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55)화 (55/112)

055. 루블리안과 파괴된 세계 (8)

평행 세계 백시현과 백시현을 맞바꾸고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온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용사가 나타나는 열여덟 살까지 착실히 살았다. 가족, 유모, 사용인들과 적당히 친분을 유지하며, 전처럼 가문을 나서지 않았다. 기왕이면 공작이 되어 시현을 옆에 두는 게 편하기 때문이었다. 평행 세계 백시현의 세계에는 이상하게도 작위가 없었지만, 자신의 세계는 작위가 높아야, 하고 싶은 것들을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열여덟 살이 되던 해, 용사가 나타났다.

시현과는 다른 무기질적인 눈이었다. 같은 연갈색 눈이 이렇게나 다를까 싶을 정도로. 걸어 놓은 주술은 여전했지만, 몸에 깃든 마신은 더 단단히 걸라고 말했다. 그래야 나중에 풀었을 때 마왕으로 변모시키기 쉽다며.

똑같이 토벌을 떠나도 즐거운 일은 하나도 없었다. 종종 마기가 짙은 곳에서 마신의 힘과 마력으로 운명이 뒤바뀐 시현을 보았다. 그 옆에 붙는 다른 세계의 저가 거슬렸다. 수십 번을 회귀해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던 시현의 눈에 애정이 들어차는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저 거슬리는 인간을 다른 세계로 떨궈. 떨궈서 마왕으로 만들어 버리면 되는데 뭘 그렇게 고민하지?]

‘입 다물어.’

마왕이 속살거렸으나, 루블리안은 충동을 참아냈다. 몇 번이나 시간을 되돌리면서 미쳐버린 탓에 시현을 납치하고 감금한 적이 있었다. 시간을 돌리자마자 토벌 중에 행한 일이었다. 물론 그 끝도 죽음이었다. 그는 점차 생기를 잃어가다 스스로 자결했다.

기억에 손을 댄 적도 있었으나, 그때는 지금과 같이 마신이 힘이 강해지지 않도록 조처를 하지 않아 신성력과 마력이 넘쳐흐르는 상태였다. 한 달도 안 돼서 시현은 마력으로 묶어둔 기억을 되찾고, 감금 마법을 풀었다. 이후 도망치고 나서는 마왕을 혼자 대면하여 죽었다.

그 외에 지금보다 훨씬 미쳤을 때는 백시현이 친해진 이들을 다 죽인 적도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차츰 핼쑥해지는 얼굴과 텅 빈 눈에 가슴께가 따끔거렸다. 저런 눈을 보고 싶은 게 아니었다. 루블리안은 살았으나 죽은 게 다름없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처음으로 백시현이 죽지 않았는데도 시간을 돌렸다.

그러한 전적이 있기에, 루블리안은 평행 세계의 자신을 죽이고픈 욕망을 참았다. 지금이라도 저쪽으로 넘어가 훼방을 놓고 싶었으나,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마신과의 계약을 이행해야 했다.

루블리안은 좀 더 빠른 속도로 토벌을 진행했다. 토벌 중 평행세계 백시현에게 욕망을 억제하는 주술을 거는 걸 몬트리오가 흘깃 봤으나, 창백하게 질린 채로 넘어가는 사건도 있었다. 자신을 동료라 생각하여, 부정하는 것 같긴 한데 그날을 기점으로 용사에게 좀 더 신경 쓰고 있었다. 무의식으로는 알고 있으나, 애써 부정한 모양새가 웃기기만 했다.

‘언제부터 우리가 친했다고.’

그렇게 토벌은 용사가 죽으면서 끝이 났다. 길고 긴 회귀 끝에 백시현의 운명은 다른 이가 가져갔다.

모든 작업이 끝나고 비로소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용사‘였’던 백시현을 마주할 수 있었다.

_oOo_

“헉. 허억…….”

거칠게 숨을 토해내며 눈을 떴다. 기억일 뿐인데도 마치 직접 겪은 것처럼 감정이 범람해왔다. 한꺼번에 여러 감정이 섞여 갈무리가 어려웠다. 호흡이 진정되지를 않았다.

주위를 살필 여력도 없이 눈을 질끈 감고, 숨만 가쁘게 쉬었다. 그 때문에 누군가 내 곁에서 내 등을 일정하게 두드리고 있다는 것도 뒤늦게야 알았다. 만일 지금 누가 날 죽이려고 했다면, 대응도 못 하고 죽었을 만큼 정신이 없었다.

서서히 호흡이 안정적으로 돌아왔다. 눈물이 맺힌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자, 살랑이는 금발이 보였다. 가늘게 휘어진 눈매 아래로 익히 아는 색이 보였다.

“이제 진정됐어요? 괜찮아요?”

대답해야 하는 데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분명 진정이 됐다 여겼는데, 손이 덜덜 떨렸다. 심장 박동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완전히 진정된 게 아니었나 보다.

내가 루블리안의 허벅지에 머리를 뉘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러나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외려 나는 고개를 움직여 얼굴을 푹 박았다. 그의 옷에 배인 체향에 떨리던 손이 점차 진정되었다. 심장이 원래의 박동을 찾았을 무렵, 그의 허벅지에서 얼굴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일어날 수 있겠어요?”

“어. 괜찮아.”

부스스한 머리를 매만지며, 대답했다. 이어 갑작스러운 감정들과 들이닥치는 기억들에 미처 보지 못했던 주위를 살폈다.

부서진 건물 안이라도 된 듯이 내가 누웠던 곳 근처를 제외하면 부서진 콘크리트에 깨진 유리에 뭐가 많았다. 마치 자연재해가 휩쓸고 간 것만 같았다.

“……시현, 이건 그러니까,”

“루블리안이 이런 거지.”

“네?”

“너 말고. 평행 세계 쪽.”

당황해하는 루블리안을 보며 말을 정정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알았냐는 물음이 필연적으로 따라올 줄 알았는데, 그는 내 머릿속이 복잡하다는 걸 안 듯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 배려를 고맙게 받고는 생각했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기억 속 마신은 호시탐탐 그의 육체를 노렸다. 그러나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마신이 죽은 육체에도 깃들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나와 루블리안의 공격으로 생명이 꺼져갈 무렵에 자신이 약해진 틈을 타 마신이 육체를 차지하려 해 일부러 내 검에 찔린 거였다. 자신의 숨이 완전히 꺼지면 괜찮을까 봐, 두려움과 망설임 하나 없이.

잠시간 시간을 되돌리며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느꼈던 죽는 감각이 몸을 스쳤다. 나는 그 감각을 잊기 위해 천천히 호흡하며 이어 생각했다. 그가 죽지 않아 여태 기생만 했던 마신은 지금쯤 죽은 육체에 들어찼을 테다. 그가 죽고 싸움이 끝났다면 이 무너진 건물 안에서 여태 이러고 있을 리가 없었다.

[시현, 깨어났네요!]

“시현?”

굴러가던 머릿속을 전조 없이 울리는 신의 목소리에 인상을 구기자, 루블리안이 나를 불렀다. 걱정하는 모습에 신 때문이라고 이유를 말해줬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돼?’

[큰일 났어요! 마신이 육체를 차지해서 지금 난리 났어요! 그것도 평행 세계 쪽 루블리안의 육체를요! 원래도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시간을 계속해서 되돌리는 탓에 요주의 인물이었는데, 마신하고 계약했을 줄이야! 상상치도 못한 상황이라 손 쓸 틈도 없이 지금 여기 건물이며, 뭐며 다 무너졌어요!]

다다다. 총알이 나가는 것처럼 신의 쉬지 않고 말했다. 머리가 아파 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린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죽이지 않은 것? 호기심을 가진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내게 반한 것? 내가 죽을 운명이었던 것? 나도 모르게 근본적인 원인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답이 나올 리는 만무했다. 세계를 넘고 시간을 돌리고 모든 게 꼬인 탓에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라는 질문과 같아졌다.

한숨을 내쉰 나는 우선 엿본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기억을 기반으로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궁리했다. 그의 기억 속 마신을 죽이는 방법은 없었다. 그가 계약을 끊는 방법을 연구하려 할 때마다, 마신이 머릿속에 줄기차게 말을 늘어놓으며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방법 없이 무작정 덤비는 건 죽음의 문턱에 한 걸음 가까워지겠다는 무모한 짓이었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에게 마신이 입버릇처럼 말했듯 그래 봐야 한낱 인간이었다. 저쪽은 전지전능한 신이었고.

“시현. 우선 차분히 생각해요. 네?”

언제 손톱을 치고 있었는지, 루블리안이 내 손을 맞잡아 엄지와 중지의 움직임을 막았다.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다. 한 손으로 내 얼굴을 쓸어올렸다. 유독 조급해졌다.

[맞아요, 시현. 차분히 생각하면 답이 나올 수도 있을 거예요. 물론 시간은 그리 많지 않지만요…….]

신도 말을 거들었다. 그러나 마지막 말에 다시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살던 원래 세계로 돌아오고 나서부터, 아 여기 내 세계가 아니구나. 어릴 때 세계가 바뀌었으니 평행 세계 백시현의 세계였지. 그러니까 평행 세계 백시현의 세계에 돌아온 뒤로부터 시간에 쫓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 지금은 마신이 들어가 있긴 하지만, 평행 세계 루블리안 때문이었다.

“루블리안.”

“네, 시현.”

“그런데 우리 이러고 있어도 괜찮아?”

문득 새로운 의문이 들었다. 마신을 막을 만한 전력은 우리뿐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렇게 가만히 생각만 하고 있다니. 아직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었다. 얼굴이 경직된 걸 느끼며, 나는 또다시 입을 열었다.

“……다 죽었어?”

“아아. 그건 아니에요.”

“그럼?”

“꽤 많은 사상자가 나오긴 했는데, 이건 신한테 이야기 듣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신이 한 짓이거든요.”

신의 단독적인 행동이라는 듯이 루블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엮이기 싫다는 뜻이 분명히 보였다.

[저 잘못 안 했어요! 소설을 조금 참고해서 살아있는 모든 사람에게 잠재된 힘을 끌어내고, 마신을 막는 퀘스트를 준 것뿐이에요!] ‘……뭐? 당신 미쳤어?’

루블리안을 휙 돌아보니, 그는 모른 척하며 살살 웃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힘을 쓰는 법도 모르는 초보자한테 최종 보스부터 잡으라고 한 격이 아닌가. 거의 먹잇감을 맹수 앞에 던져준 꼴이었다. 아무리 급했다고 한들 그런 짓을 저지르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오히려 걸림돌이잖아. 애초에 신이 개입한 문제는 너희가 해결해야 하는 거 아니야?’

[사실 지금 신계도 난리가 났거든요……. 진압이 되어가고 있지만, 마족부터 마물까지 침입해서 천마 대전이 일어났어요. 제가 직접적인 간섭을 하려면 상부가 동의해야 하는데, 그쪽도 난리라서 어떻게 할 방도가 없어요. 이게 말로만 동의하지 않으면 패널티를 준다 한 게 아니라 실질적인 제약을 걸어놔서 그래요.]

마치 이 순간을 노리고 준비해온 것 같은 타이밍이었다. 지금 허락 없이 사람들의 능력을 개화시키고 퀘스트처럼 메시지 창을 보여 준 것만 해도 패널티가 돌아와 위태롭다는 말을 들으며 나는 입을 다물었다.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가고 있다.

그때, 별안간 쾅 소리가 나며 벽면이 무너졌다. 무너진 벽의 잔해에서 신음을 뱉으며 나온 건 내가 아는 이였다.

“어, 뭐야. 백션? 너 여기 있었어?”

신성력으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있는 이리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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