 밤 아니에요, 시현.”
“그래도 자.”
무턱대고 자라고 억지를 부리는 내 모습에 제 페이스를 되찾은 루블리안이 어린 소년처럼 말간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가 귀가 아닌 심장에 내려앉은 기분이다. 심장이 위치한 가슴 부근이 간질거렸다.
“제가 자면 시현은 뭐하게요?”
몸을 조금 떨어트린 루블리안은 과장 없이 코끝이 닿을 거리에 있었다. 사뿐히 살랑이는 속눈썹 한 올 한 올이 보일 정도였다.
“같이 자 줄 거예요?”
스르륵, 내 허리에 팔이 감겼다. 조금 전까지는 루블리안이 꾸깃하게 몸을 구부렸었기에 그가 내 품에 갇혔었지만, 이제는 반대가 되었다. 하도 안겨서 익숙해진 품이 나를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다행히도 화제가 바뀌었다. 흔적 남기기에서 같이 잠을 자는 쪽으로.
“네가 원한다면.”
“제가 할 대답 알잖아요.”
“알지.”
모를 리가 있나. 만일 미래가 여러 갈래로 나뉘는 게 오롯이 선택 때문이라면, 지금은 한 갈래밖에 없으리라. 그야 루블리안은 당연히 승낙할 테니까. 그렇지 않을 미래는 없었다. 신을 걸고 장담할 수 있었다.
“같이 잘게. 그러니까 우선 팔부터 풀어. 누워야 하잖아.”
나는 대답을 채근하는 눈빛에 입을 열어 그가 원하는 말을 들려주었다.
“네에.”
드물게도 루블리안이 순순히 응했다. 그는 재빠르게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누운 뒤, 이불 한쪽을 들추며 나를 바라보았다. 얼른 이리로 와달라는 의지가 확고했다.
내가 그 자리에 눕자, 루블리안이 나를 끌어안았다. 그의 머리가 내 머리맡에 있었다. 고른 숨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솔직히 루블리안이 잘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건 그저 봉인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기 위한 허울이었다.
루블리안이 곁에 있으면 그의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니 어쩔 수 없었다.
‘신.’
[네.]
‘마신을 일시적으로 잠들게는 못 해?’
틈 없이 내게 달라붙은 루블리안에 일순 멈칫했다가 손을 뻗어 그의 등을 일정한 박자로 토닥였다. 서로를 마주 보는 자세로 누워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첫 세계가 그렇게 된 후에도 주신님께서는 마신을 사랑하셔서, 봉인이나 마신에 관한 이야기는 함부로 꺼내기 어려웠거든요. 다들 쉬쉬하는 분위기였고요.]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은지 신이 끙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기억을 되짚고 있는 모양이다.
[죄송해요.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제 기억 속에는 이렇다 할 만한 게 없어요. 게다가 저는 늦게 창조된 축에 속해서…… 저보다는 최초의 세계 때 창조된 신들이 더 잘 알 거 예요. 우선 방문한다는 편지를 보내 놓고, 허락이 나면 물어보고 올게요.]
‘그래.’
편지를 쓰러 갔는지 머릿속 울림이 말끔히 사라졌다. 잠꼬대인 척 내 머리에 입술을 비벼대는 루블리안의 행동을 눈감아 주고, 어떻게 마신을 일시적으로 잠들게 할지 골똘히 생각했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몸에 마신이 기생하는 건 계약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계약을 강제로 파기할 방안이 있나? 내게 남아 있던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기억이 이제는 거의 다 지워졌다. 그 때문에 계약서 쓰였던 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분명 약삭빠른 그가 무언가 조처를 하지 않았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계약 기간이 평생인 걸 받아들일 리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이 되질 않는다. 가진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봉인은 따로 실험할 수도 없기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시현, 안 자요?”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목소리는 약간 잠겨 있었으나, 듣기 좋은 건 여전했다. 천천히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올리자 나른하게 풀린 눈이 보였다.
“너도 안 자잖아.”
“저야 당신이 자면 뽀뽀하다 자려고 했죠.”
당당한 포부에 기가 막혔다. 심지어는 이미 내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고 있지 않던가. 이런 내 반응에도 꿋꿋한 루블리안은 해사하게 웃었다. 내 뺨에 가벼이 입을 맞추면서.
할 말을 잃었다.
저세상 뻔뻔함 때문이 아니라 저 행동에 맞춰 주고 싶은 나 자신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