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74)화 (74/112)

074. 루블리안과 봉인 (3)

그러나 신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루블리안이 정신을 뒤흔들었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숙이고는 내게 입을 맞춰 오는데 그를 두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여보.”

살근살근 닿은 입술 때문에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익숙해지기 어려운 여보 소리가 달게 울렸다.

“역시 돌아가면 정식으로 결혼식부터 올릴까요? 그게 좋겠죠?”

누가 보면 약식으로라도 결혼식을 한 줄 알겠다. 저번부터 결혼식에 왜 이리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어릴 때도 동성 결혼이 합법화된 나라의 신분을 따오겠다고 하질 않나. 아무래도 법적으로 인정된 관계를 가지고 싶은 듯했다.

“불가능해.”

“왜요?”

싫다는 거절도 아닌 불가능하다는 말에 루블리안이 설명할 틈도 주지 않고 의문을 표했다. 화려한 낯짝이 온갖 불행을 짊어진 사람처럼 변했다. 축 처진 입매가 특히 도드라졌다. 입술이 반질거려 그런 듯했다.

“결혼은 너무 일러요? 그치만 시간을 돌리기 전에도 저희는 성인이었고, 돌린 후에는 이만큼이나 시간이 지났는데요?”

비에 젖은 강아지 같은 모양새로 루블리안이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건 끝이 아닌 시작을 알렸다. 본격적으로 그가 입을 털었다.

“여보……. 제가 뭐 속상하게 군 거라도 있어요? 으응, 있긴 하지만 그래도 결혼하기 싫을 정도는 아니지 않아요?”

죽음을 보게 했다는 걸 상기한 듯 중간에 노선을 변경한다. 어디까지 하나 싶어서 턱을 들고는 바다의 포말까지 선명히 그려 넣은 듯한 눈동자를 마주했다.

“평생 예쁘고 조신하게 여보 옆에 있을게요. 물론 여보랑의 밤 생활을 위해.”

밤, 뭐?

무슨 단어를 들은 건지 내 귀를 의심하는데, 의도적으로 루블리안이 잠시 말을 멈췄다. 이윽고 사르르 눈을 접어 웃는다.

“체력도 열심히 기를게요. 여보를 만족시킬 수 있을 때까지는,”

“그만.”

이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말을 반 토막 냈다. 어떻게 저런 음담패설을 태연스레 할 수 있는지. 괜히 또라이라고 하는 게 아니었다.

자기가 무슨 잘못을 했냐는 얼굴로 모른 체를 하던 루블리안이 내게 더 달라붙었다. 그러고는 아랫입술을 약하게 깨물다가 얕게 입안을 헤집는 둥 내게 살랑였다. 그 몸짓에서 얼른 불가능하다는 말을 정정해달란 뜻을 읽어낼 수 있었다.

“너랑 나 성인 아니잖아.”

“……네?”

“내 세계에서 산다며. 거기서 너랑 나, 미성년자야.”

평생 같이 산다는 말에도 대답했는데, 이런 말을 못 할 게 뭔가. 단조로운 투로 나간 말에 루블리안은 내게 한 대를 얻어맞은 것처럼 입을 벌리고, 눈을 크게 떴다. 그만큼 비현실적인 일을 겪은 표정이었다.

당장 결혼을 못 한다는 사실에 충격받은 느낌은 아니었다. 따지자면 내가 선뜻 저런 말을 할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못해 놀란 느낌이었다.

“와, 진짜…….”

잠시 버퍼링이라도 걸린 것처럼 멈춰있던 루블리안이 제 입가를 매만졌다. 그의 뺨에 보기 좋은 홍조가 올라왔다. 그 불그스름한 뺨이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알고는 있었지만, 나도 단단히 나사가 빠졌구나 싶었다.

“당신 큰일 났어요. 알아?”

종종 존댓말 사이로 반말을 툭 던지고는 하던 루블리안이 이번에도 그랬다. 평소와 조금 다른 점이라면 애교스러움을 싹 뺐다는 것이다. 그 말투는 마탑주로 공적인 자리에서 황제를 멕이던 모습을 연상시켰다. 싸가지 없다기보다는 정갈하고 어른스러웠다는 거다.

애초에 루블리안이 내게 개차반처럼 행동하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는 늘,

“이제는 진짜 못 헤어져요.”

나를 아꼈으니까.

문장을 이루는 단어들에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놓아주려고 한 적도 없으면서 저런 말을 한다.

그리고 루블리안이 내가 있는 곳이 지옥이라도 따라오리란 걸 알면서 그의 안위를 위해 계속해서 외면한 나도 나였다. 얘가 타이르면 그렇구나, 하고 돌아갈 인물인가.

“원래도 그럴 생각 없었으면서 헛소리하지 마.”

이제는 지워진 과거가 돼버렸지만, 어린 루블리안이 내보인 집착도 상당했다. 눈이 충혈되면서까지 날 보고 있던 걸 상기하면 헛숨만 터져 나온다. 다른 의미로 참 대단했다.

“그걸 알면서 피한 거예요? 남편 상처받게.”

내가 알고 있었다는 걸 모를 리 없는 루블리안이 자신을 남편이라고 지칭하며 고개를 떨군다. 상대적으로 내 키가 더 작았기에 그의 얼굴이 훤히 보였다.

파르르 섬세하게 흔들리는 속눈썹은 곧 금가루를 떨굴 것만 같았고, 윗니에 깨물린 그의 아랫입술은 조금 말려 들어갔다. 시선은 여전히 내게 박혀 있었는데, 상당히 작위적인 삐진 얼굴이었다.

뺨이 발그레해서 그런가. 웃기게도 저 행태가 귀엽게 느껴졌다. 나도 진짜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용사가 문제다.

“그래서 싫어? 남편 안 할 거야?”

전과 다르게 뻔뻔스럽게 응수하자, 루블리안이 덜컥 굳었다. 루블리안은 내가 능청맞게 구는 데에는 면역이 없었다. 그가 넋을 놓은 사이, 슬그머니 신이 목소리를 내었다.

[시현.]

‘왜 불러.’

[결혼식 올리면 저도 초청해주실 거죠?!]

……아까도 이 말을 하려고 했나. 성물 찾는 걸 뒤로 하고 루블리안이 살아있음을 만끽하는 나도 나지만, 결혼식 초대를 운운하는 신도 신이었다. 기가 막혔다.

‘신이 인간계에 내려오면 안 되지 않나?’

완전한 직접적인 개입이 아닌가. 신이 아예 현신을 못 할 가능성도 생각해보았지만, 수억 년 전 세계에서 마주한 주신이나 어린 루블리안에게 신의 축복 및 가호를 내릴 때 본 신들을 생각하면 가능은 할 것 같았다.

[상부……의 허락이 문제기는 하지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주신님은 시현에게 다른 인간보다 관대하시니까요! 죽을 운명을 비트신 것도 제가 알기로는 처음이에요. 첫 세계 이후로요.]

마지막 대화가 인상 깊었나 보다. 주절주절 이야기를 터놓는 신을 뒤로하고, 열심히 뛰어대는 루블리안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귀로 들어오는 소리보다 머릿속에 울리는 소리가 더욱 커다랗게 들려오는 탓에 온 신경을 귀에 쏟았다.

루블리안은 살아있다. 내 앞에서 숨을 쉬고 있다. 그 사실을 울리는 머릿속에 되새겼다. 함께 말을 나누던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고장 난 그가 조용한 탓에 다시금 그 장면이 떠올랐다. 아마 이러한 상태가 꽤 오래 지속될 듯했다.

“시현.”

또다시 자신이 살아있음을 체감하고 있단 걸 눈치챈 건지, 루블리안이 단 음식을 먹고 있단 착각을 일 만큼 다정히 내 이름을 입에 담았다.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거나. 진솔한 속내가 세상 빛을 본 게 아닌데도, 불린 이름만으로 사랑 고백을 들은 기분이다. 고작 이름이 불린 것뿐인데 그랬다. 심장이 널뛰었고 귀 끝이 뜨거웠다.

이미 허물어졌던 외벽이 대번에 고운 입자로 변한다. 그것도 루블리안이 아니라 나 자신에 의해서.

“사랑해요.”

“…….”

“제가 당신을요.”

“……알아.”

내 말에 루블리안이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청아한 웃음소리가 귀에 닿자 비눗방울처럼 톡톡 터진다. 활짝 핀 그의 얼굴은 내 시선을 앗아갔다. 그러고는 돌리지 못하게 붙잡는다.

“‘나도’라는 말은 안 해줘요?”

그리 말하며 한쪽 눈을 찡그리듯 웃는다. 그 탓에 옅게 생기는 코주름이 장난스러움을 더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강렬한 색채를 가질 수 있는 걸까. 홀린 듯 그를 보다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성물 찾아야 해.”

애매모호한 답을 하지 않기로는 했지만, 저런 직설적이고 낯간지러운 말은 무리였다. 말을 돌리자 루블리안이 눈을 가늘게 뜨다 이번만 넘어가 준다는 낯을 한다.

“좋아요. 우리에겐 시간이 아주 많으니까 서두를 필요 없죠.”

성물 이야기가 아니었다. 저건 언젠가 내게 ‘사랑해’라는 말을 듣겠다는 포부였다.

“그렇죠?”

“……그렇긴 하지.”

루블리안과 나 사이에 ‘우리’와 ‘시간이 많다’라는 말을 놓으니 이보다 낯설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말들을 곱씹다 보니 답이 늦게 나왔다. 내 심장과 그의 심장이 엇박자로 뛰었다. 서로에게 맞물리는 느낌이다.

“이제 찾으러 갈 거니까 조용히 해.”

“네에.”

허리에 두른 팔을 빼내고 자연스럽게 손깍지를 낀다. 익숙한 행동을 방관하고, 주신의 신전이 있던 위치로 향했다. 이어 눈을 내리감았다. 수억 년 전에 묻힌 마력이니, 감각을 최대한 넓혀야 했다.

수억 년 전으로 갔을 때와 달리 폭발음, 비명, 누군가의 걸음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거친 마력 파동과 구분하지 못했던 힘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고요하다.

루블리안의 숨소리, 심장 소리만이 귀에 스며들어왔다. 느껴지는 건 루블리안의 마력뿐이었다. 나는 조금 더 감각을 넓히며 온 신경을 기울였다.

“저기다.”

한 군데 찾았다. 루블리안과 단단히 깍지를 낀 채로 걸음을 옮겼다. 흔적이 느껴진 곳에는 크기가 꽤 되는, 단면이 거친 하얀 대리석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손 쓰기도 전에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다. 루블리안이 마법을 써 없앤 덕이었다.

마법을 이용하여 흙을 적당히 파다 보니 내 마력의 흔적이 점점 선명히 느껴졌다. 한 번 더 흙을 파내면 보이겠다 싶어 마법을 썼을 때였다.

파스슥. 무언가 부서져 가루로 변하는 소리가 들렸다. 덩달아 내 마력의 흔적까지 움직였다. 마치 가루가 흩날려 이곳저곳에 퍼지듯.

……설마,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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