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 루블리안과 파괴된 세계 (6)
일반적으로 마기에 오염된 곳은 신전에서 신관을 파견하여 천천히 정화한다. 그러나 마기의 정도가 신성력을 잡아먹을 만큼 심하면 예외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예외는 릴튼 숲이었다.
그 숲에 들어간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드러난 살갗이 차츰 오염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얼룩덜룩 보랏빛으로 변하고, 마비된 것처럼 편히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호흡이 힘들어졌다. 그러나 몇 번을 죽고, 또 죽는 경험을 했으며, 이번에도 백시현이 죽었기에 별 감상이 들지 않았다. 잘못되면 시간을 되돌리고 죽어야지, 할 뿐.
푸릇한 잎 하나 없이 검은색으로 물든 앙상한 나무와 어깨가 아주 살짝 스치자, 나무가 파사삭. 가루가 되었다. 마기의 농도가 생각보다도 진했다. 루블리안은 검은 재 같은 가루를 털어냈다.
이 버석하고 오염된 땅을 얼마나 걸었는지 모를 때쯤, 옆에서 언뜻 봐도 마족인 이가 걸어왔다. 루블리안은 태평했다. 어차피 시간을 되돌리기 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온 것이었다. 함정이었거나, 제대로 된 해결책이 나오지 않으면 계속해서 시간을 돌리면 됐다.
백시현이 스물두 살을 넘는 날이 올 때까지.
“드디어 왔군. 몇십 번을 더 말해야 올지 귀찮았는데 잘됐어.”
단번에 루블리안의 앞으로 이동한 마족이 그의 얼굴을 샅샅이 훑으며 지루했다는 얼굴을 했다. 뒤로 물러나지도 않고, 그 모습을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보던 루블리안은 눈썹을 까딱였다.
“날 왜 불렀지?”
“흐음. 그래, 너는 내가 어떻게 마왕을 조종하는지 그런 건 하나도 궁금하지 않을 것 같았어. 네 관심은 오로지 죽은 이에게만 있지.”
마족이 무작정 본론부터 말하는 루블리안에게 말을 건네자, ‘죽은 이’라는 말에 뽀얀 이맛살이 구겨지고, 금색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난 진실만을 말했는데, 그런 표정을 짓는 이유를 모르겠군. 내 말에 틀린 곳이 있나?”
오만한 투였다. 루블리안은 표정을 가다듬었다. 백시현의 이야기만 나오면 과민 반응을 하게 되었다. 너무 보고 싶은 건지, 종종 환상까지 보는 탓에 정신이 나날로 피폐해졌다.
“그래서. 할 말이 뭔지 또 물어야 하나?”
마치 방금 말한 말조차 기억하지 못하냐는 듯한 목소리였다. 마족의 몸을 쓰고 있는 마신은 한낱 인간이 기어오르는 게 미치도록 싫었다. 원래부터 인간은 신의 아래에 있었으며, 굴복해야 하는 종이었다. 반항은 무슨. 순종적으로 굴어야 하는 인간 하나가 이러고 있는 걸 참아야 한다니. 그럼에도 마신은 자신의 계획에 루블리안이 꼭 필요했으므로 인내했다.
“너는 완벽하진 않지만, 유일무이하게 신의 권능에 도달했지. 나와 계약을 해. 나는 그 권능을 완벽하게 해 줄 수 있고, 계속해서 죽는 네 용사를 살릴 방안이 있으니. 흠, 계약보단 거래가 맞겠군.”
“……살릴 방안이 있다?”
“그래. 너는 세계가 어떻게 순리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 그건 다 운명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 용사는 죽을 운명을 타고났지.”
인간 중 용사를 가장 싫어하는 마신은 오히려 즐겁다는 기색으로 말했다. 그는 쓸모 있는 패인 마왕을 죽이는 용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천계 주신의 견제로 직접적으로는 개입할 수 없었기에, 인간계를 파괴하고 인간을 몰살할 유일한 수단이 마왕이기 때문이었다.
한편, 루블리안은 죽을 운명을 타고났다는 말에 허탈한 숨을 내뱉었다. 어떻게든 살리려고 했는데, 늘 죽었다. 그게 운명 때문이었다니. 참담했지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세계는 신의 관할. 세계의 순리 또한 신의 관할이다. 이미 미숙하지만, ‘시간’이라는 신의 권한을 침범했다. 다른 거라고 못할 리가 있나.
그리 생각하며, 루블리안은 앞의 마족을 바라보았다. 확실한 정체는 알 수 없으나, 저것들을 알고 있다면 운명을 피할 방법도 알 터였다.
“너는 그 운명을 피할 방도를 안다는 거군. 그렇다면 너는 내게 무얼 원하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마족의 눈이 번뜩였다. 다른 이가 봤다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춤했을 시선이었으나, 루블리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횟수를 알 수 없는 수십 번의 회귀는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했다. 그의 정신을 망가트렸다.
“계약. 나는 신이나, 천계가 아닌 마계를 통솔하며 그곳에 거주하지. 그런데 날 견제하고 통제하려는 천계의 신이 있어, 인간계에 함부로 간섭하지 못해. 지금도 마기가 짙은 곳으로 널 불러 천계의 이들의 눈을 피해 마족의 몸을 빌리고 있잖나.”
“해서, 계약을 통해 인간계에 직접 간섭하고 싶다 이 말이군.”
“그래. 그거야.”
무기질적이던 눈동자에 탐욕이 깊게 어렸다. 백시현을 살릴 방도를 내어주고, 누가 봐도 위험한 마신이란 작자에게 인간계에 간섭할 수 있게끔 한다, 라. 루블리안은 짧은 시간 내에 눈치챈 사실을 정리했다.
마왕은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인간이 욕망에 의해 변한 모습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세계를 넘는 것만으로 욕망이 커지고, 커지면 마왕이 되는가. 그건 아마 저 마족의 몸을 차지한 마신 때문일 터였다. 누가 봐도 인간을 싫어하는 동시에 인간계에 간섭하고 싶어 하는 자가, 방법이 없다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인간’을 ‘마왕’으로 변화시켜 조종하는 것이었을 테다.
“계약에 대해서 더 제대로 말해.”
그렇다면 자신은 지금 마왕을 이용하여 백시현을 몇십 번이나 죽인 신과 거래를 하는 거였다. 널 살리려고 널 죽인 놈과 이러고 있다니. 꼴이 웃기게 되었다.
“별것 없어. 너는 내가 내리는 축복과 가호를 받아 내 뜻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돼. 나는 네 몸에 기생할 거야. 머릿속에서 내 목소리가 울릴 테지.”
마신은 마음 같아서는 저 육체를 빼앗아 조종하고 싶었다. 신의 권한에 손을 댔는데도 멀쩡한 육신이라니. 몇천 년 만에 나올 만한, 천족에 가까운 단단한 육체였다. 그런 육체를 손에 넣으면 간접적으로 이 인간계를 모조리 부숴 버릴 수 있었다.
그렇지만 육체를 조종하려면, 이 마족처럼 선뜻 수긍하거나, 틈이 있어야만 했다. 거기다 본인 고유의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 있어야 했다. 본인 고유의 세계에 있는 인간은 담당 신 아래에 있기에, 욕망을 비정상적으로 키우면 신이 눈치채고 막아서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왕은 모두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이였다. 다른 세계에 있으니, 본인 고유 세계의 신이 간섭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다른 세계에 속한 것도 아니니, 세계의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다. 훌륭한 먹잇감이 따로 없었다.
물론 마신은 루블리안을 다른 세계로 이동하게 살살 구슬려 몸을 차지하는 상상도 해 보았다. 그러나 신의 권능에 도달한 저자는 인간보다는 신에 한 걸음 더 가까웠다. 틈을 파고들려고 하면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스스로 막으리라. 그저 창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신의 영역에 한 발짝 가까워진 게 썩 석연치 않았다. 마치 도전이라도 하는 듯해 못마땅했다. 바로 죽이거나 조종하고 싶었던 마신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데, 루블리안이 입을 열었다.
“네 뜻을 거절하면, 어떻게 되지?”
“어느 정도 수준은 애교로 봐주겠지만, 지속해서 거부한다면 네가 힘들어지겠지. 정신적으로.”
마족의 몸을 조종하고 있는 마신이 루블리안의 옆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루블리안은 검은 손을 치웠다.
“네가 바라는 건 뭐지?”
“인간 몰살이지. 아, 너랑 네 용사는 특별히 죽이진 않고, 내 종으로서 살게 해 주지. 어차피 성교해도 번식을 못 할 테니. 둘 정도는 내버려 둬도 되겠어.”
진심이었다. 신에 가까워진 인간을 기어오를 생각도 못 하게 부리는 건 괜찮을 성싶었다. 물론 그전에 루블리안이 죽는다면 영혼 없는 육체를 차지해 용사까지 다 죽일 생각이었지만. 마신은 그러한 속내를 능숙히 감췄다.
“뭘 고민하는 거지? 죽을 운명일 네 용사를 구할 생각이 아니었나?”
마신은 연신 속살거렸다. 하면 안 될 것을 저지르게 떠미는 유혹과 가까운 행태였다.
“구할 생각이지. 하지만 네가 거짓을 고한다면 내 손해 아닌가.”
“신의 진명을 가지고 맹세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지.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 거짓을 고한 적 없다고.”
다른 신이라면 운명을 건들지조차 못할 것이다. 운명은 이 세계를 창조하고, 만물과 나머지 신까지 창조한 두 신 중 한 신이 담당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마신은 이 세계를 창조한 신 중 한 신이었다.
원래는 천계에서 함께 인간계를 바라보았으나, 엇갈린 의견으로 인해 자신이 마계를 창조했다. 이어 마계로 내려가 마족, 마물 또한 창조하고는 마왕이 된 인간에게는 마물을 창조하는 권한의 일부를 친히 빌려주었다.
그러한 내막은 설명하지 않은 마신은 대답을 촉구했다. 고심하던 루블리안은 꽤 빠르게 결정했다.
“……좋아. 하지.”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다는 걸 알면서 내린 수긍이었다. 이미 여러 차례 시간을 되돌려 잃을 게 없어 쉽게 내려진 판단이기도 했다. 그에게 쌓아 올린 모든 것은 모래성과 같았다. 밀려 들어오는 파도 한 번에 으스러졌다.
쌓은 추억도, 감정도 시간을 돌리면 모든 게 흔적 없이 사라졌다. 남은 흔적은 자신의 기억. 그것뿐이었다. 하도 시간을 돌린 탓에 말실수를 하는 날이 잦아, 종내에는 회귀하면 가족과 연을 단절하기까지 했다. 가문도, 가족도, 유모도, 사용인들도. 모두와 연결 고리를 끊었다. 그들 또한 한순간에 달라진 자신을 느끼고 붙잡으려고 애를 썼다. 미련한 행동이었다. 백시현을 살리겠다는 걸 포기 못한 자신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그러했다.
그렇게 하나둘 모든 걸 끊어냈다. 정말로, 그 무엇도 루블리안 벨리텐트가 손에 쥐고 있는 게 없었다. 잃을 게 없는 그는 걸릴 게 없었고, 두려울 게 없었다. 죽음의 두려움조차 느껴지지 않는 그였기에.
“좋은 선택이야.”
마신은 입꼬리를 주욱 올렸다. 아주 만족스러운 식사를 한 것만 같은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