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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71)화 (71/112)

071. 홀로 수억 년 전 세계 (4)

“이쪽은 맹세를 했으니, 신경 쓰지 마. 우릴 방해하는 일은 없을 거야.”

잠에 빠진 밀러를 한쪽에 눕힌 뒤, 신도들을 바라보며 케이필이 손부채질을 하듯 손을 휘저었다. 흉흉하던 기세가 가라앉는 걸 보니, 이들끼리 약속한 게 있나 보다. 여길 데려오는 낯선 이는 공격한다든가 하는.

밀러가 숨긴 성물을 찾지도 않은 채, 날 여기로 데려온 것도 그에 대한 연장선 같았다. 수상쩍으니 일단 데려와서 쓰러트릴 생각이 아니었을까 싶다. 내가 쓰러지는 것보다 저들이 쓰러지는 게 더 빠르겠지만 말이다.

아까는 봉인진과 성물을 확인해야 했기에 케이필을 기절시키지 않았지만, 여기에 들어온 이후부터는 뭐든 상관없었다. 저기에 떡하니 봉인진이 있고, 저들 중 몇 명에게 인간이 가지기 어려운 응축된 거대한 힘이 느껴졌으니.

하나, 둘, 셋, 넷. 총 네 군데에서 힘이 느껴졌다. 현재 준비된 성물은 네 개. 그렇다면 밀러의 성물만 준비되면 끝나는 듯했다.

봉인진은……. 따가운 시선을 무시하고 눈을 돌려 봉인진을 살폈다. 그리고 왜 봉인이 실패했는지 이해했다. 미래에서 와서 그런가 진이 너무 조잡해 보였다. 기초는 탄탄하다 해도 세부적인 부분이 엉망이었다.

봉인진을 다 외우고, 고쳐야 할 부분에 쓸 수식과 고대 언어들을 생각하는데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내 옆에 선 케이필이 삐딱하게 날 보고 있었다.

“보면 뭔지 알아?”

“어느 정도.”

봉인진은 됐고. 습관처럼 손톱끼리 딱딱 맞부딪히며 저 네 개의 성물을 어떻게 할지. 그 여부에 대해 생각하려 했다. 내 팔을 억세게 붙잡은 케이필만 아니었다면.

“저걸 알아본다고?”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저걸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해본 낯이었다.

“너 우리처럼 사람은 맞아?”

신의 축복과 가호로 인해 통역되는 말에는 의심이 잔뜩 서려 있었다. 아까와는 또 다른 의혹에 진심이 가득했다.

“적어도 사람 취급은 해줄래. 맞으니까.”

어이가 없었다. 동시에 봉인진을 알아본 걸로 이런 의심을 하는 게 이상했다. 여기엔 고대 언어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나.

금방이라도 속에 있는 말을 쏟아내고 싶다는 낯으로 케이필이 주름진 미간을 둥글게 문질렀다. 마치 짜증을 가라앉히려는 것처럼.

“저건 내가 만들어낸 언어야.”

“……저걸?”

어떠한 진이든 필수적으로 쓰이는 고대 언어를 만든 사람이 케이필이라고? 놀라운 사실에 일순 멈칫했다. 방금 케이필이 내비친 반응이 이해가 갔다. 그로서는 느닷없이 나타난 이가, 그것도 자신이 만든 언어를 자연스럽게 알아보고 있으니 이상할 법도 했다.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고대 언어가 필수적인 지식이지만, 현재는 아닐 수 있으니 조심했어야 했는데. 나는 고대 언어가 처음 세계에서 통용되는 언어인 줄 알았다. 케이필이 만들어 주신의 신도만 알고 있는 게 아니라.

“그래, 저걸.”

불만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케이필에 나는 가벼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가 하는 말이 뭔지 알아들었음에도 뭐가 어쨌냐는 듯이 행동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일부러 이런다는 걸 알았는지 인상을 사정없이 구겼다. 미간이 꼬깃꼬깃한 종이 같았다.

점점 거대한 기척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더불어 거친 마력 파동과 무언가 터지는 소리까지도. 밀러의 성물을 찾지도 않았으면서 참 한가롭다. 몇몇이 빠져나가는 걸 보긴 했는데, 위치를 모르고 무작정 찾으러 나선 건가 싶기도 했다.

기절시킬까. 봉인진과 필요한 성물의 위치가 다 확인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들이 마신과 싸운다면 성물이 또 어디로 사라질지 몰랐다. 잘못하면 부서질지도 모르고.

어차피 실패로 거듭날 거, 목숨이라도 건지는 게 낫지 않나.

물론 목숨을 버리더라도 봉인을 원할 수 있었다. 자신의 신념을 우선시할 수 있었다. 특히나 엿본 밀러의 기억 몇 부분에 비친 케이필은 그런 사람이었다.

“이 봉인이 실패로 끝난다고 해도, 할 거야? 목숨을 잃을 텐데.”

앞뒤를 다 잘라먹은 말에 ‘잃을지도 모른다.’라는 추측성은 담지 않았다. 마신과 싸우는데 목숨을 잃지 않는 건 기적과 같았다. 고대 언어가 내 세대까지 내려온 걸 보면, 여기서 살아남은 사람이 있긴 한 것 같은데…… 신이 첫 세계를 추억하는 용도로 내린 걸 수도 있지 않나. 수억 년 전이라 뭐 하나 확실한 게 없었다.

케이필은 내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낯이었다. 이해를 바란 적은 없었다. 답을 바란 적은 있어도. 쓸데없는 짓을 하는 그를 제지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해할 생각 말고, 대답만 해.”

상당히 강압적인 투였으나, 이렇게 물어볼 수 있는 시간이 차츰 깎여나가 어쩔 수 없었다. 다가오는 거대하고 강대한 존재가 느껴졌다. 휘말릴 생각이 없기에 대답을 듣고 선택을 해야 했다.

“당연히 할 거야. 실패해도 최대한 발버둥 쳐볼 거야. 넌 제대로 모르는 것 같던데, 셜치모는 우릴 일회용 소모품으로 봐.”

“밀러의 성물은 그의 침대 밑 끝에서 두 번째 타일을 열면 나올 거야.”

전에 있던 일을 더 꺼내려는 케이필의 말을 막고 말했다.

내 말에 벙찐 그가 보였다. 기억을 읽는다는 말에 밀러의 성물 위치를 알고 있겠다 예상은 했으나, 쉬이 알려주지 않을 줄 알았다는 속내가 고스란히 얼굴 위로 떠올랐다.

케이필의 반응에 저것도 연기인가 하는 의문이 숨 쉬듯 자연스레 떠올랐으나, 곧 접었다. 지금 상황에 필요도 없는 걸 판단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다른 신도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마력을 움직였다. 스멀스멀 조용히 뻗어 나간 마력은 네 갈래로 찢어졌다. 이어 거대한 힘을 억누른 게 느껴지는 성물에 얇게 도포했다. 확실한 표시를 남겼으니, 원래 시간대로 가도 찾을 수 있을 테다.

추적 마법을 걸기에는 시간대 차이가 너무 커 끊길 가능성이 컸다. 이게 가장 나았다.

“왜 알려줘?”

“글쎄. 닮아서?”

죽을 게 자명한데도 마신과 싸우던 친구들. 그리고 내 동료였던 이들과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답지 않게 친절을 내비친 거기도 했다. 기절을 시킨 뒤, 성물을 빼돌리지 않고.

원래는 저리할까 하는 생각으로 맹세에도 함정을 파놓은 것이었다. 나는 케이필의 봉인, 즉 ‘케이필이 봉인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고 했지, ‘케이필이 마신을 봉인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고 한 적이 없었다. 일종의 말장난이었다.

대답도 들었으니, 이제 움직여야겠다. 나를 뚫을 듯이 집요한 시선을 보내는 케이필을 무시하고, 이곳에 들어올 때 통과한 벽으로 다가갔다. 역시나 손을 대니 이전처럼 쑥 들어가지 않는다. 부합해야 하는 조건을 생각하지 않고, 마법을 쓰려는 때였다.

“어디 가게?”

다가온 케이필이 방금까지 내 팔목이 있던 빈 허공을 잡았다. 제 손을 보다 반사적으로 물린 내 팔을 본다. 우연인가 아닌가 판별하는 눈치였다.

“내 할 일 하러.”

“밀러의 성물, 네가 가져오게?”

“아니.”

마력을 묻히긴 해도 가져오진 않을 거였다. 이대로 나간 뒤에 주신을 찾아 원래 시간대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다가오는 거대한 존재와 가만히 있는 거대한 존재. 두 존재가 모두 느껴지니, 가만히 있는 쪽으로 가면 될 터였다.

더 할 말이 있냐는 뜻을 담아 고개를 까딱이자, 케이필이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강한 건 이미 눈치챈 지 오래였을 테니, 함께 싸워달라고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당연하게도 나는 붙들려줄 생각이 없었다.

내게는 루블리안이 최우선이었다. 나와 살겠다고 이런 무모한 짓을 수락한 그가 살아 숨 쉬는 게 최우선이었다. 케이필의 의지가 확고한 만큼 나 또한 그러했다.

“……만나서 거북했고 다신 보지 말자고.”

끝내 케이필은 나를 놓아주었다. 자존심을 깎아내려서라도 도움을 요청할 줄 알았는데, 의외긴 했다. 어떻게 하든 내가 도와주지 않으리란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걸지도 몰랐다.

이내 마력인지 신성력인지 아직도 판가름이 나지 않는 힘이 걸린 벽이 한 차례 꿀렁였다. 손을 대보니 이번에는 통과가 된다. 한 발짝 내디뎌 이 공간에서 벗어날 때쯤, 고개를 돌렸다.

“그러든가.”

그러고는 짤막한 대꾸를 남기고 방에서 벗어났다. 밀러의 성물 위치를 말해줬는데도 그 누구도 나오질 않는 걸 보면, 전음 마법 정도는 익힌 듯했다. 그렇다면 밀러의 방에 가봤자, 성물은 이미 누가 들고 나르는 중일 테다.

마법으로 최대한 오감을 높여 억눌린 거대한 힘을 느끼기 위해 애썼다. 발걸음, 폭발음, 말소리. 거친 마력 파동, 마력과 신성력 구분 지을 수 없는 힘. 뇌리에 그 모든 게 스쳐 지나간다. 자동차 안에서 스치는 바깥 풍경을 보듯이.

“아.”

찾았다. 밀러의 방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마력을 묻히는 게 먼저였기에, 그쪽으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 본 하얀 복장이 보인다. 상대방이 나를 못 볼 만한 거리에서 마력을 움직였다. 확실히 마력이 묻은 걸 확인한 뒤에는 또다시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주신이 있는 장소였는데, 도착한 곳에는 사람 한 명 없었다. 또 막다른 길이었다. 힘이 느껴지는 새하얀 벽을 응시하다, 손을 대려는 순간. 하얀빛이 내 시야를 덮치고 무언가 나를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거의 빨려 들어가는 수준이었다.

이제는 지워진 과거이나, 전에 신탁을 받는 장소에 들어갔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 몸을 휩쓸었다. 눈 앞을 가리던 새하얀 빛이 사그라듦과 동시에 거대한 압박감이 나를 내리눌렀다. 숨이 턱 막히려는 차에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아이야.”

수그러진 상체에 절로 바닥을 향한 고개를 힘겹게 올리자, 왕좌라 칭해야 할 것만 같은 의자에 느른히 앉은 신이 보인다. 새겨진 본능이 말해 준다, 저게 주신이라고. 세계를 창조한 신이라고. 헐떡이는 내 숨소리 사이로 새하얀 백발을 길게 늘어뜨린 신의 목소리가 들어찬다.

“기다리고 있었단다.”

그리 말하는 신은 압박감과 힘에 짓눌린 나를 보며 자애롭게 웃고 있었다.

저기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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