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68)화 (68/112)

068. 홀로 수억 년 전 세계 (1)

눈가에 스미는 햇살 때문인지 자연스레 눈이 떠졌다. 야트막하게 뜨인 눈에 맑은 푸른 눈동자가 들어왔다. 살포시 접히는 눈꺼풀에 푸른 눈동자가 반쯤 가려진 뒤에도 눈 맞춤이 지속되었다. 방금 잠에서 깨어난 탓에 혼몽했다.

“시현, 더 잘래요?”

“아니.”

더불어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허리 둘린 팔을 두드리니, 루블리안이 아쉽다는 눈으로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일부러 저런다는 걸 알았으나, 나는 평소처럼 팔을 내치지 않았다.

속내를 진솔히 터놓자면 수억 년 전으로 가는 걸 미루고 싶었다. 루블리안의 죽음을 볼 각오가 되지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의 죽음을 가만히 목도해야 한다니. 잔혹한 짓이다.

나 또한 시간을 돌리기 위해 루블리안에게 내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인 적이 있지만, 그건 기억에서 영원토록 지워지리라 생각했기에 실행에 옮긴 거였다. 지금과는 미묘하게 상황이 달랐다.

안긴 품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루블리안이 느닷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내 입술을 아프지 않게 잘근거린다. 이갈이하는 개도 아니고, 이게 뭐 하는 건가 싶었다.

“너 뭐해.”

“굿모닝 뽀뽀?”

입술을 문 채로 답해서 발음이 엉망이었다. 말끝뿐만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소리가 질질 샜다. 묘하게 달뜬 숨결 또한 마찬가지였다.

루블리안은 잘근거리다 못해 제 입술을 문지르며 지분거렸다. 쪽쪽. 입술이 맞붙었다가 뗄 때마다 들리는 소리가 커다랬다. 이 넓은 방에 있는 사람이 둘이라 더욱 그랬다.

목을 뒤로 빼니,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화려한 얼굴이 따라온다. 피리 부는 소년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손으로 막으면, 손에 입술을 비빌 테고. 갑자기 뭐에 꽂혀 이러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그, 만.”

입맞춤을 지속하는 루블리안에 한 음절, 한 음절 끊어졌다. 무슨 이음새도 아니고 그 끊어지는 음절 사이를 쪽 소리가 메웠다.

다가오는 그를 피해 뒤로 물러나니, 등에 벽이 닿았다. 더는 갈 곳이 없었다.

루블리안은 그만하라는 말을 들었으면서도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잠시간의 생각 끝에 다시금 입을 맞추려 다가오는 입술을 내가 먼저 훔쳤다. 그러자 루블리안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그의 불그스름한 뺨이 더욱 달아오르고, 푸른 동공에 파문이 일어났다. 목소리를 잃은 것처럼 붉은 입술이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당연하게도 소리는 나지 않았다.

첫 키스라도 빼앗긴 사람처럼 순진하게 구는 루블리안에 헛숨이 새어 나왔다. 방금까지 집요하게 입술을 맞대던 사람은 어디 간 건가 싶었다. 드물게 뚝딱대는 그를 바라보다, 허리에 둘린 팔을 치웠다.

바깥쪽에 있는 그를 건너 침대를 빠져나가려 하니, 정신을 차린 듯 나를 잡아 온다. 바다를 더욱 좋아하게 만들어버린 파란 눈동자가 생생하게 빛났다. 곧 저 생기와 맞닿은 살갗으로 느껴지는 온기가 싸늘해지리라 생각하니 뭐라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치밀었다.

“시현.”

“왜.”

“좋아해요. 또 입 맞춰 주면 안 돼요?”

반쯤 상체를 일으킨 내 팔을 붙든 상태의 루블리안이 애교스럽게 졸라댔다. 해준다고 한 적도 없는데 눈꺼풀이 감긴다. 얼굴을 들이댄 채로 루블리안은 꼼짝하지 않았다.

반쯤 넋을 놓고 내밀어진 입술을 바라보다 검지로 꾹 눌렀다. 입술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곧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미소가 어려있으나, 어쩐지 뚱한 기색을 풍겼다.

“검지도 좋지만, 저는 입술이 더 좋은데.”

“해 준다고 한 적 없어.”

“네에. 부끄럽다고요?”

익숙한 패턴이다. 제멋대로 말을 알아듣고 수긍하는. 여기서 대꾸하면 또 마음대로 해석할 게 뻔해 입을 다물었다.

그런 날 빤히 보더니 루블리안이 뚱한 기색을 없앴다. 완연한 봄을 알리는 듯한 미소만이 화려한 낯에 남았다.

“시현이 한 번 더 입 맞춰 주면 전 정말 행복할 텐데. 물론 두 번이면 더 행복할 테고요.”

“…….”

“세 번이면 너무 행복해서 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거예요. 지금 저 엄청 참고 있거든요.”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루블리안이 속살거렸다. 이내 짧게 코를 찡그린다. 그 애교 가득한 행동에 나는 백기를 들었다. 작정하고 살랑이는 그를 이길 재간이 없었다.

가볍게 입을 맞췄다가 떼어내니, 얌전히 기다린다. 또 입을 맞춰 주리라 생각하는 것처럼. 지금 마주하고 있어서 그런지 이 순간에도 루블리안의 죽음이 머릿속을 떠나가지 않는다. 차라리 내가 죽을 수는 없나 하는 이기적인 생각이 들었다.

죽음은 이기적이다. 특히나 남겨진 사람에게.

물론 시간을 되돌리면 루블리안은 다시 살아나는 거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기억에는 영원토록 남을 테다. 어쩌면 흉터처럼.

너는 내가 죽어갈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잊힌 기억을 되찾은 뒤에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쉽게 나를 용서한 걸 보면 루블리안은 정말 미친놈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저렇게 쉽게는 용서하지 못했을 테니.

“시현?”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이상했는지 루블리안이 나를 불렀다. 의아하다는 눈치였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든 뒤 팔을 잡은 손에서 빠져나왔다.

‘신.’

[네, 시현.]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건지 바로 답이 돌아왔다. 희고 고운 손가락이 내 손가락과 얽히는 감각이 느껴졌으나, 내버려 두고 신에게 물었다.

‘준비됐어?’

[준비야 언제나 됐죠. 사실 언제 말을 꺼낼지 눈치 보고 있었어요. 시현이 마신의 행방을 눈치챈 뒤로부터 주신님이 평행 세계 쪽 루블리안을 견제하고 있거든요. 시간을 돌리려고 해서 그것도 막고요.]

그러고 보니 시간을 돌리는 마법진이 남아있었다. 차원 이동만 막아서 끝나는 게 아니었는데. 결계 마법을 연구했다는 루블리안이 어디 다쳤는지 신경 쓰느라 그냥 넘겨버렸던 것 같다.

신이 챙겨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역시 루블리안과 있으면 다른 걸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그만 좋아해야…… 할 필요가 있나? 습관처럼 현재 진행형인 이 마음을 굳게 다잡으려던 때 의문이 싹텄다. 그간은 세계가 다르니까, ‘함께’라는 미래를 그리지 못하니까 마음을 죽이고 삼키던 거였다. 그런데 지금은 봉인만 성공하면 그 미래를 그릴 수 있었다. 루블리안의 안위를 걱정할 필요 없이.

일순 멍해졌다. 얼마나 바보 같고 멍청했는지를 깨달았다. 약 20년간 좋아한다는 감정을 죽이고 감춘 여파였다.

“루블리안.”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루블리안은 왜 부르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공적인 빛 아래서도 찬란한 머리카락이 함께 나풀거렸다.

그런데 또 말이 안 나왔다. 꼭꼭 숨겨두기만 하다 보니, 그 속내를 드러내 보려 시도하자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루블리안이 속내를 조금이나마 드러내게끔 판을 깔아준 상황도 아니니, 입만 벙긋거리게 되었다.

“시현?”

[시현?]

동시에 귀와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끝으로 루블리안이 건넨 옷을 받아 갈아입었다. 주신을 모시던 신도들이 입던 옷이라며 신이 부연설명을 했다. 이윽고 준비를 끝마친 우리는 신이 연 포탈에 발을 디뎠다.

하도 여러 번 차원을 뛰어넘어본 탓인지 울렁거림에 적응이 되었다. 몸을 뒤엎던 낯설지 않은 감각이 사라질 때쯤, 오그라들던 시야가 돌아왔다.

“……심하네.”

멀쩡한 건물이 없었다. 신전의 벽이었던 건지 각각의 크기로 부서진 새하얀 대리석과 석회암이 바닥에 가득했다. 여러 덩어리로 조각난 새하얀 대리석에서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태양이 뜨지 않은 하늘은 회색빛이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세계는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땅 또한 푸석했다. 새싹 같은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는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온통 무채색이라 봐도 무관했다. 활기와 생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포탈을 넘기 전 다시 맞잡은 손이 살랑살랑 움직였다. 회색빛인 사방을 둘러보던 걸 멈추고 루블리안을 눈에 담았다. 그러자 그가 입을 뗐다.

“시현. 당연하게도 신은 따라가지 못해요.”

“알아.”

“종교 전쟁 중이라 거긴 위험해요. 몸조심하고, 계속해서 절 생각해주세요.”

이해할 수 없는 당부였다. 그를 생각하다간 또 멍청한 실수를 저지를지 몰랐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는 걸 잊은 것처럼.

“저랑 오래오래 같이 살 걸 떠올려 주세요.”

“…….”

“그러면 좀 더 힘을 낼 수 있지 않을까요?”

분명 그러리라는 확신에 찬 어투였다. 허탈한 숨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못 당해내겠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루블리안이 마법진을 펼쳤다. 황금빛으로 타오르는 마법진에서, 그 마법을 시전하려는 루블리안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말리고 싶다가도, 같이 살겠다고 이러한 방안을 찾아낸 루블리안을 떠올리면 멈칫하게 되었다. 숨을 거두는 그 끔찍한 감각을 받아들이고서라도 나와 같이 살겠다 하는데, 그런 그를 어떻게 말릴 수 있겠는가.

황폐해진 세계 속 루블리안만이 색을 품었다. 그리 생각하는 순간, 시선이 얽힌다.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에 금빛 머리칼이 더욱더 반짝이며 휘날리고, 조금 전 내게 입 맞추던 입이 열린다.

“사랑해요.”

말꼬리를 늘이지 않은 고백은 오롯이 진심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동시에 마법이 전개되었다.

주변으로 돌풍이 퍼져나갔다. 회색빛 가루들이 휘날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루블리안의 몸이 무너진다. 그 선명한 장면을 눈에 담으며, 차차 느려지는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며, 섬세하게 퍼지는 마력과 토할 것 같은 감각을 느끼며 생각했다.

루블리안은 개새끼다. 진짜 미친 새끼다.

어떻게든 내가 잊을 수 없게끔 이런 상황에서 사랑 고백을 하는 걸 보면.

뇌리에 선명하게 박힌 그가 쓰러질 때의 상황이, 온도가, 죽어 가는 소리가 영원토록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아니 남을 것이다. 흉터든, 뭐든 어떠한 형태로든지 간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