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070. 홀로 수억 년 전 세계 (3)
케이필은 확인을 다 끝낸 건지, 쓰러진 신도의 앞을 막아선 채 나를 응시했다. 그 모습이 꼭 쓰러진 주인을 지키려는 개 같았다. 내게 치명상도 못 입히리란 걸 알아서 그런가 딱 그 정도의 감상만이 들었다.
“확인은 다 했나 봐.”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새길래 운을 떼 주었다. 느긋하게 기다릴 시간이 없어 나간 별 감정 없는 음성에 케이필이 꾹 닫았던 입을 벌렸다.
“……네 목적이 뭐야.”
“너랑 같지. 봉인.”
명쾌한 답이었다. 그러나 케이필은 의심의 기색을 조금도 지우지 않았다. 생각보다 멍청해서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여기서 의심을 거둔다면 그건 답이 없는 거였다.
“날 수상쩍게 여기는 건 이해하는데…… 너나 나나. 여기서 이럴 시간은 없을 텐데?”
밀러의 기억 속 봉인 준비는 이제 막바지에 다다랐다. 봉인진 그리는 것이 끝나갈 시점, 그는 숨겨둔 성물을 가지러 이동했다. 그러던 차에 나를 만나 이런 꼴이 된 거고.
창백하게 질린 채로 굳은 케이필이 나를 강렬하게 노려보았다. 내가 밀러의 머릿속을 보았다는 걸 모르기에, 정보가 어디서 샜는지 추측하는 듯했다.
“내 말 틀려?”
그러나 그걸 기다려 줄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흘린 사람은 없고, 기억을 털린 사람만 있으니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답은 나오지 않을 터였다. 한마디로 저건 시간만 잡아먹는 짓이었다.
“……맞아. 그런데 너를 어떻게 믿고, 너의 뭘 믿고 함께 행동하겠어. 내 목적과 네 목적이 일치하는 이상, 너는 봉인을 도우려 할 텐데.”
봉인을 도울 생각은 없는데. 저리 생각이 튀는 게 이상하진 않았으나, 헛다리를 제대로 짚었다. 미래에서 온 나는 이미 이 봉인 시도가 실패로 막을 내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시간도 촉박해, 지금 손 쓰기도 어려운데 실패에 굳이 가담할 이유가 있나.
어차피 돌아갈 예정이니, 성물과 봉인진. 그 두 가지만 확인하면 됐다. 시전 방법은 이미 뒤진 기억 속에서 발견했으니 상관없었다. 짧은 시간 내에 기억을 훔쳐보다 보니, 봉인진은 직접 가서 봐야 하지만 말이다.
“나는 샬로메님이 만들고, 그분이 보내셨지.”
“뭐?”
진실과 거짓을 섞은 말에 케이필이 목소리를 높였다.
사실 나를 누가 창조한 건지는 몰랐다. 애초에 부모라 하고 싶지도 않은 이들이 어쩌다 낳은 아이인데 신이 창조했다기엔 무리가 있지 않나 싶기도 했다.
여하간 누가 날 만든 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주신이 항상 조잘거리는 그 신을 통해 날 여기로 보낸 건 맞았다. 주신의 허락이 없었으면 첫 세계에 발을 디디지도 못했을 것이다.
“네가 하는 일을 방해하지 않을 거라 샬로메님을 걸 수도 있어.”
함정이 있다고는 느끼지 못할 만큼 확신에 찬 어조였다. 케이필은 주신에 진심인 건지, 내 말에 얼굴이 경직돼서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듯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맹목적인 신앙이었다. 나는 신을 믿지도, 모시지도 않기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좋아. 네가 그렇게 진심을 보였으니, 나 또한 믿을게.”
다시금 느꼈다. 첫 번째로 만들어진 세계가 얼마나 평화로웠는지를. 지금껏 본 사람 중 가장 순진하고 멍청했다. 도대체 어떻게 마신을 봉인할 생각을 한 건지. 또다시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런데 밀러는 왜 기절시킨 거야?”
그때 케이필의 의아한 음성이 귓속으로 침투했다. 생각을 머릿속 한구석에 박아둔 채로, 밀러를 어깨에 짊어진 케이필의 조급한 걸음을 따라 걸었다. 그러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답했다.
“옷을 잘못 봤어.”
조잡한 변명이었다. 갑작스레 정지한 케이필이 눈을 가늘게 좁히며 나를 응시했으나, 나는 그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어쩌라는 식의 몸짓이었다.
“샬로메 님을 걸 정도로 진심이 아니었다면, 넌 내 의심을 벗어나지 못했을 거야.”
“정말 궁금해서 그런데, 다들 너 같아?”
너같이 순진하고 멍청하냐는 뜻이었다. 내가 아니라 마신 쪽 신도도 주신은 쉽게 걸 수 있었다. 모시는 신도 아닌데다 적대적인 관계…… 잠시만. 신이 ‘주신은 여전히 마신을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왜 봉인을 방관하지? 애초에 이 전쟁은 왜 일어난 거지?
“나 같냐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다들 샬로메님을 존경하고 사랑하지. 셜치모는 웩. 진짜 싫어하고.”
터벅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사라졌다. 멈춰 선 케이필이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토하는 시늉을 했다. 눈동자에 어린 경멸, 주름진 미간, 그리고 찌그러진 눈살이 그가 마신을 얼마나 끔찍이도 싫어하는지 가감 없이 드러냈다.
“셜치모와 샬로메님은 사이가 좋잖아.”
이 전쟁과 봉인이 일어난 자세한 상황을 모르기에 떠볼 요량으로 고민 끝에 도출된 결론을 입에 담았다. 그러자 케이필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더욱 얼굴을 구겼다. 낚시질에 쉽게도 걸린다.
“빌어먹게도 그렇지.”
조소를 흘린 케이필이 다시 걷기 시작한 탓에 얼굴은 볼 수 없었으나, 화가 가득할 게 분명했다. 이건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그가 정보를 더 주기 바라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이내 크게 울리는 발걸음 소리 사이로 한 맺힌 음성이 끼어들었다.
“샬로메님은 우리를 만드셨어. 사람들을 그냥 방치하는 셜치모와 다르게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을 엄격하게 구분하시고, 창조한 사람 한 명, 한 명을 신경 쓰시지. 저번엔 리오에게 미샨을 믿지 말라고 말씀하시더라고. 그러면 좋지 못한 일만 가득 일어날 거라 하시면서.”
케이필은 더 예시를 들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얘가 날 믿는 척만 했구나, 라는 깨달음만 얻었다. 아무래도 연기의 귀재인 듯했다. 순진하고 멍청한 건 나였다. 저쪽은 영악하기 그지없다.
“케이필.”
“왜 불러?”
“아직도 나 의심해? 가만히 듣고 있으니까 셜치모랑 샬로메님의 행동을 반대로 말하네.”
방금 들은 이야기로 치면, 주신은 사소한 것 하나하나 간섭하며 인간을 통제하는 신이다. 그러나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수긍하기엔 내가 아는 것이 있었다.
마신과 주신은 의견 대립으로 갈라섰다.
그 말은 인간 몰살을 원하는 마신과 달리 주신은 인간을 손안에서 굴릴 수 있는 창조물로만 보는 게 아니며, 인간을 살리고자 한다는 거였다. 더불어 현재 천계에 존재하는 ‘인간계에 허가 없이 직접적으로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을 내건 신이 주신일 테다. 가장 상부에 위치에 있으니 말이다.
그런 신이 인간을 제멋대로 통제한다? 인간계에 관여하지 말라고 하며, 방관하는 걸 택한 신이? 웃기지도 않은 소리다. 만일 아는 게 없었더라면 주신부터 그 아래 신, 그리고 그 아래 인간들까지 싹 다 세뇌라도 됐나 싶었을지 모르긴 하다만.
“……네가 하도 수상하게 구니까 안 할 수가 있겠어?”
막다른 길에서 걸음을 멈춘 케이필이 고개를 휙 돌리며 대꾸했다. 이렇게까지 속은 게 오랜만이라 그런가 저 짜증이 진실한 감정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겉보기로는 진짜 같은데 이렇게까지 연기 잘하는 사람은 또 처음이라.
“그건 그렇지.”
선뜻 인정하자, 케이필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어금니라도 꽉 깨문 듯했다.
“너 진심이야? 내가 하는 일 방해하지 않겠다는 거.”
“밀러를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알 수 있지 않나. 게다가 방해할 거면 진작했어. 이 신전에 있는 신도들 모두 잠들게 한 뒤 기억을 읽으면 되니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에 케이필이 큰 반응을 내비쳤다.
“뭐? 기억을 읽어?”
끝 음이 높게 올라갔다.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은 탓에, 커다란 성량에 고막이 찢어지는 착각이 일었다. 나는 내가 정상이 아님을 알고 있다. 아마 용사를 해 본 사람은 다 이럴 것이다. 아니면 아예 무너지거나.
아무렇지 않은 내 표정을 보더니, 케이필이 인상을 굳히며 입매를 일그러트렸다. 경멸과 비슷한 시선이 내게 향했다.
“넌 도대체 정체가 뭐야?”
“뭐가.”
“기억을 읽는다는 건 들어본 적도 없어!”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케이필에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먼 곳에서 느껴지던 거친 마력 파동이 근처에서도 느껴졌다. 이럴 시간이 없을 텐데 참 여유로워 보였다. 대신 움직이는 사람이라도 있나 싶을 정도였다.
“목적이 같으니, 네 일만 방해하지 않으면 되잖아. 뭘 그렇게 파고들어.”
내가 할 말은 아니었으나, 루블리안이 중요했다. 몇십 분 지나지 않았으나, 루블리안이 죽은 몇십 분에 살고 싶지 않았다.
여기로 온 걸 보니, 이 벽 너머에 뭔가 있는 듯했다. 벽에서는 마력인지 신성력인지 여전히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샬로메님의 명에 대고 제대로 약속해.”
“하던가.”
“난 진지하거든?”
내 태도가 불만스러운 눈치였다. 자세를 바로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까다롭기도 하다.
“알겠으니까 하자고. 너도 그렇지만, 나도 그리 시간이 많지 않아서. 그 맹세라는 거, 어떻게 하는 건데.”
“심장 부근에 손을 대고 신께서 내려 주신 힘으로 체내를 파고들어. 그리고 그 힘으로 심장을 얇게 감싼 뒤에 말하면 돼. 샬로메님의 명을 대고 봉인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어차피 실패할 봉인, 원래부터 방해할 생각이 없었기에 말을 따랐다. 가슴팍에 손을 얹으니, 태극기를 앞에 두고 선서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 기분을 떨쳐내고는 입을 열었다.
“샬로메의 명에 대고 케이필의 봉인을 이 시간대에서 방해하지 않겠다 맹세합니다.”
마력이 심장 부근으로 흡수되는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무언가가 심장에 박히는 기분이라 일순 몸을 비틀거렸다. 잠시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고 케이필을 보자, 그가 놀란 얼굴을 갈무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와.”
이어 그가 막다른 벽을 향했다. 그의 모습이 반쯤 사라지고, 이내 완벽하게 자취를 감췄다. 벽에 손을 대니, 쑥 들어간다. 탐지 마법으로 안을 살핀 뒤에 알아차렸다. 벽 안이 마신을 봉인할 장소라는 걸.
앞으로 발을 디뎠다. 쏟아져 내리는 하얀 빛이 사그라들 무렵, 시야에는 무언가 올려놓아야 할 것만 같은, 골반쯤 오는 사각 석상 다섯 개와 그 가운데 봉인진으로 추측되는 것이 보였다. 그 외에도 수가 꽤 되는 이들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결코 좋지 못한 눈빛들이었으나, 상관은 없었다. 나는 성물의 위치와 봉인진만 알아내고 떠날 예정이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