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60)화 (60/112)

060. 루블리안과 기억 없는 본래 세계 (3)

“안녕하세요.”

묘하게 불안하고 떨떠름한 심정을 감추며 평소와 같은 목소리를 내었다. 내 옆에 찰싹 달라붙은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시간을 돌리기 전보다 젊어 그때보다 더 루블리안과 닮아 보였다. 눈에 서린 광기 또한 싹 사라진 상태라 더욱 그러했다.

“이름은 말해주지 않는 건가요?”

“……리안이에요.”

백시현과 리안 중 무엇을 이름으로 댈까 고민한 시간은 짧았다. 이제는 혼자만의 기억이지만, 용사일 때는 리안이라는 이름이 더욱 익숙했다. 게다가 이 이름은 루블리안이 남겨준 흔적이나 다름없었다.

내 말에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리안이요? 다른 세계에서 왔는데 발음이 비슷하네요.”

“여긴 모든 제국과 왕국이 다 통일된 언어를 쓰나요? 저희 세계는 다양한 언어가 있어서요. 그러니 당연히 비슷할 수도 있는 거 아닐까요.”

내 본래 이름이라도 아는 건지, 아닌 척 떠보는 질문이었다. 나는 발뺌하며 평이하게 답을 내놓았다. 저 푸른 눈이 맑은 상태인 걸 보면, 확실히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모두 바뀌었다. 신이 그렇게 말하기도 했으니, 맞을 터였다.

그런데 어째서 이리 의뭉스럽게 구는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안 그래도 죽을 운명인 걸 해결해야 하는데 토벌을 거부하리라 여긴 그가 옆에 달라붙어 있는 탓에 신경이 이쪽에 쏠렸다.

혹시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보여준 기억 속, 유독 선명했던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진에 다른 것을 추가한 건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모두가 기억을 잃는데, 자신은 예외라든가. 그런 것들. 그때야 급한 상황이었기에, 하나씩 따져볼 겨를도 없이 시전했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날 때 마법진을 떠올리며 수식과 고대어를 풀어헤쳐 봐야 할 성싶었다.

“그럴 수 있네요. 저는 루블리안 벨리텐트에요.”

“아, 네.”

“이름은 안 불러주나요?”

묘하게 대화의 흐름이 전에 엿봤던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기억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새에 대화의 주도권을 잡은 그를 제지해야 했다.

“네.”

“……네?”

“지금 굳이 부를 필요가 있을까요. 어차피 마왕을 죽이기 전까지, 질리도록 부를 텐데.”

실제로는 내 대답을 흥미로워하고 있으면서 당황한 척을 한다. 행동을 보면, 시간을 돌리기 전과 다르다는 게 와닿았다. 만일 시간을 돌리기 전이었다면,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내 턱을 억센 손길로 잡아챈 뒤 대답을 갈취했을 터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행동과 저 흥미로움은 어디에서 온 건지. 도통 의문이 해결되지 않았다. 그냥 넘어가기엔, 나중에 더 큰 문제로 돌아올 것만 같았다.

해답을 찾기 위해 나는 머리를 굴렸다. 설마 그때 잠깐 나를 봤던 걸 기억하나? 빠르게 잠이 들게 하고, 혹시 몰라서 마탑주와 나와 같은 흑발의 마법사를 넘겼는데. 나라고는 생각 못 하게 하려고 나름 수를 썼던 건데, 만일 제대로 내 얼굴을 기억하는 거라면 골치 아프게 되었다.

또 회귀의 길을 걷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있잖아요.”

“없어요.”

하던 생각을 멈추고 내게 말을 걸려는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단칼에 끊어냈다.

“네?”

“없으니까 말 걸지 말아주세요.”

되묻는 그에게 나는 확실하게 내 뜻을 전했다. 그와 대화하다 보면 의문이 더욱 가득해질 테고, 내가 살 방도를 찾는 게 지체된다. 물론 운명이라 내가 해결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후회하지 않도록 뭐든 시도해볼 생각이었다.

“싫으면요?”

 “…….”

“아예 무시하려는 거구나.”

느른한 음성은 변하질 않았다. 그는 웃는 낯으로 아예 등을 돌려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시선이 따가웠으나, 용사만 수십 번을 했다. 물론 기억엔 단 하나밖에 없지만 말이다. 여하간 나는 따끔거리는 시선을 익숙하게 무시했다.

“저는 아까 말했듯 루블리안 벨리텐트에요. 벨리텐트의 가 첫째고, 루드비히 벨리텐트라는 동생이 있어요. 어머니 아버지는 금실이 무척 좋으셔서,”

“관심 없으니까 조용히 해주세요.” 

“대답했네요.”

대답을 듣기 위해 가족사를 나열했다는 투였다. 질린다, 진짜. 한숨을 한 번 내쉰 나는 마치 본인이 하얀 벽과 앉아있는 소파라도 되는 양 조용히 구경하는 나머지 동료들을 응시했다.

대체 뭐 하는 건가, 싶은 내 눈빛을 본 그들은 민망해졌는지 웃으며 바로 앉았다. 이어 데드리언부터 시작해서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저는 데드리언 러셀입니다. 조금 능력이 좋은 것뿐인데, 용사의 동료로 뽑혔네요. 잘 부탁드려요~.”

첫 대면이라 그런지, 온통 내숭이었다. 다른 세계의 데드리언이 저질렀던 만행을 떠올리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리 링컨이에요! 소박하게 정령이랑 계약해서 대화하는 정도인데, 뽑혔네요!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정령과 계약했단 사실부터가 평범치 않다는 걸 이쪽 알리도 알지 못했다. 세상 물정을 여기나, 저기나. 어느 세계의 알리든 그녀는 모를 듯했다.

그리고 몬트리오가 헛기침하며 시선을 모은 뒤 입을 열었다.

“3황자 몬트리오 알레스칸이다. 몬트리오라고 부르도록.”

평행 세계 루블리안과 루블리안의 행동이 달라서인지. 저들 모두의 소개가 내가 어느 정도 기억하던 것과 달랐다. 내 고유의 세계로 돌아온 뒤로, 내 옆에서 기행을 펼치는 의심스러운 놈만 제외한다면 처음으로 다른 부분이었다. 모든 대화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대체로 뉘앙스가 비슷했다는 말이었다.

“저는 말을 편하게 하고 싶은데, 불편할까요?”

소개가 다 끝난 뒤, 정적이 내려앉았던 공간에 낭랑한 음성이 허공을 울렸다. 데드리언이었다.

전에도 이러더니, 여기서도 또 이런다. 기억이 있기 때문일까. 시간을 되돌리기 전과 비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현재와 모두의 기억 속에서 지워진 시간을 자꾸만 비교하게 되었다. 하도 해서 이미 버릇으로 굳어져 버리기까지 했다.

“저도 말 편하게 하고 싶어요.”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반대편에 있는 손을 들며 두어 번 살랑이자, 누구보다 빠르게 내 옆에 있는 수상쩍은 놈이 대답한다.

“좋아. 말 편하게 하자. 이렇게 된 거 편하게 할 사람은 하고, 안 할 사람은 안 하면 되지.”

알리와 몬트리오가 허락하기도 전에 말을 놓는다. 세계는 변해도 불타는 인성은 변하지 않는다. 루블리안 불타는 인성 보존 법칙. 이런 거라도 있는 거 아닐까 싶었다.

“저는 조금 어색해서…… 나중에 놓을게요.”

“나는 원래부터 내 말투가 이러니, 계속 이러도록 하지. 어색하다면 바꿀 수야 있지만, 좀 오래 걸리네.”

알리와 몬트리오의 대답에, 나와 데드리언은 순순히 수긍했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아무런 긍정도 부정도 내놓지 않은 채로 날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시선이 꽂혀선 떨어지지 않는 게 느껴지기에 알 수 있었다.

시간을 다시 감아버렸는데, 미래를 바꿔버렸는데. 얘는 대체 왜 이렇게 구는 건지. 다른 사람이면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테다. 그러나 마신에게 육체를 빼앗겨 종말에 가까운 광경을 보여준 이였고, 내 세계로 아니, 평행 세계 백시현의 세계로 돌아간 뒤부터 쉴 새 없이 생각하게 만든 인물이었다. 전적이 화려했다.

종내에 나는 자주 부르지 말라고 하던 신을 불러 확답을 얻어내기로 했다. 시간을 돌린 후로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그냥 내버려 뒀다간 큰코다치리란 예감이 떠나가지를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

[네, 시현!]

익숙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크게 울리는 탓에 깜짝 놀라 어깨가 움칠 튀어 올랐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된다. 신에게 물을 게 있는 나는 이 관심이 달갑지 않았다. 갑자기 오한이 들었다고 변명하며 무마하려는데, 데드리언이 걱정스러운 낯을 했다.

“여름 감기는 아니겠지? 치유라도 해줄까?”

“감기 아니야. 그리고 나도 신성력이 있으니까 괜찮아.”

말이 딱딱하게 나갔으나, 개의치 않고 다시 신을 불렀다.

‘신. 당신 왜 나한테 말하는 게 가능해?’

머릿속으로 대화를 나누는 건, 대화를 나눌 신이 직접 내린 축복 및 가호를 받아야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을 되돌린 탓에 저 신에게 받았던 축복과 가호는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고, 이번에는 내 고유 세계를 담당하는 신에게 받았기에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게 정상이었다.

[시현이 세계를 구하려고, 마신을 어떻게든 해보려고 고생했잖아요. 그래서 시현이 한 일을 세세하게 적고 요구 사항을 위로 올려보냈더니. 놀랍게도 그 까다로운 상층부에서 허락을 내려줬어요! 물론 제 세계가 아닌 곳이라 이 세계 담당 신에게는 허락을 맡아야 했지만요.]

마지막 문장만 빼면 무척이나 신이 난 목소리였다. 지금 대화가 어떻게 통하냐는 물음에서 저 대답이 나왔으니, 허락받은 게 나와의 소통인 듯했다. 그런데 내가 한 행적들로 왜 자기한테 좋은 걸 얻어내는 건지. 기가 막혔다.

‘그것뿐이야?’

[아니요? 당연히 더 있죠! 축하해요, 시현! 시현은 죽을 운명에서 벗어났어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희소식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쳐올렸다. 실체는 없고 그저 목소리만 머릿속에 울린다는 걸 알면서도, 무심결에 그럴 정도로 놀랐다. 덕분에 또다시 내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별거 아니라며 손을 휘저어 시선을 분산시켰다. 한 명의 시선만 내게 꽂힌 채였다.

‘그럼 나 안 죽어?’

[네. 살아서 돌아갈 거예요.]

확답에 안도감이 확 밀려들었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기억 때문에 한 번, 시간을 되돌리느라 한 번. 총 두 번 느꼈던 죽는 감각은 결코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봐줄 때까지는 시선을 돌리지 않겠단 의지를 내보내는 의뭉스러운 놈이 비정상인 거였다.

‘그런데 미래는 확실히 바뀐 게 맞지?’

뒤늦게 원래 하려던 물음을 내던졌다. 고민할 것도 없는지 신은 바로 답했다.

[네, 그럼요. 마신의 행방이 묘연해진 게 문제긴 한데, 그 외의 인물은 다 파악도 됐고, 미래가 완전히 바뀌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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