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 루블리안과 기억 없는 본래 세계 (2)
나는 점차 내 본래 세계와 어릴 적으로 돌아간 것에 익숙해졌다. 평행 세계랑 가족 관계도 그렇고, 뭐 하나 다를 게 없었다. 종종 할머니가 연락하면, 쌍둥이인 백정혁이 천재라며 좋아하다 전화를 뚝 끊는 것 또한.
물론 똑같아서 편했다. 갑자기 관심을 가졌더라도 어색하기만 했을 터였다. 애초에 기대는 버린 지 오래였다. 그 기대를 버리게 만든 장본인을 더는 보지 못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다섯 살로 되돌아왔던 나는 여섯 살이 되었고, 몇 달 후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이후 벌어진 일은 평행 세계에서와 똑같았다. 나는 다신 가고 싶지 않던 집구석에 들어갔다.
“엄마, 저 거지는 뭐야? 왜 엄마를 엄마라고 불러?”
그리고 나를 보며 백정혁이 한 말 역시 똑같았다. 평행 세계에서도 어릴 적 백정혁은 내심 불안한 얼굴로 의문을 내비쳤다. 그 순수한 물음에 그때는 상처를 받았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관심, 줘도 안 가진다.
“네 쌍둥이 형이라 그래.”
“쌍둥이?”
“응. 이름이 뭐였더라……. 백시현이었나. 맞니?”
어떻게 이렇게나 똑같은지 신기할 지경이다. 여기가 내 고유의 세계는 맞나 의심이 들 정도로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 그때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게 충격적이었던 나머지 저 말만큼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던 때와 다르게 나는 순진한 낯을 뒤집어쓰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네. 그런데 아줌마는 몇 살이에요?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안 좋댔는데, 진짠가 봐요.”
“……뭐, 뭐?”
심히 충격받은 낯에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물었다.
“왜요? 여기도, 여기도 주름이 있는데 나이 든 거 아니에요? 나랑 얘는 없잖아요. 그렇지 않아?”
“어? 으응.”
일부러 악기 쪽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가져 부모가 아끼는 백정혁을 끼워 넣었다. 화를 내더라도 나한테만 내지 않을 테다. 이른바 물귀신 작전이었다.
생물학적 엄마는 아찔한 표정을 지으며 휘청였고, 그런 엄마를 챙긴 아빠는 나를 욕실로 보냈다. 혼자 씻으라는 말과 함께. 그편이 씻겨준다고 나서는 것보다 훨씬 편했기에, 나는 알아서 씻었다. 그 후로는 준비된 방을 안내받고, 내게 무슨 천재적인 재능이 없느냐는 추궁을 받았다. 이럴 줄 알고 있긴 했는데, 기분이 더러웠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시간을 또다시 흘러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완연한 봄이 왔을 때였다.
배정된 교실에 들어가자, 동글동글한 익숙한 뒤통수가 보였다. 여기서도 같은 반이구나. 책가방을 멘 나는 긴장한 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학창시절을 보냈던 그곳은 내 세계가 아니었기에, 평행 세계의 백시현의 세계였기에 똑같은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래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 본래 세계의 박시찬이었으며, 이 세계의 이들에게 적응해야 했으니.
본래 고유의 세계로 돌아왔다고 해서, 박시찬, 이리형, 김민식이 아닌 다른 이들과 어울리는 건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나는 옆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뒤통수가 옆 통수로 바뀌다, 이내 앳된 얼굴이 보인다.
“어? 백시현? 나 너 기억하는데, 너는 나 기억해?”
“응. 박시찬이잖아.”
“헐. 기억하네! 우리 집 이사 가기 전까지 옆집이라 몇 번 오가면서 봐서 기억하는 건데. 너도 그래?”
그랬다. 네 살 끝자락까지는 할머니 댁 바로 옆집에 박시찬네 가족이 살았다. 나는 활기차게 이야기하는 박시찬에게 반가운 심정이 들었으나, 곧 피곤해졌다. 어린애의 체력은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조잘조잘 떠들던 박시찬이 손을 내밀며 이가 보이도록 활짝 웃었다. 기억보다 작은 손을 맞잡자, 위아래로 휙휙 거세게 흔든다. 역시 이 텐션과 체력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계속해서 친구를 할 생각이라, 내가 익숙해져야 하는 거라도 말이다.
그렇게 박시찬과 초등학교를 정복하듯 여기저길 돌아다니길 6년. 중학교 또한 같은 곳을 가 초등학교 때처럼 여기저길 탐방하길 3년. 시간은 거센 파도처럼 흘러 떠밀리듯 고등학교를 들어갈 때가 되었다.
이리형과 김민식은 고1 때 친해진 이들이었다. 정확히는 박시찬의 친화력 덕이었다. 여전히 평행 세계 백시현의 세계인 줄 모르고 살던 때와 모든 게 똑같이 흘러갔기에, 이번에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들어맞았다. 같은 반이 되었다며, 박시찬은 이리형과 김민식을 소개했다.
“이 끔찍한 새끼는 이리형, 이 나쁜 새끼는 김민식.”
“엥. 박시찬 잘못 설명했죠. 리형이는 끔찍한 게 아니라 깜찍한 거야.”
“시발, 애교 빼! 버려! 남자 새끼한테 애교를 왜 부려, 미친 새끼야!”
김민식이 이리형의 등짝을 세게 때렸다. 짝 소리가 복도에 크게 울려 퍼졌다. 힝 소리를 내며 이리형이 내게 달라붙었다.
“김민식하고는 친구 안 하는 게 좋아. 날 봐. 등짝이 안 남아나…….”
성질이 포악하다며 대놓고 앞담까지 깐다. 루블리안이 생각나는 탓에 어깨에 두른 이리형의 팔을 풀어내고 그대로 박시찬에게 전달했다. 또다시 얻어맞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그렇게 평화로운 한때가 끝나고, 대망의 고 3이 된 해. 그날이 찾아왔다. 용사로 발탁되어 루블리안의 세계로 간 날.
본래의 내 세계로 돌아왔으니, 같은 신이 아닐 테다. 루블리안을 만날 수도 없을 테고. 나는 이불을 턱 끝까지 올린 채로 눈을 감았다. 곧 꿈을 통해 나를 찾아오리라.
“하아. 안녕, 용사. 내가 널 몇 번째 보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요?”
역시나 신은 달랐다. 그는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시간을 수십 번 돌린 탓에 나를 여러 번 만난 듯했다. 내게는 기억이 없지만 말이다.
“전에는 그나마 똑같은 말 반복하고 축복과 가호만 걸고 헤어져서 괜찮았는데, 요즘에는 네가 시간을 되돌리기 전에 알던 신이 널 잘 대해주라며 얼마나 신신당부하는지. 고막에서 피가 날 정도야.” 지친 기색이 역력한 낯이었다. 신이 얼마나 말이 많고 시끄러운지 알았기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챙겨주는 건 고맙지만, 오히려 반감을 산 거 아닌가. 마치 박시찬이 말했던 지능형 안티와 같은 행태였다.
“어쨌든, 줄게. 축복과 가호. 이번에는 네게 행운이 함께하길 바라. 제발 다시는 시간 돌리지 말자. 똑같은 말 반복하고 축복하고 가호 주는데, 게임 엔피씨라도 된 기분이니까.”
진저리친 신이 허공에서 실을 잡듯이 손을 움직였다. 이내 내 손등을 잡았다. 밝은 빛이 시야를 가리고, 전에 한 번 느꼈던 기운이 몸에 퍼져나간다. 축복과 가호였다.
“그런데 저 아직 대답 안 했는데요?”
“아. 원래 늘 수락해서 잊고 있었네. 안 할 거야?”
“하긴 하는데…… 보수를 주셨으면 해요. 평생 먹고살 수 있을 정도로요.”
내 앞에 있는 신은 아니었지만, 전에도 똑같은 부탁을 했었다. 신이라는 건 동일하니까, 들어줄 수 있지 않나 싶었다. 이내 신의 고개가 위아래로 두어 번 움직이고, 벌어진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래, 그 정도야 해줄 수 있지. 그럼 너 보낸다. 그리고 나는 잘 대답 안 하니까, 적당히 불러.”
눈을 뜨니, 신탁을 받는 장소 안의 둥그런 원형에 내가 누워 있었다. 몸을 일으키자, 처음으로 용사가 되어 눈을 떴을 때 봤던 세 명의 신관과 똑같은 이들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먼저 인사를 건네자, 벼락을 맞은 듯 정신을 차린 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현재 있는 대신관 중 가장 오래 직위를 단 이가 허리를 90도로 접었다.
“안녕하십니까, 용사님. 저희는 세상을 구할 용사님께서 오실 테니, 잘 대하란 명을 받았습니다. 또한, 용사님께서 다른 동료들을 알고 있단 말도 전해 들었습니다만……. 자세하게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변함없이 정중한 목소리였다.
이미 시간을 돌린 내가 용사의 동료가 누군지 알고 있어, 다른 설명을 하지 않은 듯했다. 나는 알리 포함 총 네 명의 이름을 나열했다. 그러자 한 신관이 얼른 동료로 뽑힌 이들에게 이 사실을 전하겠다며 나가고, 남은 두 신관이 나를 안내했다.
안내된 손님방은 이제는 당연하다 여길 정도로 익숙했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제외하면, 다들 하루 안으로는 올 테다. 평행 세계에서 보았던 이들이 원래 내 동료였다니. 새삼스럽게 놀랍단 감상이 들었다. 기억이 남아있는 터라, 이제는 내 동료라 부를 수 없는 이들이 보고 싶은 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변수가 등장했다. 예측한 대로 몬트리오, 알리, 데드리언은 다음 날, 신전에 와 내게 얼굴을 비췄지만,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예상이 빗나갔다. 며칠은 더 걸리리라 생각했는데, 그는 하루 만에 신전에 왔다.
“안녕하세요, 용사님.”
이어 내게 관심이 없으리라 여긴 짐작까지 틀렸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오히려 내게 관심이 지대해 보였다. 저 적응되지 않는 광기 없는 맑은 눈동자에 들어찬 흥미가 주장을 뒷받침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