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73)화 (73/112)

073. 루블리안과 봉인 (2)

한참을 루블리안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가 살아있다는 걸 조금 더 체감하고 싶어 더 깊이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켜자, 옷이 구겨져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어 흡, 하고 호흡을 멈추는 소리까지도.

멈춘 숨소리에 몸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루블리안이 죽어가던 장면이 뇌리에 스쳤다. 눈을 꾹 감으며 루블리안은 살아있다는 걸 연신 되뇌었다. 천천히 1부터 10까지 숫자를 세고 고개를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마부터 목까지, 드러나는 살갗이 온통 붉게 물든 루블리안을 볼 수 있었다.

“루블리안?”

“자, 잠시만요, 시현. 지금은 조금 곤란한데요…….”

내 허리를 단단히 받히던 팔 중 하나가 풀려나갔다. 루블리안이 하관을 가리며 살짝 고개를 비틀었다. 올곧이 내게 향하던 시선이 엇나간다.

그게 거슬렸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텐데, 죽어가던 모습을 봐서 그런 듯했다. 호의를 베푼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신이 나를 원래 시간대보다 조금 과거로 보낸 건 신의, 기적의…… 여하간 한 수였다. 싸늘하게 식은 루블리안의 주검을 보지 않았으니 말이다.

예상보다도 흔들리는 멘탈에, 주검까지 봤다면 내 상태가 어땠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서서히 안정되고는 있지만, 주검을 봤다면 이보다 훨씬 더디게 상태가 나아졌을 테다. 그러면 봉인이 훨씬 늦게 진행되고, 여러모로 차질이 생길지도 몰랐기에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왜 부끄러워해?”

생각을 마친 뒤에도 루블리안의 낯은 원래 색을 되찾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붉은 물이 잔뜩 들어있었다. 평소 같았더라면 이미 본래 페이스를 되찾아, 말끝을 길게 늘어뜨리며 애교를 부리고도 남았을 텐데 말이다.

“그야…….”

욱한 듯 입을 뗐던 루블리안이 얼굴을 쓸어내리며 붉은 입술을 우물거렸다. 입술에 시선이 쏠리던 차에 자그마한 목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들어왔다.

“당신이 저한테 매달리잖아요. 이렇게 품 파고든 적, 한 번도 없으면서…….”

광활한 하늘을 그대로 옮긴 듯한 눈동자에 애정이 넘실거렸다. 일순 숨이 턱 막혔다. 마르지 않는 애정에 푹 잠긴 것만 같아서.

손등으로 제 뺨과 턱을 식히던 루블리안이 나를 보더니,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유독 시선을 잡아채는 금빛 속눈썹이 부드럽게 팔랑였다. 이윽고 눈매가 유순하게 휘어지더니, 아직도 붉은 기가 가시지 않은 상태로 입을 연다.

“시현.”

“…….”

“시혀언.”

루블리안이 대답 없는 나를 다시 한번 불렀다. 말꼬리를 길게 빼는 동시에 코를 찡긋거린다. 깜찍하다 못해 요망하기 짝이 없다.

미인계에 잠시 정신이 흔들렸던 나는 헛숨을 내뱉고는 왜 불렀냐는 의미를 담아 고개를 까딱였다. 하지만 그 행동이 성에 차지 않는 듯, 루블리안은 재차 내 이름을 머금었다.

“시현. 대답해줘요. 네에?”

“왜 부르는데.”

“좋아해요.”

고백이 훅 치고 들어왔다. 무심결에 눈을 크게 뜨자, 루블리안이 또다시 말했다.

“좋아해요, 시현.”

“갑자기 무슨…….”

“당신이 원하는 걸 말하면, 뭐든 들어줄게요. 좋아해요.”

루블리안이 내 귓바퀴에 입술을 내렸다. 약간의 녹녹함과 잘근 씹히는 감각에 손끝이 움찔거렸다. 좀 전까지 열이 오른 얼굴로 몸서리치던 놈이 갑자기 이렇게 변할 수 있는 걸까. 시전 중이던 마법이 취소되면서 부작용이라도 생겼나 하고 그를 살펴보려던 때였다.

“정말 많이 좋아해요.”

달짝지근한 음성이 다시금 들려왔다. 루블리안은 내게 몇 번이고 좋아한다며 고백해왔다. 그게 스물일곱 번쯤 되었을 무렵에서야 알아차렸다.

이건 루블리안만의 방식이었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걸 내게 되새겨주는.

하긴 내가 봉인 방법을 알아내고 돌아왔다는 걸 저 여우 같은 녀석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끝없이 이어지던 다디단 고백 사이 루블리안이 숨을 쉬는 구간에서 말을 꺼냈다.

“……언제 알았어?”

상당히 간략화된 문장이었으나, 루블리안은 알아들었다. 저 요사스러운 미소가 이를 증명했다.

“시현이 너무 불안해하더라고요. 시현의 행동에 제가 잠시 숨을 멈췄을 때, 특히요.”

“…….”

“그리고 제가 시현의 이상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잖아요. 제 시선이 늘 당신을 향하고 있는 거, 당신이 가장 잘 알지 않나요?”

푸르른 눈동자가 그 속에 깃든 애정에 의해 더욱더 반짝였다. 도톰하게 오른 애교살과 눈꺼풀에 반절 가려졌다는 걸 뒤늦게 인지할 만큼.

“어쩔 수 없네요.”

“뭐가.”

“제가 시현의 옆에서 평생 속삭여줄게요.”

또 개수작이었다. 무슨 근거로 저런 결론이 도출된 건지 알 길이 없다. 도통 루블리안의 사고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냐마는.

슬며시 눈웃음치며 내 이마에 제 이마를 대고 살살 비비는 루블리안을 제지하지 않고 물었다.

“왜 이야기가 그렇게 돼?”

“당연히 이 방안을 구상하는데 제가 일조했고, 당신을 불안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죽음을 코앞에서 목도하게 했으면서, 그 장면을 잊지 못하게 했으면서 말은 많다.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흘리니, 루블리안이 헤프게 웃는다. 이어 이마 다음으로 코가 살며시 맞닿는다.

“평생 옆에 있게 해주세요. 해줄 거죠?”

애원과 흡사한 말을 하고는 허락을 구한다. 이미 어떻게든 마음을 묻으려 한 나를 이리저리 흔들어놨으면서, 이제 와 허락을 구하는 꼴이 괘씸했다.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다 고개를 비틀었다. 이어 얼굴을 살짝 앞으로 빼내자, 가볍게 입이 맞닿았다가 떨어진다.

이마 다음이 코였으니, 다음이 뭘지는 뻔했다. 다음을 예측하고 미리 선수를 빼앗자, 루블리안이 고장 났다. 멍한 얼굴로 “어?” 같은 어리둥절한 탄식만 입 밖으로 흘려보낸다.

“시현.”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이었다. 전에도 그랬듯 루블리안은 빠르게 정신을 붙들었다.

“역시 이건 허락의 뜻으로 한 거겠죠?”

그러고는 익숙하게 제멋대로 해석한다. 변치 않는 패턴이었다.

원래라면 먹금-먹이 금지-하거나, 개수작 부리지 말라고 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함께’라는 미래를 그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 생겼다. 굳이 모호하게 답하거나 밀어낼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바로 대답이 나오질 않으니 루블리안이 나를 살핀다. 헛소리만 가득 내뱉는, 모양만은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도 모자란 입술 위로 시원하게 뻗은 콧대가 보인다. 조금 더 위로 시선을 두면 가장 좋아하는 색을 품은 눈동자가 걱정스럽게 움직이는 게 보인다.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을 만큼 눈에 익은 얼굴이지만, 루블리안을 마주할 때면 언제나 심장이 평소보다 아주 조금 더 빠르게 뛰었다. 그가 내 심박수가 원래 이렇다고 알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때였다. 한쪽 뺨에 따스하고 보드라운 감촉이 느껴졌다. 루블리안의 흰 손이 내 뺨을 감싼 것이었다.

“저랑 평생 살아줄 거예요?”

드디어 내가 어디 아픈 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나 보다. 긴장이라도 한 건지 능청스럽던 음성에서 얕은 떨림이 느껴졌다. 더는 어물쩍 넘기지 않겠다는 내 결심까지도 읽어낸 것 같았다.

“어.”

짤막한 내 대답을 들은 루블리안은 햇빛이 없음에도 자체적으로 빛을 발하는 듯했다. 또한 멸망에 이른 세계를 푸릇한 색들로 차오르게 하는 착시까지도 일으켰다. 그만큼 루블리안은 주변에 꽃봉오리를 틔워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이나 해사하게 웃었다.

“약속해주세요.”

“……평생 같이 살겠다는 걸?”

머뭇거림 없이 루블리안의 고개가 아래로 향했다가 다시 올라왔다. 목숨을 거는 서약이라도 해줘야 하나. 새끼손가락을 엮는 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다지 정상적이라 보기 힘든 약속을 떠올리는데 루블리안이 얼굴을 약간 숙였다. 금빛 머리칼이 내 머리에 닿을락 말락 했다.

“시현이 뭘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그런 거 말고요.”

“그럼 뭐.”

이내 머리와 머리가 맞닿아 살근거렸다. 루블리안은 눈웃음을 치며 입술을 내밀었다. 둥글게 모아진 입술이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정황상 입을 맞춰달라는 것 같은데, 그게 어떻게 약속이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심정으로 루블리안을 직시하자, 그가 입술을 내민 채로 목소리를 내었다.

“맞아요, 시현이 생각하는 거.”

그 탓에 발음이 엉망이었다. 소리가 질질 새고 뭉개졌다. 그러나 원래도 말꼬리를 늘이는 루블리안은 개의치 않아 했다. 도리어 좀 더 예쁘게 웃으며 얼굴을 더욱 가깝게 붙여왔다. 조금만 움직여도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였다.

“이게 무슨 효용이 있다고?”

계속해서 생각해봐도 입술 도장은 아무런 효용이 없었다. 그냥, 입을 맞대는 게 다였다.

사실 입맞춤이 하고 싶어 노린 건가 싶다가도, 그럴 거면 먼저 입 맞춰 왔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도저히 의중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효용 같은 건 없죠, 그래도 시현한테 그런 위험한 서약을 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뒷말이 가장 중요하다는 듯이 루블리안이 뜸을 들였다. 60초 뒤의 공개도 이리 길게 끌지는 않으리라 생각할 때쯤이었다. 꾸며낸 게 분명한 쑥스럽다는 음성이 고막을 간질였다.

“꼭 결혼하는 것 같잖아요.”

평생을 함께하겠다고 한 뒤에 하는 입맞춤은.

루블리안은 말 한 번으로 이 칙칙한 곳을 화사한 결혼식장으로 만드는 재주를 가졌다. 애초에 그가 있는 이상은 이런 세상이라도, 종말이 찾아온 세상이라도 내게만은 쾌적하고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테다.

여전히 산뜻하게 웃으며 입맞춤을 기다리는 루블리안에, 목을 쭉 뻗어 가벼이 입을 맞췄다. 폭신한 감각이 짧게 느껴졌다. 눈을 뜨고 있던 터라 만족스러워하는 그가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머릿속의 작은 구석까지도 빈틈없이 차지한 루블리안에, 봉인에 대한 건 잠시 잊힌 채였는데 불쑥 머릿속이 울렸다.

[저기 얘기 다 했나요?]

이때를 기다렸다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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