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8. 루블리안과 기억 없는 본래 세계 (1)
한 번 마음을 먹자, 실행에 옮기는 것에 망설임이 사라졌다. 감정은 유동적이다. 그러니 시간을 돌리고 몇십 년이 흐른다면 루블리안에게만 가지는 이 유일한 감정이 모습을 감출지도 모른다. 그럴 확률은 극히 낮았지만, 나는 마신의 공격을 막으며 신을 찾았다.
‘신.’
[네?]
‘시간을 되돌리면, 신계랑 마계는 어떻게 돼?’
[신계랑 마계는 돌아가지 않아요. 시간은 원래 신의 권한인걸요. 인간의 시간 마법에 휩쓸릴 리가 없죠. 그런데 시간 마법은 왜요?]
의아한 목소리였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신의 공격을 막으며, 루블리안과의 거리를 좁혔다. 따라붙는 공격에 쉽지는 않았지만, 성공했다. 나는 빠르게 말을 전했다.
“루블리안.”
아마 두 번째로 다정히 부르는 이름일 테다. 마법으로 공격을 막은 후 나를 보는 루블리안의 눈에 미미한 불안감이 감돌았다. 그 불안감을 제공한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이번에도 그의 곁에서 떠나가려는 것이었으니.
“……왜 불러요?” 잊을 기억이니까, 나만 알 기억이니까 딱 한 번은 말해도 되지 않을까. 그러한 생각이 드니, 늘 저 밑바닥까지 묻어두었던 속내가 슬그머니 위로 올라왔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은 혀 위를 떠돌아다녔다.
이 상황과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았으며, 속내를 듣는 상대는 결국 이 기억을 잊을 테니 비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순간들이 아니면 말하지 않을 터였다. 나는 나를 너무나 잘 알았다.
공격을 막고 최대한 마신과 거리가 벌어지게끔 공격 마법을 연사했다. 퍼버벙! 방어 마법과 맞부딪혀 큰 소리가 울리고, 연기가 자욱해진다. 잠깐의 틈을 타 나는 루블리안의 손을 잡고는 들어 올렸다. 이어 살며시 손등에 입을 맞춘 채, 이보다 놀랄 수 없는 얼굴의 그에게 속삭였다.
“좋아해.”
그리고 내가 미안해. 뒷말을 잇지 않은 나는 입술을 떼어 냈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스킨십이었다.
이어 잠깐 틈을 줬던 건 유흥이라는 듯 공격이 퍼부어진다. 정신이 쏙 빠진 루블리안을 잡아챈 나는 그를 데리고 아래로 내려갔다.
“……시현?”
당황한 음성이 귀에 꽂혔으나,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죽어가는 모습을 보이기는 미안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루블리안, 정말 미안한데 나한테 방어 마법 좀 걸어줄래?”
“……위험한 짓을 하는 건 아니죠?”
“아니야.”
거짓을 입에 담는 건 쉬웠다. 애당초 모두를 살리려는 거였다. 위험하지만, 위험하지 않은 거 아닐까. 영영 헤어진단 생각을 해서 그런가. 머릿속이 이상하게 엉켰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기억 속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진을 상기한 뒤 펼치자, 생각보다도 커다란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낸다. 황금빛으로 타오르는 마법진을 마신은 알아본 모양인지 경악하며 소리를 내지른다.
“안 돼!”
이어 빠르게 마법을 저지하려는 듯 공격이 날아오지만, 이미 시전한 뒤였다. 몸에 있는 구멍이란 구멍에서 피가 나온다. 시야가 어지럽게 돌아가고, 아픔의 정도가 상당했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기억으로 인해 느낀 죽어가는 감각과 흡사했다. 직접 겪는 거라 더 심한 것도 같았다.
상처받은 낯의 루블리안을 마지막으로 시야가 어둠에 잠겼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제 막 스칼레인의 앞에 도착했을 시점으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갓난아기인 평행 세계 루블리안에게 바로 슬립 마법을 걸었다. 스르륵 청명한 눈동자가 눈꺼풀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엿본 그의 기억 속을 참고하면, 그는 내가 분노하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 정도면 될 테다.
안심하는 찰나, 납치범 새끼가 의심스럽다는 눈빛을 내게 보냈다. 이어 그가 입을 열었다.
“넌 뭐지?”
“마탑의 마법사입니다. 39층의 찰스 마법사님을 도와 키메라 연구를 하고 있다가, 딱 한 번 식당에 갔는데 오늘 심상치 않은 마력 파동의 주인을 데리고 온다고 해서 너무 궁금한 나머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몰래 따라왔습니다. 죄송합니다…….”
기억을 떠올리며 구구절절 설명했다. 어차피 기억을 건드릴 생각이긴 하지만, 마탑에 들어가 확인할 게 있으니, 이러는 편이 좋았다.
“허, ‘그’ 찰스가 널 제자로 삼았다고?”
“네, 그렇습니다. 항상 방에만 계시니 의심스러우실 수 있다는 거, 다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키메라 연구를 시작하실 때쯤 딱 한 번 마탑 밖을 나가신 적이 있으신데, 그때 절 데리고 와 노예처럼 부려 먹으셨습니다.”
마탑주라 해도 마탑 소속 마법사의 모든 일정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마탑주도 마법사인데, 실험은 진행해야 할 것 아닌가. 적당히 성격, 어떤 마법을 연구 중인지. 그쯤만 안다고 루블리안이 그랬었다.
수상하단 눈길이 누그러졌다. 납치범 새끼는 잠든 갓난아기인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안고, 나까지 포함하여 순간 이동을 했다. 몰래 추적 마법을 걸었는데, 쓸모가 없어졌다. 이동된 곳은 마탑 내의 식당이었다. 우선 이곳에서 성공을 알리고, 나중에 숲으로 가려는 듯했다.
나는 방심한 납치범 새끼를 대번에 기절시켰다. 툭. 쓰러지는 마탑주에 미친 듯한 환호성이 다 같이 짠 듯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침묵이 내려앉고, 마법사가 상황 파악을 마치기 전, 나는 대규모로 슬립 마법을 걸었다. 모두가 잠들었다.
이어 갓난아기인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챙기고, 신성력과 마력을 이용하여 기억을 수정했다. 식당에 있는 마법사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아, 빠르게 끝낼 수 있었다.
식당 내 모든 마법사가 내 존재를 잊는 것을 기반으로 마탑주와 나와 같은 흑발을 가진 마법사는 납치를 시도했지만, 신원 미상의 인물 때문에 실패한 것으로. 나머지는 실패한 납치에 슬퍼하여 술을 퍼마시다 잠이 든 것으로. 딱 그 정도만 바꾸었다.
환각 마법으로 모습을 바꾼 나는 공작가 근처 치안대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그 앞에 잠에 빠진 세 명을 내려놓고, 쪽지를 하나 썼다. ‘남자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데요?’ 하는. 발견하면 마탑주와 마탑 내 마법사가 남색가로 오해받는 동시에 납치범이란 게 알려질 테다.
투명 마법을 쓰고는 지붕에 앉은 채로 공작가의 이들이 이곳에 오기를 기다렸다. 다른 이가 먼저 발견하면 골치 아파진다.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무렵,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치안대에 온 이들이 아이와 납치범들을 발견했다.
그것을 확인한 나는 이곳에 더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어느 한 부분의 미래만 건드리면 모든 게 바뀔 테니 말이다. 이제 내 세계로 돌아가면 내가 알던 미래와 많은 부분이 달라져 있을 터였다.
[시현!]
‘신?’
[시간을 돌려 미래를 바꿨군요!]
신이 다급하게 이리 말하는 걸 보니, 미래가 달라지긴 했나 보다. 다행이었다. 안도한 나는 내 세계로 가는 법이나 알려달라고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급히 할 말이 있는 듯 신이 선수를 쳤다.
[여기 있으면 안 돼요. 지금 미래를 건드려서 모든 게 뒤바뀌었어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요. 여기 있다간 시간의 흐름에 떠밀려 방황하고 말 테니 제가 시현을 시현 고유의 세계로 보내드릴게요.]
‘패널티는?’
[아! 그걸 말 안 했나요? 다행히도 시현이 시간을 돌린 덕에 마신이 육체를 얻기 전으로 돌아갔고, 신계도 다 정리가 되어서 상층부에 허락을 받았어요. 이제 전 무능력하지 않아요!]
다소 흥분한 음성이었다. 이내 내 앞에 포탈이 생겼다. 루블리안과 헤어지던, 좋지 못한 기억에 영 꺼림칙했으나, 얼른 이동해야만 했다. 세계의 기운이 변하는 게 느껴졌다. 포탈 내로 발을 내딛자, 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중에 또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 말을 끝으로 내 눈에 비치는 풍경이 변했다. 어쩐지 촌스러운 벽지가 눈에 들어온다. 온돌 매트 위에 각지게 정리된 이불, 그 앞의 서랍과 장롱. 색이 바랜 기억이 떠오른다. 여긴 내가 여섯 살이 막 됐을 무렵 돌아가신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집이다.
평행 세계에서 할머니와 지냈던 집과 너무나 똑같아 잠시 혼란이 왔지만, 신이 내 고유의 세계로 보내준다고 했으니, 여긴 내가 원래 있어야 했던 세계가 맞는 듯했다. 평행 세계 백시현의 세계가 아니라.
방 안을 멍하니 보던 나는 정신을 차렸다. 이내 둥근 형태의 문손잡이를 잡아 돌리고 거실로 나가자, 할머니의 뒷모습이 보였다.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머리가 뒤집히는 감각을 제외하면 몇 년간 운 적이 없었는데,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거의 유일한 내 유년기의 제대로 된 어른이었다. 비록 세계가 다르긴 하지만, 느낌이 똑같았다.
내 생물학적 부모는 서로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었다.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번의 실수로 쌍둥이를 가지게 되었고, 이후 두 명을 다 맡기기는 그렇다며 쌍둥이 중 한 명만 할머니에게 맡겼다. 그리고 그게 바로 나였다.
“……할머니.”
아주 작게 할머니를 부르자, 할머니는 바로 들으시고는 돌아보신다. 눈가의 주름이 더욱 짙어진다. 환히 웃으며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우리 똥강아지. 벌써 일어났네.”
“응…….”
저 똥강아지 소리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내 본래 세계의 할머니에게 다가간 나는 양팔을 크게 벌렸다. 부끄러움보다는 크고 나니 유독 그립던 품 안에 안기고 싶단 마음이 강했다. 웬일로 애교를 다 부리냐며 무릎 관절도 좋지 않은 할머니는 나를 꼭 안았다.
연세가 있으신 분 특유의 향이 난다. 어린 시절, 그 냄새를 맡고 자랐기에 마치 심적 고향에 온 기분이었다. 포근하고 안심이 되어서 그런지,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여긴 할머니는 봐서 그런지. 눈물이 흘렀다.
“아이고. 우리 똥강아지, 악몽이라도 꿨어? 아침부터 왜 울고 그러지.”
사투리를 써야 할 것만 같은 우리 똥강아지에 맡지 않게 할머니는 표준어를 구사했다. 부모가 아니기에 어떻게 친근함을 높여야 하나 고민하다 쓴 호칭이었다는 걸 후일 이곳에 다시 왔을 때 할머니의 친구분에게 들었다.
더는 소중한 이들을 만나지 못하게 되었는데, 다른 소중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시간을 되돌린 게, 슬프면서도 기뻤다. 한 번 둑이 터진 눈물은 쉽사리 멈추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