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54)화 (54/112)

054. 루블리안과 파괴된 세계 (7)

“네 몸이 슬슬 버티기 힘들어 보이는군. 얼른 끝내지.”

마신의 말에 루블리안은 제 몸을 살폈다. 아예 감각을 없애는 마법을 쓴 터라, 피부가 썩어가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드러난 살갗이 온통 보랏빛을 띠었다. 손가락을 까딱하려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마신은 손을 움직였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휘적이던 그는 알아듣지 못할 단어를 입에 담았다. 이내 거뭇한 빛이 눈을 가렸다. 동시에 무언가 몸에 스미는 불쾌하고 더러운 감각이 들어찼다. 루블리안은 인상을 찌푸렸다.

“계약을 할 거면, 내가 알아듣는 단어로 해.”

“방금 건 축복과 가호를 내린 것뿐이다. 그런 경멸스러운 짓은 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마신이 손을 튕기자, 허공에 양피지와 깃펜이 나타났다.

“너희 인간들이 하는 마법사의 맹세와 비슷하지만, 내 힘으로 만든 것이라 효과가 더욱 강력하지. 내가 계약을 지키지 않든, 네가 지키지 않든. 제대로 효력을 발휘할 거다.”

인간들의 언어로 마신은 계약서를 적어 내렸다. 이어 다 적은 양피지와 펜을 루블리안에게 읽어 보란 듯 넘겼다.

불쾌한 기운으로 만들어진 양피지를 받은 루블리안은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나갔다. 사기를 칠 생각은 없는지, 어딘가 불리한 내용은 없는지 재차 확인했다. 몇 차례 다시 읽어 보았지만 대상과 시기 등 모든 게 확실했다. 맨 밑 서명하는 구간에 이름을 적자, 양피지와 깃펜이 두둥실 떠올랐다. 이내 빛을 내며 가루조차 남지 않게 흩어지듯 사라졌다. 그 주변으로 거대한 기운이 단번에 훅 퍼졌다.

미미하게 얼굴을 찌푸린 루블리안은 쿵 소리를 내며 넘어진 마족을 바라보았다. 아까보다 마족 특유의 기운이 옅어졌다. 마신이 통제권을 놓은 듯했다.

[이제 나는 네게 기생하니, 저 몸은 필요 없어.]

그 순간 머릿속에서 음습한 목소리가 울렸다. 소리가 갑작스레 들이닥친 탓에 루블리안은 손으로 머리를 받쳤다.

이내 시야에 들어온 보랏빛 손이 순식간에 본래 색을 되찾았다. 썩어가던 피부는 금세 새살처럼 변했다. 징그러운 꼴은 아니었다.

[네 집으로 돌아가 네 용사를 살리는 법을 알려 주지. 네 몸에 기생 중이니, 내 기운이야 없앨 수 있지만 계속 여기 있을 생각은 아니지 않나.]

인간을 위해 뭘 해 주는 게 싫었다. 그러나 이 육체는 자신의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신경을 써야 했다. 마신은 그러한 생각으로 회유하듯 말했다.

계속해서 머리가 울리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이곳에서는 뭘 하지 못하는 것도 맞았다. 제 몸에 들어찬 마신이 오물을 뒤집어쓴 느낌을 줬다. 더러운 기분을 삼키며,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회귀 직후 따로 마련해 둔 사택으로 순간 이동을 했다.

저택 내로 도착하자, 곧바로 습관처럼 약초를 넣은 담뱃대를 든 루블리안이 한 모금 빨아들이고 내쉰 뒤 마신에게 말했다.

“이제 그 방법이란 걸 말해.”

거만한 명령조에 마신은 부득 이를 갈았다. 한낱 인간 주제에 우러러봐야 하는 신에게 이러한 대우라니. 이 인간은 천족에 가까운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단 한 가지라도 마음에 든 인간이 그라는 걸 깨닫지 못한 마신은 화를 인내하고 설명을 시작했다.

[간단하다. 또 다른 세계에 네 용사와 똑같은 이가 있다. 너희 말로 하면 평행 세계라 하지. 그 인간의 세계와 네 용사의 세계를 맞바꾸면 된다. 그렇게 하면 서로의 운명까지도 맞바꾼 게 되니 네 용사는 죽지 않아.]

“……그 평행 세계의 백시현은, 죽을 운명이 아닌가?”

평행 세계의 백시현을 대체재로 이용하라는 말보다도 운명을 맞바꾸면 산다는 듯한 말이 걸렸다. 귀에 박혀 뽑히질 않았다.

[그래. 평행 세계라도 꼭 똑같지는 않고 조금씩 다르기 마련이지. 거기의 용사는 죽지 않고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운명을 가졌어. 평행 세계의 너와 사랑 놀음도 하지 않았지.]

돌아오는 답에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표정을 싸하게 굳혔다. 이를 강하게 문 탓에 턱에 힘이 들어갔다. 다소 힘이 들어간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한 곳은 살게 하고, 한 곳은 죽게 하다니. 하필 그 죽는 이가 왜 백시현이란 말인가. 신에 대한 반감이 더욱 몸집을 부풀렸다. 계속해서 죽던, 식어가던 체온과 뚝 끊어진 박동이 선명했다. 운명을 관장하는 신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똑같이 죽이고 또 죽여 그 처절한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일순 시야에 또다시 환상이 보이는 듯해, 그는 담뱃대를 입에 머금었다가 내뱉었다. 순식간에 방 안은 회색빛 연기로 자욱해졌다.

조종이 아닌 몸에 기생하는 탓에 마신은 그의 울분을 고스란히 느꼈다. 하찮은 인간의 감정에 동화되는 기분이 들기도 해, 달갑지 않았다. 그뿐일까. 역겹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감정이 주신에 대한 것이기에 참을 수 있었다. 한때는 둘도 없는 반쪽이나 마찬가지였으나, 지금은 완전히 돌아섰다. 귀찮게 견제하는 그만 없으면 천계든, 인간계든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다디단 상상을 끝마친 마신은 여전히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에게 마치 성경에 나온,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으라고 속삭였던 뱀처럼 말했다.

[네 용사의 운명을 그리 만든 신, 네가 내 뜻만 따라 주면 골치 아프게 할 수 있지. 잘하면 죽일 수도 있고.]

자기가 내리는 명령을 잘 따르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이때다 싶어 제 사리사욕을 챙기려는 마신 또한 운명을 이리 만든 신만큼이나 좋아하지 않았다. 뒤통수를 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교묘하고 철저하게 속내를 감췄다. 원래 큰 감정을 느끼지도 않으니 마신은 그러한 사실을 전해지는 감정으로 잡아 낼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지. 그런데 그걸 하려면 차원을 이동해야 하는데, 네가 도와주는 건가?”

[그럼. 그것과 시간을 네가 원하는 때로 돌릴 수 있도록 도와주지. 마법진이 불안정하여, 돌아가는 시점을 정하지 못하잖나.]

“그런데 둘의 세계를 바꾸면, 욕망과 힘이 강해질 텐데. 그건 어떻게 하려는 거지?”

욕망의 크기를 키우고 마왕을 만드는 것이 마신이라 확신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한 물음이었다. 소파에 편히 앉은 그는 담뱃대를 다시 입에 가져다 대고는 답을 기다렸다.

[내가 욕망을 키우지 않으면 돼. 마왕이 될 걱정은 할 필요가 없지. 힘 같은 경우에는 그쪽 세상은 마력이나 신성력 그 무엇도 없어, 강해져도 티가 나지는 않지만……. 네가 네 세계에 데리고 있을 작정인 것 같으니, 반항하지 못하게 적당히 내가 축복과 가호를 걸지. 네가 있는 세계에 네 용사가 있으면 힘이 억제될 거야.]

백시현이 평행 세계에서 힘이 강해지면, 잡아 놓기가 어렵다. 그렇게 되면 더 시간이 지체되리라. 마신은 루블리안을 통해 제 뜻을 이뤄야 했기에, 친히 축복과 가호를 걸어주기로 했다.

그 뜻을 모르는 루블리안은 제게 좋은 일을 하는 마신이 의심스러웠지만, 예상한 대로인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마신과 대거리를 통해 세세한 설명을 들었다.

우선, 시간을 돌려 백시현이 용사로서 이 세계에 오기 전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후 차원 이동을 통해 평행 세계 백시현과 백시현이 갓난아기 시절일 때의 그들의 세계로 넘어가 둘을 바꿔치기해야 했다. [네 용사는 욕망을 키우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지. 대신 바꿔치기한 다른 쪽은 네가 주술을 걸어.]

“주술을 걸라고?”

몇 번인지 셀 수 없는 회귀 속에 루블리안은 많은 것을 배웠다. 백시현이 전염병으로 죽은 적도 있고, 주술로 인해 죽은 적도 있었다. 그 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죽었으니, 그 죽음을 막기 위해 필연적으로 약초학은 물론. 주술도 섭렵했다. 주술은 마법처럼 선천적인 재능이 중요하여, 보통보다 잘하는 딱 그 정도였다. 한계가 명확했다.

[욕망을 완벽히 억제하는 주술이지.]

“…….”

[그렇게 하면 아무것도 가지고 싶어 하지도 않고, 누구와 친해지고 싶어 하지도 않고. 아무런 감정 없이 살게 될 거야. 후일 나중에 용사가 되어 너와 함께 마왕을 처치하고 나면, 주술을 풀어. 동시에 감정 증폭 마법을 걸고. 그렇게 하면 단번에 자기 상황을 깨닫고 불어나는 감정에 휩쓸려 틈을 보일 테고, 난 그 틈을 파고들어 마왕으로 만들 테니.]

대답하지 않는 루블리안에게 유혹하는 악마처럼 마신이 속살거렸다. 머리가 웅웅거렸다. 얼른 대답하라는 재촉처럼 느껴졌다. 루블리안은 고개가 느릿하게 떨어졌다.

“그런데 어차피 내가 죽일 텐데 굳이 마왕으로 만들 필요가 있나.” [죽일 생각인가?]

“그를 마왕으로 만들면 이 세계를 부숴 버릴 텐데, 난 시현과 여기서 살 생각이니 죽이는 게 맞지.”

[그럼 죽여.]

마신은 간단히 답을 내렸다. 다른 인간이라면 패로 이용하지 못하는 게 아쉬울지 몰라도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인 용사였다. 마왕을 죽였더니, 마왕으로 변해 동료에게 죽임 당한 용사. 앞에 붙은 수식어가 불명예스러워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하지. 그럼 다 정해졌으니, 좀 조용히 좀 해 봐. 머리를 식히고 바로 시작할 테니.”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여전히 담뱃대를 머금었다가 뱉기를 반복했다. 약초 덕에 환상에 휘둘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전과 같았으면 하루에 수십 번은 보였을 텐데 말이다.

셀 수 없이 죽음을 맞이한 너는 나를 원망할까. 백시현을 생각하면 늘 드는 의문들이 하나둘 머릿속을 채웠다. 이번에는 정말로 끝이 나리라 생각하니 더욱 그러했다.

그때였다. 이제는 약초도 효과가 없는지, 환상이 또 나타났다. 네가 질리지도 않고 계속해서 나타나니, 네가 날 그리워한다는 착각도 일은 거 아닌가. 모든 걸 백시현 탓으로 돌린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평소와 같이 환상에게 말을 걸었다. 약초였지만, 마약과 비슷했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라, 평소의 환상과는 다르다는 걸 마신이 입을 뗀 뒤에야 알았다.

[네가 미치긴 했나 보군. 잘 봐. 저건 환상이 아니야.]

미친 건 알았지만, 예상보다도 더 미쳤다는 투였다. 그러나 그 말은 루블리안의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정말로 환상이 아니었던 모양인지, 스물두 살은 아니어도 수십 번 되돌렸을 때보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백시현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루블리안은 환희에 차올랐다. 미래를 엿본 기분이었다.

“하자.”

실행할 마음이 곧바로 들었다. 루블리안은 기생 중인 마신의 힘 일부를 이용해 원하는 시점으로 시간을 돌렸다. 이어 차원 이동을 한 뒤, 신이 눈치채기 전에 사라지기 위해 빠르게 일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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