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67)화 (67/112)

067. 루블리안과 바뀐 그의 세계 (4)

선연한 애정을 맛볼 때만큼이나 숨이 턱 막혔다. 믿음이 너무나 선명했다. 마치 형태가 보인다 느껴질 정도로. 나는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맞붙은 두 입술을 뗄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커다란 손에 붙들려 있었다.

“시현.”

“…….”

“시현.”

“……왜.”

내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부르려는 게 뻔해 애써 대답했다. 목이 막혀서 그런지 느리게 나온 음성이 먹먹했다.

여전히 매끄럽게 눈을 휜 상태의 루블리안은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미풍에 흔들리는 듯한 금빛 속눈썹 아래 그의 뺨은 연분홍 물감을 칠한 것 같았다. 이윽고 양 입꼬리가 위를 향한, 붉은 입술이 열린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제 죽음을 보게끔 해서, 미리 미안해요.”

“미안하면,”

“네에.”

한차례 호흡을 고르자, 그 새로 간드러진 음성이 돌아온다. 나와 달리 기분이 좋아 보이는 루블리안의 손에서 빠져나오며 짓씹듯이 말했다.

“다음부터 이런 짓 계획도 하지 마.”

“그럴게요.”

순한 태도였다. 이어 루블리안이 상체를 숙여 내 허리를 깊게 감쌌다. 무릎에는 신이 공들여 만들었을 게 분명한 얼굴이 올라왔다. 엎어지듯 누워 나를 끌어안은 그가 내 무릎에 얼굴을 비벼댔다. 간지러운 접촉이었다.

[그…… 시현.]

무릎에서 느껴지는 간지러움이 차츰 위로 올라와 가슴께까지 간질인다. 떨어트리려 해도 밀리지 않는 루블리안 탓에, 벗어나는 걸 포기하고는 쌀쌀맞게 신의 부름에 답했다.

‘왜.’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신계에서도 최대한 봉인을, 다른 이의 도움 없이 해결하려 해봤지만, 신이 직접 수억 년 전의 세계로 이동할 시 신력이 강하게 들거든요. 그럼 필연적으로 수억 년 전 세계의 마신이, 넘어온 신의 존재를 눈치챌 테고요.]

신이 더듬더듬 내 기분을 살피며 변명했다. 내 무릎을 차지한 루블리안이 내 손을 제 머리 위에 올렸다. 그러고는 쓰다듬어 달라는 듯 내 손을 앞뒤로 움직여댔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에 감길 때쯤, 다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그런데 지금까지 현존하는, 그 시대에 창조된 신이 연륜이 생긴 상태로 나타나는 것도, 창조되지 않은 신이 나타나는 것도. 다 이상하잖아요. 그때의 마신이 가진 힘도 주신님의 힘이랑 크기가 같으니, 밑천까지 탈탈 털리고 봉인은 못 하고 미래는 어그러질 게 자명해서 이렇게 됐어요…….]

결국 신력의 파장을 마신이 느껴, 신의 존재를 통해 봉인을 알아차릴 터라 신이 못 간다는 거였다. 당연하게도 그 말에 의문이 들었다.

‘마력은 눈치를 못 채? 게다가 그 시절엔 나 또한 창조되지 않은 인간이잖아.’

[아니요? 당연히 알아차리죠.]

그럴 리가 있냐는 어조였다. 도리어 어이가 없어진 건 나였다.

‘어차피 알아차리는데, 신력이랑 마력이랑 뭐가 다르다고?’

[확실히 거대한 마력 파장을 느끼겠지만, 시기가 시기니까요. 가려질 거예요.]

시기가 시기라는 말이 걸렸다. 무슨 종교 전쟁 도중으로 보내지는 건가 싶기도 했다.

‘당신이 말하는 시기가 어떤 시기인데?’

[혼란기이죠. 고민을 많이 해봤는데, 거대한 마력 파장을 아무렇지 않게 넘기려면 총 두 시기밖에 없어요. 하나는 마신과 주신님이 인간에게 힘의 일부, 그러니까 신성력, 마력, 오러를 처음 주어 인간이 이를 능숙히 다루지 못해 혼란할 때.]

‘그럼 두 번째는 종교 전쟁이겠네.’

[네, 맞아요.]

신이라면 어느 쪽은 선택했을까. 오래 고민할 필요도 없이 종교 전쟁 중이라는 답이 나왔다.

봉인의 흔적과 그 방법을 찾기도 쉽고, 처음으로 힘 일부를 나눠준 시기로 가기엔, 루블리안이 과거로 이동하는 마법진을 시전하면서 수억 년 전의 신계에 퍼질 마력 파장이 너무 섬세했다. 제어되지 않는 힘에 의해 느껴질 마력 파장이라면 거칠고 날 것 같아야 했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시현은 종교 전쟁 중으로 보내질 거예요. 그 시기면 한창 싸울 때라 거대한 마력 파장이 느껴져도 어느 정도는 가려질 거라 상관없거든요.]

이어 신은 적당히 한 명을 기절시켜 변장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더불어 인식 장애 마법도 괜찮다는 말도. 신이 저런 말을 해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봉인이 우선이었기에 태클을 걸지 않았다.

이제 다 끝났나 싶었는데, 신이 가장 중요한 이유가 남았다는 듯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마신과 주신님이 힘을 나눠줄 때로 가면 거기에 몇백 년은 있어야 해서 종교 전쟁 중으로 가는 것밖엔 답이 없었어요…….]

애초에 고민할 거리도 없던 거 아닌가. 누가 몇백 년이나 잠복하면서 봉인의 흔적을 찾겠냐고. 기가 막혔다.

이야기의 끝이 보이자, 루블리안이 이를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내 배에 묻었던 얼굴이 드러난다. 뽀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시현, 그럼 잘까요?”

“바로 안 가?”

내 말에 루블리안은 충격받았다는 듯이 입을 벌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드러난 혀가 붉었다.

“잠은 중요해요, 시현. 낮에 그 아저씨한테 시달리느라 고생도 했고, 푹 쉬고 가야 힘을 제대로 쓸 수 있는 걸요, 거긴 전쟁 중이니까요.”

생각해보면 오늘 하루가 순탄하지는 않았다. 용사의 동료를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평행 세계 루블리안부터 지금 이 봉인 이야기까지. 전부.

그때였다. 갑자기 몸이 번쩍 들렸다. 루블리안이 나를 공주님 안기로 안은 탓이었다.

“이게 뭐 하는 거야. 내려.”

“네에. 잠시만요.”

루블리안은 더 걸음을 옮기고서야 나를 내렸다. 등과 다리에 푹신한 것이 닿았다. 침대였다.

“자, 이제 같이 자요.”

이어 내 옆자리를 차지한 루블리안이 나를 꼭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이런 상태로 잠이 오겠냐 물으려 입을 열기도 전에 미약한 마력이 느껴지고 내 눈꺼풀이 감겼다. 수면 마법이었다.

_oOo_

루블리안은 자신의 품 안에서 잠든 백시현을 바라보았다. 용사라고 하기엔 그다지 크다고 느껴지지 않는 체구와 이마를 덮은, 몇천 번이고 가다듬은 듯 고운 검은 머리카락. 그 밑에 촘촘한 검은 속눈썹은 단정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온기가 가득하던 연갈색 눈동자는 흰 눈꺼풀에 감춰진 채였다.

시선으로 얼굴이 닳을 수 있다면, 백시현의 얼굴이 닳고도 남을 지경으로 그를 쳐다보던 루블리안은 허리를 감싼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죽음을 보도록 봉인을 계획한 건 미안했으나, 한 편으로는 기껍기도 했다. 그 모습이 영원토록 지워지지 않을 테니까. 기억에 확실히 남을 테고, 후일 자신에 대한 애정이 사라지더라도 목숨을 바치는 헌신에 버리지 못할 테니까. 애정이 평생토록 여전하리라 여기면서도 루블리안은 안전장치를 하나 설치했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을 비꼬며 매만진 루블리안은 이마를 가린 머리카락을 들췄다. 이어 진득하게 이마에 입술을 문지르듯 맞췄다. 목이든 어디든 진하게 자국을 남기고 싶었으나, 시현에게 혼날 게 뻔했다. 물론 이게 뭐한 거냐고 하면서 살갗이란 살갗은 다 붉힐 테지만.

당신은 모르겠지. 일부러 자신의 고유 세계가 아닌 시현의 고유 세계에서 함께 살자는 걸 보상으로 내건 진짜 이유를.

루블리안은 백시현을 잘 알았다. 그가 스스로를 아는 것만큼이나. 그야 그럴 것이 언제나 지켜봐 왔으며, 처음 본 날 이후로 머릿속에서 그가 떠나간 적이 없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유심히 관찰했고, 어떨 때 어떤 반응을 하는지 또한 새길 듯이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그러니 감히 짐작할 수 있었다. 시현이 제 고유 세계에 그다지 적응하지 못했으리란 걸.

시간을 되돌리기 전, 평행 세계 백시현의 세계와 겹쳐봐 적응했다고 착각하는 것까지는 가능해도 그 이상은 무리였을 테다. 같은 이름, 같은 얼굴이라지만, 엄연히 다른 존재이니 말이다. 자신과 그 평행 세계의 아저씨를 겪은 시현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거기서 살자고 한 건…… 그래야 자신에게만 온전한 애정이 오니까. 그것뿐이었다. 여기서 살면 시간을 되돌리기 전을 회상하며 동료들에게 아닌 척 정을 줄 게 뻔했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루블리안은 그게 내키지 않았다.

[으, 당신은 진짜 뻔뻔한 것 같아요.]

그때 신의 목소리가 루블리안의 머릿속에 울렸다. 어쩐지 안쓰러워하는 어조였다. 물론 그 안쓰러움이 향하는 대상은 루블리안이 아니었다.

[시현은 왜 당신을 좋아하는 걸까요. 얼마나 좋아하면 당신의 말을 의심하지를 않는 건지 놀라울 지경이에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루블리안은 금세 알아차렸다. 신의 축복과 가호에 관한 이야기였다. 사실 그는 시현에게 신의 축복 및 가호를 받지 않았다며 거짓을 고했다. 그런데 그게 무슨 문제란 말인가.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그는 진실로 그리 생각했다.

‘네가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이유를 모르겠는데. 용사는 널리고 널렸지 않나.’

맞는 말이었다. 신이 관리하는 세계는 많았으며, 그중 마왕이 나타난 세계도 어느 정도 있었다. 즉, 신이 만난 용사는 시현을 제외하고도 여럿이라는 거였다.

[시현이 그들과 같나요? 이런 삶을 사는 용사는 시현뿐이니, 관심이 가는 게 당연하죠. 애초에 신계에서도 유난히 당신들을 신경 쓰는걸요.]

‘봉인 때문이겠지.’

그뿐만이 아니라는 걸 쉽사리 눈치챘으면서 루블리안은 대충 대답했다. 시현을 눈에 담기에도 모자란 데 저런 덜떨어진 신과 대화를 오래 나누고 싶지 않았다.

시현은 피곤했는지 미약한 슬립 마법으로도 깊게 잠이 들었다. 그만큼 루블리안의 마법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살살 뺨을 어루만지며 곤히 자는 시현을 망막에 새길 것처럼 응시했다.

백시현이 사랑하는 푸르디푸른 눈에서 수도꼭지를 연 것처럼 애정이 줄줄 쏟아져 내렸다. 침대를 적시는 착각이 일 정도였다.

[그런데 당신, 죽는 거 정말 괜찮겠어요?]

그런 루블리안을 보던 신이 물었다. 망아지, 일 벌이는 나쁜 새끼, 사고뭉치 등등 좋지 않은 별명을 한가득 붙였다지만, 미운 정도 정이었다. 그래서 한 물음에는 차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날 걱정할 시간에 시현한테 축복이나 더 걸어.’

[와…… 진짜 재수 없네요.]

‘다른 세계 망가뜨린다?’

저 협박과 더불어 여러 협박으로 축복과 가호를 받은 루블리안이었다. 그러나 신은 이제 무서울 게 없었다. 결계 마법진이 있으니, 그가 다른 세계를 부숴 버리려는 걸 굳이 상부에 허가받지 않아도 막을 수 있었다. 그런 생각으로 전보다 한껏 당당해진 신이 목소리를 내었다.

[그 협박 이제 안 통하거든요? 결계 마법진으로 당신을 막으면 그만이에요.]

‘당연히 파훼 마법진도 만들었으니까, 조용히 해.’

그러나 돌아오는 말에 신은 무참히 패배했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기에는 루블리안은 철저했다. 실수를 모르는 인간이었다.

종내에 신의 입을 꾹 다물게 한 루블리안은 날이 밝아올 때까지, 따스한 아침 햇살이 눈꺼풀을 간지럽힐 때까지 시현만을 바라보았다. 죽은 동안 보지 못할 만큼을 미리 채우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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