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62)화 (62/112)

062. 루블리안과 기억 없는 본래 세계 (5)

신전에서 마법을 쓴 탓에 경고음이 울렸으나, 그것에 신경을 쓸 새가 없었다.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지금 내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싶었다. 루블리안이, 루블리안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누가 말하는 법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란 탓이기도 했으며, 방금까지 텅 비었던 마음이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으로 차올라 꽉 찬 탓이기도 했다.

“……너, 기억해?”

겨우 내뱉은 말은 주어조차 없었다. 떨림은 없었으나, 믿기지 않는다는 속내가 여실히 드러났다.

내 말이 끝나자, 푸른 눈동자를 감싼 듯한 눈매가 조금 더 둥글어졌다. 역광임에도 불구하고 그림자 하나 없어 보인다는 착각이 일었다.

“왜 못하겠어요, 시현.”

“…….”

“필사적으로 시간을 되돌린 것까지 싹 다 기억하는걸요. 아, 제가 위험한 짓 하지 말라고 했던 것도요.”

말에 뼈가 있었다. 여전히 웃는 낯이었지만, 나를 질책하고 있다는 게 보였다. 시간을 되돌린 이후에도 기억을 가진 루블리안에 놀라 저 원망을 보지 못한 거였다.

“다시 만나게 되면 진짜 화내야지 했는데…… 당신이 한 보고 싶다는 말에 금방 또 기분이 풀려 진짜 미칠 것 같아요.”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루블리안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바람 빠지는 한숨을 내쉬며 울 듯 웃는 그의 모습에 심장이 철렁했다. 어쩐지 손에 힘이 들어가 이불을 꾹 쥐어 잡았다.

“저로는 안 돼요?”

“……뭐?”

“시간을 되돌리는 건, 모든 사람과의 관계를 끊는 거나 다름없는 짓이잖아요. 관계를 끊는 걸 망설이게 하고, 그런 선택을 하지 않게 하는 거, 저로는 안 돼요?”

처연히 속눈썹을 내렸다가 들어 나를 보는 푸른 눈동자는 진심이라 말하고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이미 루블리안 때문에 망설였고, 시간을 되돌리고도 그를 계속 그리워했다.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으며, 죽어가는 감각을 각오할 정도로 마음이 깊었다. 한참 전부터 나를 다 내어줬는데, 자기로는 안 되냐니. 어이가 없다.

루블리안을 빤히 바라보자, 그는 언제 입을 열었냐는 듯 굳게 다물고 있었다. 기어이 답을 듣겠다는 의미다.

“……망설이지 않았을 리가 없잖아.”

누구 때문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진심은 언제나 그렇듯 저 아래에 묻어두고, 단편적인 사실만 입에 담았다.

“그런 선택, 나라고 쉬웠을 리가.”

“……지금 저 때문에 그런 선택을 했다는 거죠?”

루블리안은 주어가 없었음에도 알아서 정답을 맞혔다. 나는 대답해주지 않고 묵언수행을 했다. 그러자 그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움직인다.

“전에도 말했지만, 당신이 더 약았어……. 그리고 고백을 어떻게 그때 해요. 잠시나마 당신과 몇 년 동안 기다려왔던 그 고백을 잊게 된 게 얼마나 억울했는지 알아요?”

바로 내 옆에 앉은 루블리안이 한탄하듯 이야기를 꺼냈다. 깃든 원망이 빠진 음성이었다. 질책 또한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어차피 잊으리라 생각해서 한 고백이 신경 쓰였다.

저 말에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여전히 우리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고, 나란히 걸어가지 못한다. 그렇다고 들은 고백을 물릴 수도 없다. 그런 나를 보던 루블리안이 질책, 원망 그런 불온한 감정 하나 없이 단내가 날 것만 미소를 지었다.

“저도 좋아해요.”

이내 툭 던진 고백에는 진심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었다. 고백에 대한 답을 들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어느새 힘이 빠진 손끝이 움찔했다. 가슴께가 왠지 모르게 뻐근했다. 방 안이 더웠다.

입을 꾹 닫은 날 빤히 응시하던 루블리안이 이내 비밀을 고하는 것처럼 속삭였다.

“시현, 저 이번에는 신에게 축복도, 가호도 받지 않았어요.”

창 너머로 들어오던 햇살이 사라지고, 일순간 내 머리가 가동을 멈췄다. 빠르게 박동하던 심장이 제 속도를 되찾아갔다. 손끝이 싸늘해졌다.

시간을 되돌리기 전, 루블리안이 하도 이 세계, 저 세계를 돌아다녀서 축복 및 가호 자체를 잊고 있었다. 아예 신경도 쓰지 못하고 있던 지점이었다.

그런데 저 또라이는 축복과 가호 없이 다른 세계로 오면 큰일이 난다는 걸 알면서 저렇게 당당히 말하는 건가, 지금? 나는 루블리안의 팔을 거세게 잡았다.

“너 빨리 돌아가.”

“시현.”

“얼른.”

자신의 말을 들어보라는 듯이 말하는 루블리안에 단호히 일갈했다. 가뜩이나 마신이 가까운 곳에 있는데, 축복과 가호가 없다니. 현재의 루블리안은 마신에게 가장 먹음직스러운 음식이나 마찬가지였다.

신체 능력, 마력. 그 두 가지가 뛰어난 그는 마왕이 되면 필시 이 세계를 파멸로 이끌리라. 마왕이 되지 않아도 세계를 반파시키는 놈인데, 가능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안 갈 거예요.”

“루블리안.”

“으응. 시현한테 이름 들으니까 좋네요. 닳을 때까지 불러 줄래요?”

상식적으로 이름이 닳을 리가 없다. 지금 상황에서도 개수작을 부리는 루블리안은 눈을 반달로 접어 웃고 있었다. 그에게서 노골적인 애정은 볼 수 있어도 진지함이라고는 털끝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화를 참으며, 다시 그를 타이르려던 순간이었다. 루블리안이 조금 더 얼굴을 들이밀며 애교스러움이 한가득한 미성을 내었다.

“제가 보고 싶었다고 했잖아요.”

하얀 이불 위 올려져 있던 손등 위로 따뜻한 체온이 더해진다. 이내 손가락 사이사이로 희고 긴 손가락이 자리 잡았다.

“절 좋아한다고도 했잖아요.”

“……그래서 가라고 하는 거잖아.”

“진심으로 제가 갔으면 좋겠어요? 아니잖아요.”

내 코에 툭 제 코를 댔다가 살살 비비며 웃는 루블리안에 나는 얼굴을 뺐다. 너무 가까웠다. 심장이 다시 엇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얼굴로 열이 몰리는 기분이다.

“시현, 전에 제가 했던 말 기억해요?”

“언제.”

“당신의 세계로 갔을 때. 당신과 함께 있을 방안을 생각했다는 거요.”

기억을 못 할 리가 없었다. 세계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주원인이 되는 마력은 내게 넘겨주고, 욕망을 해소하면 된다고 하던 그 소리를 잊을 리가 있나. 설마 이번에도 그러자는 건가 싶었다.

개같이 짖지 말고 그냥 돌아가라는 말을 하려는 순간, 또 루블리안이 먼저 말을 이었다.

“뽀뽀해 주세요.”

“너,”

“하고 싶어요.”

내 말을 자르고 들려오는 저 말은 입을 맞추고픈 욕망을 해소하게 해달라는 거였다. 사르르. 달게 접힌 눈과 볼록 튀어나온 애교살 사이로 가느스름하게 보이는 투명한 바닷물이 같은 눈동자에 애정이 넘실거렸다. 애정이 흘러 내게 닿는다. 범람하는 애정에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으응. 얼른요. 나 마왕 안 되고 당신이랑 오래도록 살고 싶은데.”

내 망설임을 아는 것처럼 루블리안이 조금 더 졸라댔다. 그 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원래도 내가 미친 걸 알았지만, 그 정도가 심하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이 상황에도 아양을 떠는 루블리안이 귀여워 보이다니.

결국 나는 살살 나를 구슬리는 그에게 넘어갔다. 시간을 되돌리기 전이라면 또 개소리라며 넘겼을지언정, 고개를 끄덕이지는 않았을 테다. 그러나 지금 나는 좋아한다는 고백도 해버렸고, 오랜만에 보는 루블리안에, 이 공허함을 채우는 애정에 그냥 모른 척 넘어가고 싶었다.

게다가 이건 루블리안을 위한 것이 아닌가. 조금 전까지는 원래 세계로 보내려 했던 주제에, 퍽 자연스러운 합리화였다.

아주 조금이었으나, 움직인 고개에 루블리안이 내가 얼굴을 뺏었던 만큼 가까이 따라붙었다. 이내 미소를 띤 얼굴이 기울어지며, 보드라운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진다. 잠시간 느껴졌던 뜨거운 온도와 폭신함에 얼굴 전체로 열이 퍼져나갔다.

입을 다물라는 말에 입술을 물린 적은 있어도 조심스럽게 맞닿은 적은 처음이었다. 가슴 부근을 긁어내리고 싶었다. 기분 좋게 간질이는 감각이 가시지를 않는다.

한 번이면 끝날 줄 알았던 입맞춤은 계속 이어졌다. 쪽. 쪽. 쪽.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질 때 나는 소리와 푸른 눈동자에 담긴 열망과 따뜻한 색채의 애정 때문에 간지러움이 더욱 심해졌다. 견디지 못한 내가 슬슬 뒤로 물러나자, 한쪽 팔로 내 허리를 감아온다. 더 다가오기까지 하여, 아까보다도 틈이 없어졌다.

다시금 이어지는 입맞춤에 정신이 혼미했다.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남은 이성을 꽉 붙들고 또다시 고개를 기울이며 다가오는 입술을 손으로 막아냈다.

여기서 멈추면 루블리안일 리가 없다. 그는 내 손목을 붙잡고 손바닥에 보드라운 입술을 문대왔다. 핥고 빨기도 한 덕에 아까보다도 소리가 적나라했다. 질척이는 소리가 귀에 꽂혔다. 그러는 와중에 달게 휘어진 눈매 아래의 푸른 눈동자는 여전히 내게 향해 있어서 더욱 열이 올랐다. 방 안을 채운 공기가 왠지 모르게 뜨겁다 느껴졌다.

“그, 만해.”

“네에.”

뺨이 발그레한 그가 손목을 놓아줌과 동시에 나는 입맞춤을 당한 손을 뒤로 물렸다. 루블리안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는 고개만 돌려 나를 응시했다. 살랑이는 금색 머리카락, 열기를 띠는 바다의 색을 빼닮은 눈동자, 그 밑에 달아오른 뺨과 붉은 입술. 눈에 선명히 들어오는 것들에 시선을 떼야 할 것만 같은데 떼지질 않는다.

“아, 어떡하죠. 큰일 났어요.”

“…….”

“얼른 왜냐고 물어봐 줘요.”

간질거림과 식을 생각을 하지 않는 열에 입을 다물고 있으니, 연신 네에? 거리며 대답을 촉구한다. 얼른 대답해달라는 그는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행복이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라 우리 눈에 보였다면, 그의 주변에는 온통 행복이 가득했을 테다. 파묻혔다 여길 정도로.

몇 번 입술을 달싹인 나는 원하는 게 있다면 얻을 때까지 하는, 그런 집념을 가진 그가 원하는 대로 목소리를 내었다.

“왜.”

“당신이 더 좋아졌어요. 여기서 더 좋아할 수가 있나 싶었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