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61)화 (61/112)

061. 루블리안과 기억 없는 본래 세계 (4)

미래가 완전히 바뀌었다는 말에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마신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게 영 꺼림칙했다. 마신하면 자연스레 함께 떠오르는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곁눈질하다, 시선이 맞닿자마자 눈을 바로 했다.

기억 속, 그는 마신의 축복과 가호를 받은 후 계약을 했다.

신의 축복과 가호는 영혼이 아닌 육체에 받는다. 그래서 조금 전, 현재 내 머릿속을 울리는 신과 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당황했던 것이었다. 즉, 현재의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마신과 관련이 없다. 그렇게 단정 지을 수 있었다.

물론 계약 또한 육체에 한다는 전제지만…….

‘신.’

[네.]

‘당신의 힘으로 계약을 했는데, 시간을 되돌렸다고 하면. 그러면 어떻게 돼?’

[애매해요. 보통은 계약을 영혼에 새기긴 해요. 그렇게 되면 계약을 어길 시, 영혼에 흔적이 남아 후일 환생을 할 때 어긴 값을 치르게 되거든요. 그런데 드물게 육체에 새기기도 해서…….]

둘 다 가능하기에, 신의 마음이라는 거였다. 그렇다면 마신은 무슨 선택을 했을까.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기억 속, 계약서를 꼼꼼히 보고 서명하는 장면이 있긴 했다. 그러나 선명하지는 않았다. 뿌연 안개가 낀 느낌이었다.

몇몇 기억이 그러더니, 저 기억 또한 저랬다. 머릿속에 흘러들어왔던 기억이 천천히 흐려지는 기분이다. 아마 몇 달 내로 다 블러 처리를 한 것처럼 변하리라. 나는 손톱끼리 탁탁 치며 신에게 다시 말했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몸에 마신이 남아있을 수도 있어.’

[네?]

‘시간을 되돌리기 전에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마신하고 계약했었거든.’

[네에?!]

격한 반응에 일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탁탁 치던 엄지와 검지를 멈추고 또다시 머리를 짚자, 시선이 달라붙는다. 전에는 동료들에게 신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미리 양해를 구했었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봐서라도.

이제 내 목숨줄만 제대로 잡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또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몇 년간 큰 걱정 없이 살아왔더니, 이렇게 한 번에 크게 터진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만 엮이면 머리를 안 쓰게 되는 순간이 없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안 괜찮을 리가.”“흐음. 오늘은 인사만 하려고 했던 거라고 들었어. 먼저 들어가서 쉬는 건 어때?”

데드리언의 권유에 몬트리오와 알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을 되돌리기 전과 다르게 그의 태도가 무척이나 담백했다. 그야 어릴 때 나와 만났던 일이 그에게는 없었으며, 이제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과거가 되었으니 당연했다.

여태 보이지 않았던 다른 점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해서 그런지 묘했다. 균열이 일은 느낌이었다. 동시에 내가 내 고유 세계를 평행 세계 백시현의 세계와 동일시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다른 점이 하나 없었으니, 내 세계에 적응한다고 여기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그냥 겹쳐보고 있던 거였다.

어쩐지. 생각보다도 괜찮더라. 허탈한 숨이 새어 나왔다. 무심결에 똑같은 세계에서 과거를 반복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리안?”

의아함이 가득한 부름이었다. 생각에 잠겨 대답을 늦추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다들 여기 있는데 내가 먼저 가도 되나 고민했어. 미안하지만, 먼저 일어날게.”

“어어~ 푹 쉬고, 내일 보자.”

“푹 쉬세요, 리안!”

“내일 보지.”

인사를 받고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내 손목을 향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앞으로 손목을 빼고 뒤를 보자, 갈 길을 잃은 흰 손이 보인다. 어정쩡하게 허공에 떠 있던 팔이 조금 더 움직여 기어이 내 손목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나는 손목을 내어주지 않았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팔을 제자리로 가져가더니 눈을 휜다. 어딘가 숨이 턱 막히게끔.

“내 인사는 받지도 않고 가길래. 데려다줄까?”

“아니.”

“흐음. 그래. 조심히 가, 리안.”

어쩐지 의뭉스러운 어조로 말을 끝맺고는 깔끔하게 물러났다. 가늘게 눈을 접어 웃고 있는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가벼이 흘긴 나는 고개를 까딱인 뒤 등을 돌렸다. 이어 문을 열고 나가 배정된 방으로 이동하면서 연신 바람 빠지는 숨을 내쉬었다. 시간을 돌린 후, 14년간을 반추하면 할수록 나 자신에게 어이가 없었다. 내 고유 세계에 적응하기는 무슨.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 와중에 루블리안이 보고 싶어졌다. 다시는 볼 일이 없으며, 그쪽은 기억도 하지 못할 텐데 말이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방 안에 들어가 문을 열고 침대에 누웠다. 죽을 운명은 해결됐고, 마신의 행방은 아무래도 평행 세계 루블리안과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마신이 영혼이 아닌 육체와 계약을 했을 리가 없다. 아. 갑작스럽게 깨달음이 들이닥쳤다.

‘신.’

[왜 부르세요?]

‘마신, 평행 세계 루블리안한테 붙어있는 게 맞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하도 이상한 탓에 거기에 정신이 팔려 제대로 생각을 못 했다. 그는 마신과 계약 후, 이미 한 번 시간을 되돌렸었다. 그러니 시간이 또 되돌아간 지금도 마신이 그에게 기생하고 있을 테다.

이를 신에게 전해주자, 신은 상부에게 알리고 오겠다며 사라졌다. 머릿속이 고요해지니 더욱 잡념에 빠진다.

날 보곤 흥미로움을 감추지 못하던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행동이 이해가 갔다. 이미 마신에게 회귀 전 이야기를 듣고 흥미가 일어 나를 그리 대하고, 관찰하는 눈빛으로 훑은 것일 테다.

그 눈빛을 떠올리니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기억하는, 시간을 단 한 번도 돌리지 않았을 때. 내가 왜 그를 좋아하지 않았는지 알겠다. 누가 저런 눈으로 나를 직시하는데 좋아할 수가 있을까. 어릿광대가 된 기분이었다.

고백을 받아준 이유도 알겠다. 순진했을 시절이라 내가 그은 선, 경계에 걸쳐있으며, 마왕을 죽일 때까지 봐야 하는 사람과 어색해지기 싫어서였을 테다. 다른 동료들에게 민폐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도 있었을 테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데, 커튼이 거두어진 창 너머로 빛이 들어왔다. 햇살이 피부를 따스하게 간지럽힌다. 뽀송한 이불의 향이 포근했다. 곧 다 해결될 텐데, 허무하단 느낌이 가시지를 않는다. 내가 내 고유 세계를 확실히 인지해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운이 좋으면 루블리안을 다시 만날지 모른다는 그런 되지도 않는 기대를 미약하게나마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시간을 되돌린 지 벌써 14년째인데 감정이 버려지질 않았다. 외려 그리움이 짙어졌다. 몇 년이 더 흘러야 단념할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완전히 소멸하기는 할까 싶었다.

……차라리 내 기억을 묶을까. 아예 기억을 지우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머리는 예민한 부위인지라, 아주 살짝 잘못 건드려도 백치가 되기 마련이었다.

마신 문제가 해결되고, 마왕을 죽이고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내 기억을 조작하자. 루블리안에 대한 기억은 묶어 꽁꽁 숨겨두자. 드물게도 루블리안이 아닌 나를 위한 선택이었다. 그때 머릿속에 익숙한 음성이 들어찼다.

[다녀왔어요, 시현.]

‘어서 와. 위에서는 뭐라고 해.’

[원래 인간계에 관여를 안 하는 게 정해진 운명 때문이기도 하고, 한번 개입하면 두세 번 개입하는 게 쉬워져서 여러모로 좋지 않아 하지 않는 거였는데, 이번에는 특별히 상부에서 개입한다고 해요. 이건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원래부터 이랬어야 한다는 투였다. 마신은 신이 알아서 해결할 것 같았다. 마왕은 마신이 만드는 거니, 마신을 더 일찍이 처리하면 마왕을 잡을 필요도 없다. 그 사실이 문득 뇌리에 꽂혔다.

‘마신 처리하는데, 얼마나 걸려?’

[음, 글쎄요……. 제가 하는 게 아니라서 좀 애매하긴 한데, 그래도 적어도 1년은 걸리지 않을까요? 마신은 주신님과 이 세계를 창조했으니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거든요.]

신은 몇 번 더 말을 정정하더니, 정말 모르겠다고 말했다. 가늠이 안 되는 모양이다. 나는 알겠다고 답하고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신경 쓸 것들이 적어지니, 정신이 그냥 멍했다.

[시현.]

‘왜.’

[으음. 솔직하게 신으로서는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요……. 갔다 와 볼래요? 루블리안이 있는 세계요.]

……뭐? 나는 상체를 일으키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신이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이런 말을 해서 황당하고 이해도 안 가긴 할 텐데요. 시간이 되돌아간 후, 14년간 시현이 지내는 모습을 저는 틈틈이 봐왔어요.]

운을 뗀 신은 진솔한 고백을 토해냈다. 나를 틈틈이 봐왔다는 건 놀랍지 않았다. 신에게 인간은 유흥거리 같기도 했고, 이 신이 나를 아낀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시현은 또 괜찮은 척하고 있더라고요. 시현, 당신은 그런 스스로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지만요. 그래서 한 번쯤 루블리안을 보고 와도 좋지 않을까 한 거예요. 단념하기는 더 어려울 테지만, 보고 싶잖아요. 이러다 시현이 병날 것 같아서 그래요.]

세계의 균형을 그렇게나 신경 쓰던 신이 이런 권유를 하기는 쉽지 않았다. 때문에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그러나 루블리안을 직접 본다면 그 세계에서 발을 떼는 게 더욱 쉽지 않을 터였다. ‘함께’라는 미래를 그리지 못하는 이상, 단 한 번이라도 보지 않는 게 맞았다.

나는 마음을 굳게 다졌다.

‘괜찮아.’

[네……. 그런데 보고 싶은 건 맞죠?]

‘……보고 싶지.’

[보고 싶지만 참는 거 안 힘들어요?]

계속해서 이어지는 물음의 저의를 모르겠다. 당연히 힘들지. 안 힘들 리가 있나. 질문에 대한 답이 너무나 확연하여 어이가 없었으나, 티 내지 않고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했다. 힘들다는 뜻이었다.

[있죠, 시현. 진짜 죄송한데요, 사실 저 또 루블리안한테 협박당해서요……!]

‘뭐?’

제대로 더 캐물으려던 순간이었다. 섬세하면서도 얕은 마력 파동이 느껴진다. 진동이 울리듯 한 자리에서 둥글게 퍼져나가는 마력에 나는 얼어붙었다. 쿵쿵. 심장박동이 급격하게 빨리 뛰었다.

이내 마력 파동의 중심지에서 살랑이는 금색 머리카락이 드러나고 금색 속눈썹이 파르르 떨림과 동시에 청명한 눈동자가 나를 담아낸다. 쿵쿵. 귀를 점령한 기분 좋게 울리는 심장 소리에 부드러운 음성이 더해진다.

“저도 보고 싶었어요, 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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