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76)화 (76/112)

076. 루블리안과 봉인 (5)

나를 지긋이 응시하는 루블리안과 눈을 맞추었다. 그는 가끔 사람 심장을 울리는 말을 해댔다. 간질거리는 감각이 서서히 곱아든 발끝부터 온몸으로 퍼진다. 무어라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정에 뱃속이 울렁였다.

윗입술로 아랫입술을 내리누르니 루블리안이 손을 뻗는다. 그의 엄지가 내 아랫입술을 해방시켰다. 야트막하게 벌려진 입술 새로 한숨이 흘러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러 노리고 지금 저런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 전생에 여우라도 된 건지 사람 한번 잘 홀린다. 엄지로 뭉근히 내 입술을 문지르는 행동이 방금 한 생각에 확신을 더해주었다.

“손부터 떼.”

“그게 제가 할 일이에요?”

얇은 선을 그리듯 휘어진 눈꼬리에 배어 있는 애정이 선연했다. 형체가 보인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심장이 뇌의 명령을 듣지 않고 쿵쿵 제 마음대로 뛰어댔다. 박동 소리를 들은 건지 루블리안이 달게 웃음을 흘렸다. 이대로 라면 온종일 이러고 있겠다 싶어 눈을 감아 시각을 차단했다.

“우선은.”

그리고 물음에 대한 답을 돌려주며 입술에 닿은 손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이제는 당연한 수순으로 빈틈없이 맞물리는 손가락을 내버려 두고 다시금 입을 움직였다.

“너는 나랑 작전을 짜야 해. 평행 세계 루블리안과 마신은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

엄지를 떼어냈기에 아까와 같은 부드러운 감촉은 느껴지지 않았다. 시야를 차단해서 온통 새까맣기만 했다. 암흑 속에 잠긴 기분으로 이야기를 마저 하려는데, 눈가에 말랑한 것이 닿았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루블리안의 입술이었다.

“이것도 하지 마.”

“눈 떠주면요. 시현의 눈 보고 싶어요.”

하는 수 없이 눈을 뜨자 검기만 했던 광경에 화려한 색들이 쏟아져 내린다. 잠시 눈을 찌푸렸다가 빛에 적응한 뒤 제대로 떴다. 루블리안은 배부른 여우처럼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쟤도 어지간히 내 눈을 좋아하나 보다. 내가 찰랑이는 바다를 쏙 빼닮은 그의 눈동자를 가장 좋아하는 것처럼

“이제 이야기 좀 들어.”

“그럴게요.”

루블리안이 조신하게 눈꺼풀을 내리깔고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걸쳤다. 언제 저돌적으로 입을 맞췄냐는 듯 얌전 떠는 모습에 헛숨이 터져 나왔다. 어이가 없다.

그와 별개로 이야기하기는 편해졌다. 나는 머릿속에서 정리한 것들을 나열했다. 봉인 방법은 알아 왔으나, 마신을 유인하기는 힘들었다. 더군다나 마신의 본체는 마계에 따로 있을 테니 더욱 그러했다. 지금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몸에 기생하고는 있지만, 그건 인간 몰살을 위한 노림수일 뿐이었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면, 봉인의 낌새를 눈치챘을 수 있어.”

다르게 생각하면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마신 또한 그렇단 거기도 했다. 차원 이동을 막는 결계진까지는 어찌어찌 넘어갈 수 있다고 쳐도, 여태 뭘 하든 방관만 하던 주신이 시간을 돌리는 걸 막는다? 이건 확실히 이상했다.

마신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긴 한데…….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시간을 돌리기 전의 기억이 있었다.

한 인간 세계의 종말이 다가왔었는데 과연 신이 가만히 있을까? 마신을 어떻게든 하려 하지 않을까? 거기다 갑작스럽게 차원 이동을 못 하게 움직임을 제한하는 결계 마법진이 우연일까?

상황을 더욱더 파고든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분명 저러한 의문을 가졌을 테고, 그에 대한 답을 끊임없이 고민했을 거다. 그간 평행 세계 루블리안에게 겪은 게 있어 예상이 갔다.

“눈치챘을 것 같긴 하네요.”

“그러니까 마신과 평행 세계 미친놈도 봉인을 예상했다는 걸 기저로 깔고 움직여야 해.”

골머리를 앓을 머지않은 미래가 보였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까지는 그간 봐온 걸 토대로 예측해 볼 수 있다 해도, 마신은 어떻게 움직일지 가닥이 잡히지 않는다.

현재 마신은 내게 붙어있는 신과 비슷한 상태이다. 추측이지만, 봉인은 의식이 깃든 본래 육체, 즉 완전한 마신에게 해야 할 것이다. 수억 년 전의 세계에서도 완전한 마신을 봉인하려 했기에, 그때의 봉인이 기반인 우리도 그대로 따라야 성공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몸에 기생 중인 마신의…… 의식? 아무튼 마신부터 쫓아내어 본래 육체로 돌아가게 해야 했다. 문제는 봉인을 예상한 마신이 순순히 그래 줄 리가 없다는 거다.

“그런데요, 시현.”

생각에 몰두하던 중 귀에 익은 다디단 음성이 들렸다. 시선이 제게로 향했단 걸 확인한 루블리안이 의아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평행 세계 그 새끼가 협조하게 만드는 건 생각 안 해봤어요?”

“……협조를?”

평행 세계 루블리안한테?

상상치도 못한 말이었다. 적으로 인지해 쓰러트릴 생각만 했지, 협조 같은 건 생각도 안 해봤다. 폭탄과 같은 말을 던진 루블리안은 태연한 낯으로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리고만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무해한 척이 수준급이다.

“그게 무슨 뜻이야.”

“으음. 시간을 되돌리기 전의 기억이 있더라도 차이는 확실히 나요. 시현도 느꼈죠?”

순간 뇌리에 시간을 되돌린 후의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행적이 스쳐 지나갔다. 확실히 달랐다. 루블리안의 말을 받아치지 못하는 것도, 나를 시현이라고 부르던 것도.

고개를 끄덕이자, 루블리안이 붉은 입술을 다시 열었다. 이내 그 틈 사이로 고운 미성이 흘러나온다.

“아마 그 아저씨는 전과 달리 마신의 힘에 집착하지 않을 거예요.”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자, 떠오르는 건 하나였다.

“……나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마신과 손을 잡은 이유는 나를 살리기 위함이었다. 더 나아가자면 나를 좋아했기 때문이었고. 그런데 그건 모두 시간을 되돌리기 전의 감정이었다. 지금의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내게 느끼는 감정은 흥미가 다였다.

루블리안은 정답이라는 듯 빙그레 웃었다. 올라가는 양 입꼬리에서 묻어나는 기쁨이 진심인 게 보여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흥미는 가져도, 더는 날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얼마나 흡족해하는 건지. 그의 행태가 우스웠다.

“네가 하고 싶은 말은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더는 마신의 힘이 필요하지도 않으니, 협조를 구하자는 거네. 그런데 수락할 확률은? 게다가 계약을 어기면 패널티가 있어서 쉽게 돕지는 않을 것 같은데.”

“패널티야 알아서 하겠죠. 우리한테만 이득이 아니니까요. 그쪽도 마신한테 평생을 저당 잡혀 살고 싶지는 않을걸요? 마신의 힘이 필요하지도, 그걸로 이룰 목표도 없으니까요.”

“그렇긴 하겠지.”

마신에게 몸을 넘기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떠올리며 수긍했다. 그런 내 머리카락을 살살 매만지며 루블리안이 이어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를 도와 마신을 떼어내면 그쪽도 이득이라는 거예요. 이때 아니면 뗄 수도 없을 테니까요.”

확실히 마신을 떼고 싶다면 지금이 적기였다. 누가 돕지 않는다면 머릿속을 훤히 읽는 마신을 언제 뗀단 말인가. 그런데 그게 가능한지도 문제였다. 내가 알아낸 건 봉인 방법이었지, 기생하는 걸 떼어내는 법이 아니었다.

“그런데 방법은 있고?”

협상도 마신이 곁에 없어야 할 수 있는 거였다. 그런 의도로 묻자 루블리안이 예쁘게 웃으며 내 품에 안겨들었다. 나보다 큰 체격을 욱여넣고는 가슴 부근에 머리를 문지른다. 말을 안 하고 이리 구는 걸 보니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은 듯했다.

계속해서 좌우로 움직이는 머리에 손을 올려 그의 행동을 제지했다. 옷 너머로 느껴지는 감각이 신경을 잡아챘다. 다른 생각은 하지 못하게끔.

“루블리안.”

“네에.”

턱을 들어 올려 나를 본 루블리안이 배시시 웃었다. 그에 나는 빛을 머금어 더욱 옅어진 금발을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얼굴을 저리 유용하게 쓰는 건지. 자꾸만 딴 데로 빠지려는 그에게 무어라 말하기가 어려웠다.

“왜 그러는지는 알겠는데. 참아, 좀.”

루블리안과 다시 재회한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으며, 마음을 고백하고 함께 하자고 한 지는 반나절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 일부를 평행 세계 루블리안과 마신에게 쏟고 있으니 애가 탄 걸 테다. 봉인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음에도, 해야 한다는 걸 인지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애초에 루블리안은 집착도 많았고, 내가 딴 사람 생각을 하는 것도 싫어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래, 하고 깔끔하게 떨어질 인물이 아니다.

“알아요?”

“그럼 모르겠어? 심술 그만 부려.”

모를 줄 알았다는 눈치라 검지로 콧방울을 꾹 눌렀다. 얼굴이 뒤로 살짝 밀려났던 루블리안이 내 손을 잡아채며 자신의 콧방울을 누르던 검지를 약하게 깨물었다. 그러고는 샐샐 눈웃음을 친다.

나는 한 번만 더 봐달란 뜻을 선명히 내비치는 루블리안의 낯을 샅샅이 살폈다. 왠지 모르게 희끄무레한 안개가 껴있는 느낌이다. 그게 자꾸만 신경 쓰였다.

결국 깨물린 검지를 습한 입속에서 빼내어 클린 마법으로 닦고, 천천히 루블리안의 뺨을 손으로 감싼 뒤에 입술을 겹쳤다.

가벼이 한 번, 진득하게 한 번. 총 두 번을 입 맞추고는 복숭앗빛으로 달아오른 뺨을 살살 어루만졌다. 그러고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단조롭게 물었다.

“행복해?”

“……네?”

“한 번 입 맞춰 주면 행복할 거라며. 두 번 해주면 더 행복할 거고.”

덤덤히 루블리안이 수억 년 전의 세계로 가기 전에 했던 말을 읊자 더 커질 수 없으리라 여긴 눈이 더욱 동그랗게 크기를 키운다.

“세 번째는 나중에 해 줄게. 이 봉인이 다 끝나면.”

“…….”

“그때는 안 참, 아도 되니까.”

루블리안이 참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몰라 일순 멈칫했다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좀 참자는 말을 덧붙이려 했으나, 목구멍 아래로 다시 먹혀들었다. 어떤 것에 스위치가 눌린 건지 내게 달려들어 갈급하게 입술을 맞춰온 루블리안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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