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66)화 (66/112)

066. 루블리안과 바뀐 그의 세계 (3)

짐작했던 말이 루블리안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도대체 저런 부탁을 무슨 생각으로 들어준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활발한 머리만 아프게 돌아갔다.

정의감 때문에? 그럴 리가. 루블리안은 자기가 개새끼, 씹새끼 소리를 들을지언정 정의감 하나로 이런 봉인에 가담할 인간이 아니었다. 외려 위험하고 귀찮은 짓은 무시하는 편이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혹시 나랑 같은 세계에서 산다는 그 보상 하나 때문에 마신을 봉인해달라는 제안을 받아들인 건가 싶었다. 현재까지 들은 이야기 중 그것만이 그가 챙기는 잇속이었다.

물론 미친 건가 싶은 생각과 별개로 기분이 좋은 건 여전했다. 그야 위험을 감수할 만큼 나를 좋아한다는 뜻이니까. 전부터 말했지만, 나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애초에 단숨에 마족, 마왕 등을 죽이고 비현실적인 힘을 쓰는 인간이 되어버렸는데 제정신이면 그쪽이 더 이상하다.

복잡한 내 심정을 안다는 듯이 깍지를 낀 손에서 힘이 느껴졌다. 손을 좀 더 꽉 잡은 루블리안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그는 말도 없이 내 입꼬리에 입술을 가볍게 붙였다가 떼어 냈다.

“입꼬리가 일자로 굳어있길래요.”

지금 뭐 하는 짓이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변명이 날아온다. 동시에 그 무엇도 잡고 있지 않아 자유로운 손의 검지로 올라간 제 입꼬리를 아래로 내리 끄는데, 저게 화내지 말라고 하는 행동이란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어이가 없어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니, 루블리안이 반대쪽 입꼬리에 한 번 더 입을 맞춰 온다. 그러고는 여우 같은 눈매를 한껏 누그러뜨리며 순한 강아지를 흉내 낸다.

“한쪽에만 하면 서운하잖아요.”

그 상태로 살며시 눈웃음까지 친다. 금빛 속눈썹이 사뿐히 올라갔다가 내려가며 시선을 끌었다.

잠시 얼이 빠졌던 나는 곧 정신을 차렸다. 헛숨이 터져 나왔다. 어떻게 저런 말을 순식간에 생각해 내는 건지. 저것도 재능이었다.

“넌 이런 상황에서 농담할 생각이 들어?”

“그렇지만 시현의 입꼬리가 이렇게 되어 있으면 자꾸 신경이 쓰이는걸요.”

‘이렇게’라는 대목에서 루블리안은 한 번 더 검지를 제 입꼬리로 가져다 댔다. 올라간 입꼬리를 내리는 검지에 그 주변이 움푹 패고 살이 같이 움직인다. 이럴 때가 아니라는 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저 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런 나를 진작 알고 있었다는 듯이 루블리안이 더욱 애교를 피워 댔다. 새 부리로 쪼듯 입꼬리가 아닌 입술에 입을 가볍게 맞댔다가 떼어 냈다.

“이번 이유는 뭔데.”

남은 어이까지 싹싹 긁어 없애는 루블리안에게 묻자, 그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듯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양 끝만 하면 중앙도 서운해하니까요. 시현은 안 들렸겠지만, 저한테 말했거든요. 왜 자기만 안 해주냐고.”

“……하다 하다 이젠 입술이 하는 소리도 들어?”

“네에.”

순하게 대답한 루블리안이 뺨에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뺨도 서운해했다는 헛소리를 해댄다. 자연스러운 개수작에 그의 이마에 손을 얹고 얼굴을 쭉 밀었다.

“적당히 해. 지금 이럴 때 아니니까. 봉인은 왜 한다고 했어? 인간이 봉인할 수 있는 거면, 신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마신을 봉인하기로 했다고 이야기하던 루블리안을 떠올리며 정신을 꽉 붙든 채 물었다. 마신은 보통 신도 못 죽이니, 봉인이라는 차선책을 선택한 것 같은데. 그걸 굳이 인간인 우리가 할 필요가 있나.

“그건 신이 설명해줄 거예요.”

루블리안이 설명을 넘기자, 여태 루블리안 때문에 잊고 있던 신이 목소리를 내었다.

[한참 잘 보고 있었, 아 이게 아니지. 네. 신이 봉인하면 좋겠지만, 그게 좀 어렵거든요.]

‘왜?’

[봉인하게 되는 루트를 간략히 설명하자면, 우선 시현과 루블리안은 몇억 년 전의 세계로 갈 거예요. 인간계, 천계, 그리고 마계가 나뉘어있지 않던 시절의 세계죠. 첫 세계라고 보면 돼요.]

루블리안이 했던 말을 토대로 추측하면, 저 첫 세계가 여러 신이 존재했고 그 때문에 종교 전쟁이 일어나 마신이 봉인 당할 뻔한 시기라는 거다.

‘그 세계가 여태 남아있어?’

[네. 음, 인간은 신을 본떠 만든 존재예요.]

두서없는 이야기였다. 내 물음과 관련이 없지는 않을 테니 잠자코 있었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살갗과 고운 머리카락에 머리로 추정되는 부분을 밀기만 했다.

[보통 신은, 인간성이라고 하나요? 그게 없다고 생각할 텐데, 주신님과 마신은 그렇지 않아요. 신들 중 가장 인간적이죠.]

신이 인간적이라니. 양극단에 있다면 모를까, 둘을 가까이 놓고 보니 그렇게 어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반응을 이해한다는 양 신이 조금 더 너그러운 음성을 내었다.

[주신님과 마신이 인간적이지 않으면, 어떻게 당신들을 만들었겠어요.]

저렇게 말하니 맞는 말 같았다. 묘하게 납득이 된다.

[어쨌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가장 인간적인 주신님은 여전히 마신을 사랑하고, 그 시절을 그리워해서 그 세계를 남겨놨다는 거예요. 인간 한 명 없고 신전들이 부서진, 전쟁의 흔적밖엔 남지 않은 세계더라도요.]

씁쓸하단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는 다른 말을 얹지 않았다. 단편적인 상황밖에 모를뿐더러 말 한마디 나눠보지 못한 신이었다. 그 주신이 마신을 여전히 사랑했든 말든 내 목적은 봉인하는 것뿐이었다.

슬그머니 다시 치대오는 루블리안을 저지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묻고 싶은 건 나중에 한 번에 몰아서 물어야 할 성싶었다. 한 번 의문이 든 사실을 파고들면, 자꾸 이야기가 샛길로 빠지니 말이다.

‘알겠어. 그런데 우리가 그 세계로 넘어가서 뭘 해야 하는데?’

신의 말마따나 그 세계는 인간 한 명 없으며, 모든 게 부서졌다. 그저 추억하려는 용도밖에 안 되어 보였다. 만약 거기에 봉인 시도의 흔적이 있는 거라면 신이 그 세계에 갔다 와 봉인하는 편이 효율적이었다.

인간인 우리에게 제안하는 걸 보면 그곳에 가도 봉인의 흔적을 찾지 못하는 어떠한 이유가 있을 테다. 아까는 루블리안이 그런 위험한 제안을 수락했다는 것에 신경이 쏠려, 신이 봉인을 진행하지 못하기에 인간에게 부탁했으리란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루블리안과 있으면 점점 멍청해지는 기분이었다. 온통 머릿속이 그로 꽉 차는 탓에.

[그게…… 루블리안이 마법을 써 수억 년 전의 과거로 가야 해요.]

귀로 들리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 목소리가 꽂히는 것이기에 잘못들을 리가 없음에도 나는 내 뇌가 저 말을 제대로 인식한 게 맞는지 의심했다.

우물쭈물 신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데굴데굴 눈알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무렵, 인정했다. 나는 제대로 들었다. 신이 미친 거였다.

‘당신 제정신이야?’

[끝까지 들어봐요, 시현!]

자칫하면 화를 면하지 못하리란 걸 눈치챘는지 신이 나를 말렸다. 입술을 꾹 깨물고, 이미 이 방법을 들었을 루블리안과 거리를 벌렸다. 유순하고 의아한 낯으로 내게 다가오려 하는 걸 포박 마법까지 써서 막았다.

인간이 수억 년 전 과거로 간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시간대를 지정하여, 얼마 안 되는 시간을 돌리는 것만으로도 죽어가는 그 싸늘한 감각을 느꼈는데. 과거로 가는 것 또한 시간과 관련 있기에 별반 다르지 않을 터였다.

[그…… 걱정하는 부분이 뭔지 알아요.]

‘아는데, 뭐. 제대로 설명해.’

한겨울의 한파를 반팔로 맞이한 것처럼 신의 목소리가 떨렸다. 연신 ‘그게’, ‘어’, ‘아니’, ‘으음’. 소리만 반복하던 신이 한 박자 쉬고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루블리안이 목숨을 바쳐 시현을 과거로 보낼 거예요.]

화가 났다. 진짜 제대로 미친 건가 싶었다. 열이 머리끝까지 뻗쳤다.

[그, 근데 이게! 시현? 시현?]

이어서 말하려는 신을 무시한 나는 얌전히 포박 마법을 당한 채 나를 응시하는 루블리안을 노려보았다. 내가 어디를 들은 지 유추한 듯 입술이 열린다.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알 것 같은데, 화내지 말아요. 기껏 풀린 입꼬리 또 굳잖아요.”

“지금 그런 말이 나와?”

“제 목숨 때문에 그렇죠?”

포박 마법을 푼 루블리안이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가 다가오는 만큼 멀어졌으나, 공간은 한정적이었다. 끝내 날 잡은 그가 내 양 뺨에 손을 얹어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 뒷이야기는 안 들은 것 같은데. 시현이 그 시간대로 가서 봉인을 어떻게 하는지 알아내면, 그 시간대의 주신에게 가세요.”

“…….”

“신은 과거를 볼 수 있으니, 바로 알아차릴 거예요. 가장 인간적이니 시현을 원래 시간대로 보내줄 테고요. 이후에 당신은 시간을 되돌려주세요. 지금 딱 이 상황으로.”

제 죽음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연한 태도였다. 그래서 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나 보고는 몸을 소중히 하라더니, 그 말을 할 처지나 되나 싶었다. 내가 자기를 각별히 여기는 걸 알면서, 저런 부탁을 하는 게 말이 되나 싶기도 했다.

결국 화를 갈무리하지 못한 채로 나는 날카롭게 말을 내뱉었다.

“……넌 주신을 믿어? 그 신이 날 원래 시간대로 안 돌려 보내주면, 넌. 넌 어떻게 할 건데. 네 목숨은? 그리고 네가 죽어가는 꼴을 내가 가만히 보고 있으라고?”

드물게 목소리가 떨렸다. 항상 단조롭고 평이하기만 하던 음에 변화가 생겼다. 아랫입술에서 피 맛이 느껴질 정도로 꽉 깨물었다. 눈가가 시큰거렸다.

루블리안은 감정을 조금도 가라앉히지 못하고 격렬하게 내비치는 나를, 눈매를 둥글게 휜 채로 응시했다. 내 걱정이 달다는 듯한 눈치였다. 이어 입술을 맞추려고 하길래 커다란 손에서 빠져나와 피했다. 진짜 이 미친 새끼는 이 상황에서 입맞춤이나 하려고 하고 있다.

“화나는 거 알아요.”

기어코 빠져나간 나를 다시 잡은 루블리안이 입꼬리에 입을 맞췄다. 아까 같은 가벼움은 사라지고, 오래 입술을 문질렀다. 마치 올라가라는 양.

“제 죽음을 보게 해서 미안해요.”

사과한 후 반대쪽 입꼬리에도 진득하게 입술을 맞춘 루블리안이 내 이마에 제 이마를 갖다 댔다. 이어 살살 비비며 시선을 맞춰 웃는다. 내가 좋아하는 웃는 얼굴이었으나, 기분은 하락세를 탄 지 오래였다. 도저히 마주 웃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저는 현재보다는 미래를 그리는 사람이라서요. 미래에도 계속해서 시현이랑 있고 싶어요.”

사근사근 말한 루블리안이 고개를 틀어 이번에는 내 입술에 입술을 포갠 뒤 뭉개듯 비벼댔다. 신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그 미래에 네가 없으면 어쩌냐는 말을 내뱉기도 전에, 그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신의 존재를 걸어 확실한 계약을 체결했으니, 신을 믿기보다는 계약을 믿죠. 그리고 그 계약보다는 저를 다시 살려줄 당신을 믿고요.”

맑게 갠 하늘과도 같고, 그 하늘 밑에 있는 투명한 바다와도 같은 눈동자는 확신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올곧은 시선이, 다정한 목소리가, 나를 어르는 손길이 루블리안이 진심으로 내가 성공하여 시간을 되돌릴 거라 여기고 있다는 걸 일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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