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 루블리안과 봉인 (4)
루블리안을 바라보니, 그 또한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한 낯이었다. 내가 잘못 느낀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 사실에 도달하는 즉시,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파놓은 구덩이를 살폈다. 성물은 없고 새하얀 가루가 회색빛 흙 사이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억눌린 힘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허망했다. 역시 성물을 모조리 빼돌렸어야 했나. 봉인의 여파인지, 수억 년이 흘렀기 때문인지. 성물이 산산이 조각난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정신 차리자. 까닭을 알아내는 건 현재 상황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지금 떠올려야 할 건 앞으로 어떻게 마신을 봉인할 거냐에 대한 답이다. 나는 원인 찾기는 접어두고, 봉인에 대해 골몰히 고민했다.
[음, 시현?]
머릿속이 찡 울렸다. 자연스럽게 인상을 쓰자, 몸이 반 바퀴 뱅글 돌아간다. 뒤에서 내 어깨를 잡고 있던 루블리안이 정면에 있다. 그가 내 뺨을 감쌌다. 뜨끈한 손만큼이나 온기를 품은 푸르른 눈동자가 걱정스러움을 한가득 담고 있었다.
“신이 말 걸어서 그래.”
“알아요. 그래도 속상한걸요.”
뺨을 어루만지던 손이 위로 올라갔다. 내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내리는 손길에 애정이 잔뜩 묻어나왔다. 자기가 다 괴롭다는 눈치였다.
간질이는 감각에 발가락이 곱아들었다. 방금까지 머릿속에 가득하던 생각이 루블리안이라는 파도를 만나 휩쓸려 사라진다. 이럴 때가 아닌데, 내 마음을 토로해서 그런가 주체가 되지를 않았다.
[저기요, 시현? 여기 신 있어요…….]
그러나 난감한 목소리로 제 존재를 피력하는 신을 도외시할 수 없었다. 평소 신이 이렇게까지 루블리안과 이야기하는 도중에 끼어든 적이 없었기에 더욱 정신을 차려야 했다. 이러다간 날이 새서야 겨우 방법을 찾겠다. 이 세계에는 해가 없는 탓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감도 잡히질 않겠지만 말이다.
“루블리안, 그만.”
머릿속을 울리는 신의 목소리 탓에 무심코 찌푸린 내 미간에 입을 맞추는 루블리안을 제지했다. 확고한 내 의지를 눈치챈 건지 그가 한 번 더 입술을 이마에 문지르고는 나를 끌어안았다. 이어 얼굴을 내 목에 묻은 다음 가만히 날 올려다보기만 한다.
‘말해.’
[시현이 첫 세계로 간 뒤에야 주신님께 들은 건데요. 그게 성물은 애초에 주신님 힘의 일부를 담은 성스러운 물건이거든요?]
‘알아.’
성물이 어떠한 건지 정도는 알았다. 명색이 용사인데다 신성력까지 다루는데 모를 리가 있나.
[최초의 세계에서 주신님의 신도가 마신 봉인을 시도할 때 성물이 이용되었어요. 중간에 마신이 날뛰어 완전한 봉인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성물을 쓰긴 썼다는 거예요.]
‘그래서 성물에 깃든 주신의 힘이 사라졌다?’
[네. 두 개만요. 나머지 세 개에 깃든 힘은 이후에 주신님께서 첫 세계를 떠날 때 거둬가셨대요.]
한 마디로 개고생했다는 거였다.
물론 수억 년 전의 세계로 가 봉인 방법과 봉인진은 알아냈어야 했다. 그러나 성물에 굳이 마력 묻히고, 지금 이렇게 찾을 필요가 없었다는 거다.
[헤헤.]
‘뭘 웃어.’
[……흑흑?]
데굴데굴 눈 굴리는 소리가 나다가 이어지는 말이 저거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웃지 말라고 했더니 흑흑 거리고 있다.
내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으니 또다시 데굴데굴 눈 굴리는 소리가 들린다. 눈치 보는 기색이 역력하다. 근데 이번 건 볼만 했다. 저걸 왜 이제 와서 알려주냐고.
‘방도는.’
여전히 눈치만 보는 신에 먼저 말을 걸자, 사락거리는 머리카락과 보들보들한 살갗이 목 언저리에서 느껴진다. 속눈썹인 듯 나를 살랑살랑 간지럽히는 부드러운 것도.
[당연히 있어요! 주신님께서 새로운 성물을 내려주신다고 하셨어요. 그걸 쓰면 돼요.]
누가 보면 이 말을 하는 날만을 기다린 줄 알겠다. 속사포로 말을 줄줄이 이은 신이 포탈을 열었다. 공간이 어긋나며 열린 포탈은 한결같이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색을 담고 있었다.
“이야기 다 했어요?”
열린 포탈을 확인한 루블리안이 물었다.
나는 내 어깨에 얼굴을 비스듬히 기댄 상태로 눈웃음 지으며 날 올려다보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당시에는 가벼이 넘겼던 박시찬의 말을 이해했다. 그냥, 정말 그냥 연인이 사랑스러워 보이는 때가 있다는 그 말.
나는 루블리안을 내게서 떼어낸 뒤 양 뺨을 잡았다. 수그렸던 상체가 곧게 펴지고 그의 입술이 붕어처럼 툭 튀어나왔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놀란 듯 그의 눈꺼풀이 위로 밀려 올라간다. 덕분에 여름날의 바다를 상기시키는 눈동자가 다 드러났다. 그러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장난스럽게 접힌 눈꺼풀에 조금 가려졌다.
[시현, 안 가요?]
확연한 기운을 가졌던 포탈이 희미해져 갔다. 나는 내밀어진 둥근 입술에 가볍게 입술을 맞댔다가 떼어내고는 답했다.
‘가.’
체온이 높은 뺨에서 손을 떼어내자 찬기가 이때를 노렸다는 듯 손바닥에 달라붙었다. 손이 빠져나갔음에도 루블리안은 포박 마법에 걸린 것처럼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하얗던 피부가 불그스름해져 있다. 이제는 조금이라도 익숙할 만하지 않나 싶었는데 아닌가 보다.
나는 팔을 뻗어 멍하니 서 있는 루블리안의 팔목을 감싸 쥐었다. 차가움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손이 닿으니 정신을 차린 건지 루블리안이 고개를 움직였다. 아직도 어딘가 얼이 빠진 눈이다.
“돌아가자.”
“같이요?”
차츰 초점이 또렷해진다. 이제야 완전히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같이.”
긍정의 의미를 담아 힘 있게 발음했다. 그러자 화려한 낯에 섬세히 다양한 색의 꽃을 수놓은 것만 같은 미소가 피어오른다. 일순간 그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듯한 착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런 날 보며 루블리안이 나직하게 웃음을 흘렸다. 눈을 어디로 돌리지도 못하게 강제로 붙든 그를 보며 생각했다. 신이 사력을 다해 곱게 빚은 외모가 아닐 수 없다. 저 얼굴만큼은 신의 역작이다,
“좋아요, 같이.”
목소리도 역작인 것 같다. 성격도…… 다른 의미로는 역작이지. 몬트리오가 들었다면 우선 데드리언에게 데려갔을 법한 생각을 하며 루블리안과 포탈로 들어섰다. 시야가 울렁이고, 속이 느글거린다. 곧 토해도 이상하지 않은 감각들이 가신 건 눈에 비치는 광경이 정상적으로 돌아왔을 무렵이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방. 아까 있던 소파와 책장들. 마탑주의 방, 그러니까 루블리안의 방이다. 다시 돌아왔음을 확인하고 고개를 돌리니, 루블리안은 괜찮아진 지 오래면서 낑낑 아픈 척을 해댔다. 기회를 놓치질 않는다.
내 어깨와 허리에 팔을 두르고 내 머리에 얼굴을 문대는 그를 떼어내려 하자, 더욱 달라붙는다. 그 몸짓이 마치 꼭 벗어나야겠냐는 물음처럼 보였다.
“성물 확인은 해야지.”
“으응. 조금만 있다가 하면 되잖아요.”
살살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졸랐다. 머리에서 느껴지던 무게감이 사라지고 시야에 그의 얼굴이 가득 찬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는데, 그에 흔들리는 금빛 속눈썹과 사라졌다가 나타나길 반복하는 푸른 눈동자가 내 시선을 빼앗았다.
루블리안은 얼굴을 너무나 잘 활용했다. 넘어갈 수밖에 없게끔.
“루블리안.”
그래도 이번에는 아니었다. 얼른 봉인을 끝내야 했다.
“나는 봉인을 얼른 끝내고 싶어.”
루블리안과 ‘함께’라는 미래를 그리기 위해서.
“협조, 안 할 거야?”
나를 뚫어져라 보던 루블리안이 수줍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청혼이라도 받은 듯한 얼굴을 보아하니 얼른 봉인을 끝내고 싶다는 말의 의미, 그러니까 함께 같은 세계에서 살아가고 싶단 내 속뜻을 파악한 듯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허리와 어깨에 있는 손들이다. 두른 팔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는 허리를 감싸 쥔 흰 손을 검지로 두들겼다.
“놔, 그럼.”
“으으음. 역시 조금만,”
“루블리안.”
“네에…….”
입꼬리에 아롱아롱 달렸던 웃음이 사라지고, 축 아래를 향한다. 눈썹도 한껏 처지는데, 이를 못 본 척하며 걸음을 옮겼다. 까딱하면 시무룩한 얼굴에 져줄 나를 알아서였다.
손깍지를 끼는 것까지는 암묵적으로 용인한 뒤, 서류가 가득한 까만 책상에 다가갔다. 그 책상 위 한가운데에는 성물로 추정되는 물건 다섯 개가 있었다. 억눌린 힘을 보아 성물이 확실했다.
[그게 주신님께서 내려주신 성물이에요. 최근에 만드셨다고 하니까 효과도 확실할 거예요.]
‘그래?’
[네. 인간들 사이에서는 오래된 성물이 가치 있지만, 신들은 달라요. 오래되면 담았던 힘이 희미해져 가는 경우가 허다하거든요. 그래서 최근에 만든 게 가장 가치 있죠.]
신은 주신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부터 시작하여 성물을 만드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까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조리 토해냈다. 혹시 몰라 듣고 있지만, 그다지 지금 상황에서 도움이 될 만한 건 없었다.
“시현.”
“왜?”
“이제 뭐 하면 돼요?”
성물엔 관심 한번 주지 않은 루블리안이 눈웃음치며 물었다. 성물 확인을 끝냈으니 된 거 아니냐며 찰싹 달라붙을 줄 알았는데 예상외였다. 무슨 작당을 꾸는 것 같지도 않았다. 순수하게 궁금해하는 느낌이었다.
이럴 놈이 아닌데. 문득 불안해져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자, 루블리안은 헤실거리며 선량한 낯을 꾸며낸다. 내 생각을 뻔히 안다는 눈을 하고서.
“여보.”
“…….”
“여보가 남편 의심하면 너무 속상해.”
장난스러운 웃음기가 다분한 음성이 귀를 녹녹히 적신다. 나는 손을 뻗어 휘어진 눈매를 덧그리듯 그의 눈가를 살살 문질렀다. 그러자 순하게 눈을 감으며 살짝 고개를 기울인 그가 기분 좋은 소리를 낸다.
“갑자기 왜 만져줘요? 여보 남편이 귀여워 보였나?”
“……그냥. 그래서 정말 별 뜻 없이 물어본 거야?”
“네. 저도 얼른 봉인 끝내고 싶어졌거든요.”
말끝이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스르륵, 눈꺼풀이 들어 올려지고 푸르른 눈동자와 마주하자마자 숨이 턱 막혔다. 폐부 가득 애정이 들어차는 기분이다. 머릿속에 각인되리만큼 선명한 애정이 나를 끈적하게 옭아맸다.
루블리안은 꼼짝하지 못하는 나를 보다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평소보다 달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낸다.
“그러니 말해주세요. 제가 뭘 하면 될까요?”
당신과 오래도록 함께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