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64)화 (64/112)

064. 루블리안과 바뀐 그의 세계 (1)

“여보.”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호칭에 굴러가던 머리가 어딘가에 박힌 듯 그대로 멈췄다. 처음 듣는 건 아니었지만, 직접적으로 내게 건네는 건 아마 처음일 테다.

내가 잠시 멈칫한 틈을 타 루블리안이 나를 좀 더 당겨 안았다. 순식간에 그의 품에 가둬진 나는 허벅지를 올라탄 자세가 되었다. 빠져나가려 하기도 전에 움직이는 입술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왜 저 말에는 개소리라고 안 해요? 혹시 저한테 보내는 비밀스러운 신호였나요? 강아지같이 귀여우니까 뽀뽀해 달라는?”

그리고 개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대체 저런 입을 가졌으면서, 저런 실없는 말만 내뱉을 수 있는지. 머릿속을 한번 뜯어보고 싶었다.

어떻게 생각이 저렇게 튀지. 인간적으로 개소리하지 말라는 게, 입맞춤해 달라는 은밀한 신호일 리가 있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동안 제가 눈치를 못 챘네요……. 시현, 오늘 몰아서 다 할까요?”

진작에 어이없어하는 나를 눈치챘으면서 루블리안은 부러 수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슬며시 내 어깨에 뺨을 문질렀다가, 눈시울을 조금 더 휜다.

“네에?”

익숙하게 조르며 치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으니, 이를 관망하던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고개를 비스듬히 했다.

“내 말보다는…… 네 행동이 더 개 같은데. 아니지, 뭣도 모르는 여우 새낀가?”

“어쩌죠, 시현. 저 인간까지 절 귀엽게 볼 줄은 몰랐는데. 저한테는 당신이 있는데, 기분 더럽네요.”

느릿하게 들려오는 냉담한 음성에 무어라 대꾸할 새도 없이 루블리안이 치고 들어왔다. 화려한 얼굴이 금세 난감한 기색을 띠고, 금빛 속눈썹이 치한이라도 만난 것처럼 파르르 떨린다.

……진짜 미친 건가. 루블리안이 미쳤다는 걸 잘 알면서도 무심결에 드는 생각이었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도 나와 비슷한 생각 중인지 어이없다는 얼굴이었다. 확실히 시간을 되돌리기 전과는 달랐다. 그때의 그라면 자연스럽게 맞받아쳤을 터였다.

“이거 진짜 미쳤네…….”

이렇게 감탄을 흘리는 게 아니라.

“자기는 참 대단해. 어떻게 나와 이 미친 애새끼를 홀렸지?”

루블리안에게 향했던 시선이 내게로 옮겨졌다. 전보다 맑은 눈동자에는 흥미가 가득했다. 곁에 두고 탐구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누굴 실험체로 보고 있다. 시간을 되돌리기 전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다지 정상은 아니었다.

“관심 꺼. 전처럼 우리 여보한테 질척거리면 곤란하거든. 나랑 결혼하기로 해서.”

“……결혼을 하기로 했다?”

“나랑 평생 살기로 했지. 누구랑 다르게 ‘애새끼’인 만큼 나이도 어리고 창창하니까. 늙다리보다는 어린 게 낫지, 안 그래?”

“애새끼들은 어리숙하고 징징거리기 십상이라 금세 질리지. 하는 꼴을 보아하니…… 결혼도 네 멋대로 정한 것 같은데. 빠르게 끝나겠어.”

어느새 당사자 합의 없는 결혼 이야기가 신경전으로 변했다. 똑같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휜 상태인 똑 닮은 두 명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허공에서 스파크가 튀는 착각이 일었다.

어쩌다 대화가 이리 변했는지. 루블리안은 입만 열면 화제를 맘대로 바꾸는 재주가 있었다. 이번에도 의도적으로 흐름을 이리 바꾼 걸 테다. 짐작보다는 확신에 가까웠다.

“여보, 저쪽에서 현실을 부정하는데 어쩌죠. 너무 꼴불견이라 우리 여보 눈 나빠지면 안 되는데.”

얼추 대화가 끝난 건가 했더니, 나를 끌어들였다. 루블리안은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낯을 하고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이내 허리에 둘렸던 팔 중 하나를 움직여 내 뺨에 손을 얹고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뭐 해, 너.”

“으음, 치료? 우리 여보 눈은 좋은 것만 봐야죠.”

이어 간드러지게 말끝을 늘리며 샐샐 웃는다.

섬세한 붓칠로 그려진 듯한 둥근 입술, 잡티 하나 없는 오뚝한 코, 유려한 호선을 그리는 눈매. 가장 좋아하는 색을 담은 눈동자에서 주체하지 못하는 듯이 흘러넘치는 애정. 모든 게 조화롭게 어울렸다. 수려하다는 말을 의인화하면 분명 이럴 터였다.

‘좋은 것’이라는 말에 반박하지 못한 이유도 그 탓이었다. 어떻게 저런 얼굴에 대고, 저런 미소에 대고 부정할 수 있겠는가. 나는 입을 꾹 닫았다.

이런 내 생각을 귀신같이 알아차린 루블리안은 작게 웃으며 귓가에 간지럽게 속삭였다.

“얼마나 좋은 것 같아요?”

“…….”

“귀여워서 좋아요? 아니면 예뻐서 좋은가? 아니면 여보 거라서?”

낯뜨거워지는 말을 이런 상황에서 잘도 해댔다. 우리 둘만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평행 세계 루블리안과 심각한 대화를 하던 중이었다는 걸 떠올리면, 낯짝이 얼마나 두꺼운 건지. 대단할 지경이었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눈은 싸늘해진 지 오래였다. 가늘어진 눈매 아래의 눈동자는 미소란 말과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았다. 저런 눈빛을 하고 눈을 휘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래서, 넌 언제 가지?”

“으응? 여보, 우리를 얼른 내쫓으려는데요? 저도 여기 있긴 질린 참이었으니까, 이만 갈까요?”

확실히 시간을 되돌린 여파가 큰 듯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좀 밀렸다. 한차례 머리를 쓸어 넘긴 그의 입이 작은 틈을 내는 순간, 마법이 시전됐다. 다른 이가 건드릴 틈조차 없이, 내가 본 속도 중 가장 빠르게.

미약한 어지럼증 끝에 내 시야에 들어온 건 길고 큰 소파, 서류가 잔뜩 올려진 사각 책상에 나무 의자, 전체적으로 어두운 빛을 띠는 방이었다. 와 본 적이 있어 모를 수가 없었다. 여긴 마탑주의 방이었다.

“루블리안.”

“네에. 왜요?”

유순히 대답한 루블리안은 잘못한 거 하나 없단 얼굴이었다. 사고 치고 아닌 척하는 게 전이랑 다르질 않다.

머리가 아팠다. 얘가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이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내 허리를 껴안은 팔을 빼내고, 루블리안을 제대로 직시했다.

“무슨 생각이야.”

생각 없이 행동할 놈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무턱대고 신전을 간다고 했던 적이 있지만, 그때는 과거의 흐름을 따라가야 했으니 넘어가고.

나를 빤히 보던 루블리안이 꽃망울이 개화하는 착시 현상을 일으킬 만큼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내 산뜻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방에 퍼진다.

“당신이 14년을 살아올 동안, 제가 뭘 했을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갑작스러운 입맞춤, 스킨십과 평행 세계 루블리안 때문에 이상하다는 걸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루블리안이라면 기억이 난 순간, 바로 달려올 놈이었다. 시간을 되돌리기 전, 그랬듯이.

게다가 기억을 ‘잠시간’ 잃었었다고 했으니……. 머리를 잠시 굴렸으나, 확신할 만한 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평행 세계 루블리안과 관련 있지 않을까 어림짐작했다.

“생각해내자마자, 시현한테 달려가고 싶었는데 꾹 참고 결계 마법진을 연구했어요.”

“……결계?”

“네에. 시현에게 찾아갔는데, 헤어진 이유가 뭔지 기억해요?”

친절한 선생님이라도 된 것처럼 루블리안이 상냥한 어조로 물었다. 그러나 그 속은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과도 같았다. 심기가 불편한 게 웃는 낯임에도 불구하고 심히 드러났단 뜻이다.

기억을 더듬으며, 루블리안이 이현이란 이름으로 전학 왔을 당시를 떠올렸다. 끝내 기억은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등장하는 장면으로 이어졌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

여상스러운 얼굴인 루블리안에게 되묻듯이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래서 이번에는 방해받기 싫었거든요.”

“……결계라는 게, 그럼,”

“그 미친 새끼가 이 세계로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거죠.”

당연하다는 어조였다. 상당히 태연스럽기까지 한 몸짓에 나도 모르게 수긍하고 넘어갈 뻔했다. 나는 우선 루블리안의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저번에 시간 마법 하나를 발명하는 데만 해도 내 몸에 실험하다 보니, 팔이 날아가거나, 다리가 날아가는 건 예삿일이었다. 그런데 결계 마법이라니. 사실상 그것도 차원 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 이동을 막는 마법이니.

평행 세계 루블리안과 마신 문제보다도 루블리안의 걱정이 앞섰다. 뚫어져라 훑어 내린 나는 상처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물론 신관 한 명을 데려다 놓고 옆에서 치유하게끔 만들었을 테다. 시도하면서 단 한 군데도 잘리거나, 다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때 갑작스럽게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운다. 나를 덮치듯 꼭 끌어안은 루블리안이 내 얼굴에 연신 입맞춤을 퍼부었다.

“너 뭐, 읍.”

말을 이으려 하자, 입에도 쪽쪽 소리를 내며 입술을 비빈다. 아까와 다르게 진심으로 기분이 좋아 보여서 할 말을 잃었다. 어떠한 점에서 버튼이 눌린 건지. 그 지점을 모르겠다. 몇 년을 더 봐도 모를 듯했다.

“아, 진짜…… 너무 좋아요.”

“…….”

“어떻게 이렇게 사랑스럽지? 당신이 너무 좋아서 미치겠어요……. 이미 미칠 만큼 미쳤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

내 손을 가져다 뺨에 대고는 문질거리듯 움직이며 말했다. 그 탓에 숨결과 입바람이 고스란히 살갗에 전해졌다. 손바닥에 보들보들한 피부가 닿는 건 익숙했으나, 한껏 풀어진 눈이며 달아오른 뺨이 색정적이었다. 손끝이 미약하게 움찔거렸다.

묻고 따져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됐다. 세계와 관련된 마법을 또 연구한 것에 대한 걱정 때문이기도 했으며, 고백을 기억하는 것 때문이기도 했다.

아닌 척 마음을 숨길 필요가 없어졌으니, 이성은 그러면 안 된다고 하면서도, 깊숙이 묻어 둔 마음이 이따금 존재를 확인시켰다. 도통 제어가 잘되지 않는다. 난리 났다.

“당신이 너무 좋아요. 너무 사랑스럽고 귀여워요. 감정이 주체가 안 돼서 다른 말보다도 이런 말이 튀어나와요. 진짜 어떡하죠. 설명해야 하는데, 당신이 좋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제어가 안 되는 건 나뿐이 아닌 듯 들려온 절절한 고백이 귓속에 자리 잡았다. 열을 식히려는 건지 찬 손바닥에 뜨거운 뺨을 계속해서 비빈다. 그러나 되레 마찰 때문에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내 손도, 루블리안의 뺨도.

잡히지 않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정말 큰일 났다. 얘를 그만 좋아해야 하는데 그게 불가능하리란 예감이 들었다. 유동적인 감정이, 루블리안에 한에서만 고정적일 것 같았다.

부드럽고 간지러운, 딱 이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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