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65)화 (65/112)

065. 루블리안과 바뀐 그의 세계 (2)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루블리안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내 데일 듯이 뜨거운 뺨이 물러나고, 금세 손에는 비교적 시린 방 공기가 닿았다.

내가 말리지 않았는데도, 루블리안이 멈췄다. 자체적으로 스킨십을 멈추다니. 혹시 결계 마법을 만들다 죽을병이라도 걸린 건 아닌지. 그런 허무맹랑한 상상을 할 정도로 놀랐다. 그런 내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루블리안이 흐드러지게 웃는다.

“더 좋아한다고 하고 싶지만, 그러다간 당신 얼굴이 터질 것 같아서요.”

이내 검지로 내 뺨을 톡 건들며 간지럽게 속살거렸다. 봄꽃을 연상시키는 뺨을 더욱 발갛게 만들면서.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세상 빛을 보려고 요동치는 속내를 내리눌렀다. 튀어 나가려는 마음을 잠잠해지게 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사랑을 고하고, 저리 미소 짓는 루블리안의 한에서만.

“……수작 그만 부리고, 아까 하다 끊긴 이야기나 해. 너 무슨 위험한 짓을 저지른 건 아니지?”

“으응? 시현이 아니라 제가요?”

뼈가 있는 말에 무어라 맞받아칠 수 없었다. 루블리안과 나. 둘 중 위험한 행동을 한 빈도수를 비교하면 내가 압도적이었다.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바로 말할게요.”

딱 다물린 내 입을 응시하던 루블리안이 살랑살랑 웃으며 말했다.

부드럽고 포근한 분위기가 미약하게나마 가시자, 평행 세계 루블리안과 마신 문제가 다시 떠올랐다. 관련 있는 내용일 테니 듣기는 해야 하는데, 저 부탁이라는 게 뭘지 불안했다. 저리 누구 한 명을 홀릴 것처럼 보고 있으니 더욱 그랬다. 꼬리를 살랑이는 여우가 따로 없다.

“뭔데.”

“들어주실 거예요?”

“듣고.”

“으으응. 확답을 주면 알려줄게요, 시현.”

애교스럽게 말꼬리를 늘린 루블리안이 한 걸음 다가왔다. 상체를 숙여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는 눈꺼풀을 내렸다. 별을 부숴 만든 듯한 섬세한 속눈썹 끝이 피부와 맞닿았다.

나보다 큰 키를 낮추는 행동은 순종적이고 온순하다는 걸 드러내는 동시에 내게 해를 끼칠 의사가 없다고 표현하는 것 같았다. 얼굴을 밀어내며 한숨을 흘렸다.

“……알겠으니까. 떨어져.”

“떨어졌어요.”

아쉽다는 눈을 하면서도 내 말을 잘 들었다. 루블리안은 됐냐는 듯이 순하게 나를 응시했다. 고개를 끄덕이자, 입매가 늘어지고 입꼬리가 위를 향한다.

“좋아한다고 해주세요.”

예상치 못한 부탁이었다. 해서 나는 발바닥에 접착제라도 발라져 있는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단 한 걸음도.

“듣고 싶어요.”

“…….”

“시현도 제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잖아요.”

루블리안은 지금 내게 명분을 주고 있었다. 계속해서 속마음을 억누르는 내게, 자신이 그 미친놈의 세계에서 언질 없이 차원 이동을 한 이유를 알아야 하니, 그걸 위해 깊숙이 숨겨둔 마음을 말하라고.

한 가지 루블리안이 모르는 점이 있다면, 아무리 명분 때문이었다고 해도 속마음은 내뱉는 순간. 그 순간부터 제어가 잘되지 않는다는 거였다.

이미 좋아한다는 고백을 루블리안이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몇 번을 흔들렸는가. 그런데 또다시 감춘 속내를 꺼내라고? 그렇게 되면 차후에 내 진심을 제어할 수 없으리라. 입술 새로 무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듣기는 해야 하는데. 최대한 감정을 덜어내고 평소처럼 고저 없이 말하면 되는 거 아닌가. 거친 풍랑에 흔들리는 배에 탄 것만 같았다.

머리와 마음이 따로 놀았다. 한쪽은 지금 이럴 때냐고 나무라고, 한쪽은 속내를 내비치자 하고. 선택이 어려웠다.

“……좋아해.”

결국 승자는 마음이었다. 청명한 하늘을 그대로 담은 눈동자에 담긴 간절함을 보자마자, 추가 기울었다. 루블리안에게 약한 건 변하질 않는다.

작은 음성이었으나, 이 거대한 방에는 우리 둘뿐이었으며 루블리안은 청각이 좋았다. 내 고백을 들은 루블리안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는 낯으로 세상을 분홍 꽃 천지로 만들 것만 같은 미소를 그렸다.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만큼 비현실적인 미소였다.

“이제 말해.”

“그럴게요, 시현. 우선, 저는 기억을 되찾은 후에 신과 계약을 맺었어요.”

차분하면서도 애교스러움이 다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신과 계약을 맺었다는 것에 의아했으나, 설명이 돌아오리란 걸 알아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루블리안은 내 손을 잡아, 날 소파로 이끌었다. 쿠션감이 가득한 소파에 앉자 그가 내 옆자리를 차지했다. 이어 입을 뗀다.

“그게 저쪽의 미친 아저씨가 이 세계로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결계 마법을 만드는데 도와주는 거였고요. 물론 간접적으로요.”

“신은 무슨 이득이 있다고?”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차원 이동을 하지 않는다면, 마신 또한 넘어올 일이 없다. 그러나 그건 신계의 상부에서 허락만 난다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허락을 안 해줄 리가 없지 않나.

“전지전능한 신이니, 인간 하나 막는 것쯤이야 쉬울지 몰라도, 패널티가 있잖아요.”

“아. 상부의 허락.”

“네, 그거요. 지금이야 마신이 아직 거기에 기생 중이라는 게 밝혀졌지만, 그때는 아니기도 했고. 시현이 시간을 되돌린 이후 신과 처음 접선했을 때만 해도 신계가 안정화되는 중이었거든요.”

천천히 설명하던 루블리안이 한 차례 숨을 들이마셨다 내쉰 뒤 말을 덧붙였다.

“정신이 없을 때이기도 하고, 마신의 행방이 묘연했을 때라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차원 이동을 상부에서 허락할 리도 없으니 서로 상부상조해서 미리 일을 막는 예방 차원에서 만들기로 한 거예요. 게다가 그 아저씨가 일을 치르지 않는다면, 시말서를 쓰지 않아도 되고요.”

솔직하게 말해서 맨 마지막이 신이 결계 마법을 만드는 것을 도운 진짜 이유 같았다. 하도 신이 머릿속에서 시말서, 시말서 거려서 그런 듯했다.

“그래서 결계 마법을 만들고 신들이 자신들이 관리하는 세계에 신탁을 내렸어요. 시현의 고유 세계와 같이 마력이 없는 세상에는 용사처럼 뛰어난 마법사를 일시적으로 파견했고요. 결계 마법을 최대한 쉽게, 대마법사면 쓸 수 있게 조정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투정을 부리며 칭찬해달라는 눈빛을 보낸다. 빛을 뿜어내는 착시를 일으키는 초롱초롱한 시선에 나는 투박한 손길로 조심스럽게 금발을 쓸어내렸다. 실크 같은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에 감겼다가 빠져나간다.

곁을 내준 짐승처럼 가느스름하게 눈을 휘더니, 거둬지는 손을 따라와 머리를 비빈다. 들러붙는 게 주인을 좋아하는 대형견 같기도 했다. 하는 짓이나 어투는 여우가 확실하지만 말이다.

“그러니 그 아저씨는 저희가 있는 곳으로 못 와요. 다른 세계도 마찬가지고요. 아마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건 진심일 테지만, 진짜로 죽을 생각은 없을 거예요.”

“그걸 어떻게 알아.”

“마음에 들진 않지만, 저도 ‘루블리안’이니까요. 남한테 조종당하기도 싫어할 테고, 당신한테 흥미를 느끼고 있으니 쉽게는 안 죽어요. 확신할 수 있어요.”

정말 그러리란 확신이 담긴 눈동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루블리안을 잘 알지만, 본인만큼 잘 알 리가 있나. 다른 인물인 동시에 같은 인물이었다. 나는 그를 믿었기에 다음 질문을 했다.

“신과 하기로 한 건, 이게 끝이야?”

끝이었으면 했다. 내게 친근히 대하는 신이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믿을 게 못 됐다. 아무리 인간같이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신은 신이었다. 신과 거래해서 좋은 게 없었다.

혹시 모를 사태를 위해 물은 것뿐이었는데 루블리안이 청아한 웃음을 나직이 흘렸다.

“시현, 지금 저 걱정해요? 해주니까 기분 좋네요.”

“……글쎄.”

“네에. 알겠어요.”

전혀 알겠다는 뉘앙스가 아니었다. 되려 걱정하는 거 다 안다는 듯한 어투였다. 무어라 말을 더 얹어봤자, 루블리안은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할 터였다. 내가 조용히 하자,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가 좀 전의 질문에 답했다.

“하기로 한 게 이것뿐만이 아니긴 해요. 역으로 그쪽에서 제안을 했거든요. 물론 보상도 얻어냈어요. 보상이 뭔지 궁금하지 않아요?”

얼른 물어봐달라는 눈빛이었다. 물어보지 않으면 다음 말을 하지 않으리란 기색도 엿보였다. 작게 한숨을 흘린 나는 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입을 뗐다.

“뭔데.”

“시현과 시현의 고유 세계에서 사는 거예요.”

예상치 못한 보상에 누군가 내 머리를 망치로 내려친 것만 같았다. 내가 뭘 들은 건지 믿기지 않아 루블리안이 내뱉은 문장을 단어끼리 나눠보고 다시 곱씹어보길 몇 번. 내가 잘못들은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그런 걸 왜…….”

“시현. 왜겠어요. 당신을 좋아하니까 그러지.”

진정으로 그 이유가 끝이라는 얼굴이라 할 말을 잃었다. 시도 때도 없는 고백이었으나, 또다시 맥박이 빠르게 뜀박질했다. 이상하게 공기가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전에 시현의 세계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한번 같이 지낸 적이 있잖아요. 음, 당신 입장에서는 현대라 하나. 아무튼 그때 시현에게서는 마력, 신성력, 오러 그 어떠한 것도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건 신이 내 능력을 모두 앗아갔기 때문이었다. 잠재 능력을 피워주기 전처럼. 루블리안은 지금 자신도 그러하겠단 소리를 하는 거였다.

“너, 정신 차려.”

루블리안과 마법은 루블리안과 뻔뻔함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늘 따라붙었다. 그런데 그런 마력을 없애겠다고? 얘가 지금 정상적인 사고가 되는 건가 싶었다.

“시현. 저는 시현이랑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다 필요 없어요. 마력도, 제 세계도. 전부요.”

나를 위해 모든 걸 버릴 수 있다고 담담히 고백하는 루블리안에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나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보통은 이리 헌신적으로, 모든 걸 버리려 하면 부담스러울 텐데, 나 또한 그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내어줄 수 있어서인지. 버겁고 부담스럽기보다는 기껍단 느낌이 강했다.

루블리안이 흔들면 흔드는 대로 흔들린다. 그만 관련되면 중심을 제대로 잡는 게 힘들었다. 특히 내 속내를 두 번이나 털어놓은 게 문제였다. 한 번이 어렵지, 그 다음은 쉬웠다. 마음속에 있는 말들이, 그간 하지 못했던 말들이 우르르 쏟아 나올 것만 같았다.

“……나중에 다시 말해.”

“으응? 뭘요? 나중에 저랑 오래오래 살 인생 계획을요?”

“루블리안.”

“네에. 왜 불러요? 혹시 저는 어떻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시현과 오래도록 사는 거면, 저야 당연히 좋죠.”

수줍게 눈을 내리깔며, 속눈썹을 팔랑였다. 그런 부끄럽다는 낯과 내뱉은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괴리감을 줄 정도로 뻔뻔했다. 나중에 다시 말하자는 게, 인생 계획으로 바뀔 줄이야. 기가 막혔다. 개소리와 뻔뻔함으로는 그를 따라갈 자가 없을 테다.

“그만하고. 결계 마법진 말고도 하기로 한 게 하나 더 있다며. 그건 뭔데.”

내 물음에 루블리안이 “음.” 하며 고민했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신에게 들은 건데요. 마신이 왜 인간계를 몰살하려는지, 알아요?”

싸운 적은 있어도 그런 정상적인 대화를 한 적은 없었다. 고개를 좌우로 젖자, 루블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잇는다.

“옛날에는, 세계가 만들어진 정말 초반에는 한 세계에 여러 신이 존재했어요. 신전도 여러 개였죠.”

나긋한 목소리가 감미로웠다. 동화구연을 해도 잘할 것 같다는 실없는 감상이 들었다.

“한 세계에 신이 여러 명 있는데, 서로가 모시는 신이 다르면 어떻게 되겠어요? 갈등이 생기겠죠? 그래서 벌어진 게 종교 전쟁인데…… 마신은 그때 봉인 당할 뻔했어요.”

봉인? 예상치 못한 말에 설마 싶었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기억 속 마신은 매 순간 빠짐없이 인간을 싫어했는데, 그 이유가 봉인 때문인가 싶었다. 왠지 모르게 맞으리란 확신과도 같은 직감이 들었다.

그런 날 보던 루블리안이 눈을 유려하게 휘었다, 멈춤 없이 한 번에 쭉 그린 것만 같다. 다음 말을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이내 내 손을 뭉근히 문지르다 깍지를 낀다. 따뜻한 체온이 전해지는 순간, 붉은 입술이 열린다.

“지금 당신이 생각한 게 맞아요. 해야 하는 다른 하나는 봉인이에요. 우리는 봉인을 해야 해요.”

그것도 마신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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