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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69)화 (69/112)

069. 홀로 수억 년 전 세계 (2)

한동안 정신만 가다듬었다. 방금 보았던 장면이 너무나 생생했다. 아주 잠시 잊는 것도, 한구석에 미뤄 두는 것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머릿속을 떠나가지 않았다.

“계속해서 절 생각해 주세요.”

더불어 루블리안이 남긴 당부까지도.

그에 바닥을 치던 기분이 더욱 저조해졌다. 조금 고개를 숙인 상태로 눈자위를 지압했다.

본인이 단 한 순간도 생각을 놓게 해 주질 않으면서, 그렇게 잊지 못하게끔 행동했으면서 저런 말을 남기다니. 오므린 입술이 풀리며, 입술 새로 허탈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 감도 잡히지 않을 때쯤, 멀지 않은 곳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그제야 과거로 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늦어도 한참 늦은 확인이었다.

새하얀 대리석과 석회암이 크고 작은 덩어리로 존재하는 게 아닌, 섬세한 모양으로 신전을 이루고 있었다. 밤눈이 좋아 사위가 깜깜해도 어느 정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고개를 치켜들어 위를 올려다보니 고장 난 마법 회로가 보였다. 그 순간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곳에서 거친 마력의 파동이 크게 느껴졌다.

아, 여기 지금 전쟁 중이지. 루블리안이 머릿속에 당당히 자리한 탓에 이 모든 상황을 늦게 알아차렸다.

가쁜 호흡을 가라앉힌 나는 목적을 되짚었다. 얼른 봉인 방법을 찾고, 주신에게 간다. 그게 루블리안을 살릴 방안이었다. 이렇게 끝없는 감정에 허우적거리다간 그의 죽음이 쓸모없는 게 될 테다. 오로지 살아있는 그를 보겠다는 마음으로 나는 발걸음을 떼었다.

“넌 누구지? 본 적이 없는 얼굴인데.”

몇 걸음 걷지 않아, 멀지 않은 곳에서 느껴지던 인기척의 주인을 만났다. 전쟁 중이라 그런지 인상을 찌푸리며 의심부터 해댔다. 험악한 목소리였으나, 위협이 되지 않았다. 더한 것들도 겪었는데 될 리가 있나.

그보다는 금발이 눈에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도 자체적으로 빛을 발한다는 착각을 일게끔 하는 루블리안의 머리카락과는 달랐으나, 금발이라는 사실 하나로 시선을 끌었다. 여전히 머릿속에서는 그가 죽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샬로메님을 모시는 신도는 아닌 듯하고…… 설마 셜치모 쪽의 숨겨둔 신도인가?”

샬로메, 셜치모. 여긴 주신의 신전이니 샬로메가 주신의 가명이고, 셜치모가 마신의 가명인 듯했다. 설마 진명을 말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꽤 높은 위치에 자리한 건지, 신전 이들의 얼굴을 모두 아는 듯한 그가 마력을 끌어올렸다. 나를 포획한 뒤 심문이라도 하려는 건가 싶었다. 그러나 그가 모르는 점이 있다면, 나는 이 과거보다 발전된 미래에서 구르고 구른 용사라는 거였다. 한마디로 저 신도를 기절시키는 건 아주 쉬웠다는 말이다.

축 늘어진 금발의 신도에게 슬립 마법을 강하게 걸었다. 한 이틀 동안은 일어나지 못하리라.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상체를 숙였다. 기억을 엿보기 위해 이마에 손을 올린 순간, 또다시 인기척이 느껴졌다.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크게 울렸다.

환각 마법을 써 내가 저 신도처럼 보이게끔 하고는 재빠르게 머릿속을 살폈다. 쓸모 있는 정보를 얻어내기 위함이었다.

점차 커지는 소리에, 기억 속에서 발견한 셜치모 쪽 신도들이 입는 옷을 쓰러진 신도에게 덧씌우고 적당히 외향을 바꿨다. 타이밍 좋게 인영이 드러나고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밀러. 성물을 가져온다고 하고선 거기서 뭐 하는 거야. 한시가 바쁘다고!”

“……케이필. 내가 왜 이러고 있겠어. 큰일이 났으니 그런 거지.”

무릎을 툭툭 털며 일어난 내가 방금 엿본 기억을 되짚고는 한 박자 늦게 대꾸했다. 내가 잠들게 한 신도는 루블리안 세계의 신전으로 따지자면 대신관 정도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용한 정보가 꽤 많았다. 꼼꼼한 성격인지, 신도들의 인적 사항을 모조리 파악하고 있는 덕에 새로 나타난 신도가 누군지도 알아채기 쉬웠다.

“큰일?”

“그래. 셜치모 쪽 신도가 신전에 들어왔어.”

환각 마법을 통해 마신 쪽 신도로 탈바꿈한 이를 발로 툭 건드렸다. 케이필의 시선이 자연스레 쓰러진 신도에게 향했다. 그의 낯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신전에 침입할 수 있는 놈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신원이 파악되지 않는 놈이야. 숨겨진 신도라도 되는 모양인데…….”

느긋한 음성을 꾸며내며 상체를 숙였다. 신도의 턱 부근을 잡아 케이필이 얼굴을 볼 수 있게끔 돌렸다. 힘이 들어간 주먹과 이를 악문 모습에서 의심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를 확인한 나는 말을 이었다.

“힘을 다루는 데에 능숙하지 않은 것 같더라고. 거친 파동이 그대로 전해지던데.”

시간이 부족했기에 완벽하게 기억을 뒤지지 못했다. 대부분은 얕게, 필요한 정보들이 보이면 그 부분만 깊고 빠르게 파고들었다. 그렇기에 혹시 몰라 우리가 흔히 쓰는 신성력, 오러, 마력 등의 명칭을 힘으로 통합하며 말실수를 줄였다.

다행히도 케이필은 여전히 의심하는 기색 하나 없었다. 밀러라는 신도가 다른 이에게 당하리라는 생각은 해 보지도 않은 태도였다.

“허. 초짜가 여기에 들어오다니. 무슨 초심자의 행운이야?”

“그런가 보지. 금세 나가떨어지던데. 얘는 적당히 어디 가둬 놔.”

“뭐? 밀러, 너는 뭐 하려고?”

눈살을 찌푸린 케이필을 주시하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성물을 가져온다고 하고 거기서 뭐 하는 거냐 물었던 사람이 할 만한 질문은 아니었다. 사실 의심하고 있는 거였나. 연기를 너무 잘해 내가 못 알아봤을 가능성도 있었다. 아니면 도중에 눈치챌 부분이 있었거나.

어쩐지 홀 내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나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말했다.

“성물 가지러 가야지.”

“아.”

“그런데 케이필.”

너 나 의심해?

단조로운 물음에 케이필이 이맛살을 구겼다.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얼굴이었지만, 손끝이 움찔한 그 찰나를 나는 목격했다.

하긴 짧은 새 기억을 엿봤으니 따라 한다고 따라 했지만, 행동이 다를 수 있었다. 특유의 습관이 있을지도 모르는 거였고. 아니면 내가 루블리안과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눈동자로 구분하는 것처럼, 그러한 방식으로 구분하는 걸지도 몰랐다.

“케이필. 내가 저런 초짜한테 당할 것 같아?”

“……그럴 리가.”

신도를 일별한 케이필이 고개를 저었다. 한번 직접적으로 날 의심하냐고 물어서인지 그의 행동이 어색해졌다. 갈팡질팡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건 밀러가 강한 축에 속해서 그런 듯했다. 그러니 다섯 개의 성물 중 하나를 받아 신전 내에 숨긴 거겠지만.

나는 밀러의 기억을 상기하며 케이필을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저쪽도 신전 내에 성물을 숨긴 인물 만만치 않게 중요한 인물이었다.

“케이필.”

내가 바라는 건 봉인 방법이니, 케이필과 굳이 싸울 필요는 없다. 마신을 봉인하겠다는 목적 또한 동일했다. 따지자면 같은 편. 그래, 일시적인 같은 편 같은 느낌이었다.

“왜 불러, 밀러.”

미래에서 왔느니, 뭐니. 그런 건 믿을 만한 소리가 못 됐으나, 상관없었다. 케이필과 남은 성물의 위치를 아는 신도를 기절시켜 정보를 빼앗든, 밝혀 도움을 얻든 둘 다 거기서 거기였다.

“네가 예상한 대로 난 밀러가 아니야. 밀러는 이쪽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히는 이유는 수고를 덜기 위해서다. 한 명, 한 명 찾기보다는 나머지 성물을 누가 숨긴 건지 유일하게 아는 케이필의 도움을 받는 편이 더 빠르기도 하고.

물론 협력을 구하는 것보다도 기절시킨 뒤 머릿속을 터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긴 했다. 그러나 엿본 기억 속 케이필은 봉인진을 그리는 장본인이었으며, 봉인에 목숨을 걸다시피 했다. 기절시키려는 미묘한 분위기를 알아차리고 자살이라도 하면 일이 꼬인다.

지금도 마력인지 신성력인지 구분 안 되는 힘을 날카롭게 빼내어 제 목을 겨누고 있지 않은가. 나는 피가 흐르는 목에서 시선을 올렸다. 시야에 케이필의 결연한 낯이 들어온다.

“넌 셜치모의 신도인가? 봉인은 지금도 감행할 수 있어. 날 죽이면 곤란할 거야.”

음산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으나, 겁박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고양이의 하악질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확실히 연기를 잘하는지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한다. 성물 다섯 개와 봉인진까지 마신을 유인해야 실행할 수 있으면서. 묘한 눈으로 케이필을 응시하다 입술을 뗐다.

“별로. 죽일 생각은 없는데.”

“거짓말하지 마! 밀러도, 밀러도 죽였잖아!”

멍청한 소리에 일순 마력인지, 신성력인지 모를 애매한 힘을 쓰려는 손목을 잘라 제압할까 고민했다. 머리가 이렇게 돌아가는 걸 보면 역시 나도 제정신은 아니다. 사람을 이리 망쳐놓는 용사는 할 게 못 됐다.

“살아 있으니 가둬 놓으라고 했겠지.”

“뭐?”

진심으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케이필에 첫 세계가 꽤나 평화로웠으리란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어떻게 저런 멍청함으로 봉인진을 연구하고, 이 전쟁에 앞장선 건지. 강한 축에 속하는 밀러가 당해 정신이 없던 걸 수도 있긴 했지만, 어수룩하다는 감상은 변하지 않았다.

“확인해 보던가.”

쓰러진 밀러에게 건 환각 마법만을 거두며 고갯짓했다. 당연하게도 케이필이 선뜻 움직이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 모습에 세 걸음 떨어지자, 긴장을 버리지 않은 그가 슬그머니 다가가 신도를 살폈다.

쓰러진 몸. 금발. 같은 점이라고는 그 두 가지뿐인데 루블리안이 떠올랐다. 사실 떠올랐다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다. 저 신도들이 나타났을 때도 그는 내 머릿속을 떠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얼른 봉인 방법을 찾고, 돌아가고 싶었다. 생기가 가득한 푸른 눈동자가 보고 싶었으며, 활발히 뛰는 심장 박동을 느끼고 싶었으며, 간드러진 음성이 듣고 싶었다.

그냥 살아 숨 쉬는 루블리안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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