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루블리안과 파괴된 세계 (5)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백시현이 이 세계로 넘어온 지 3년이 조금 넘을 무렵이었다. 동시에 백시현이 서서히 루블리안 벨리텐트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한 지도 석 달이 된 시점이었다.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차츰 심기가 안 좋아졌다. 백시현이 거리를 둔 탓이 맞긴 했다. 정확히는 ‘리안’에 대한 유추가 아직 확실하게 끝맺어지지 않았는데, 경계선으로 살살 밀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리안’이 미래에서 온 백시현이라는 것까지 확인했으면서, 그 경로는 현재의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인 백시현에게서 얻어낼 수 없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자신이 백시현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이 사랑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멀어지는 게 싫고, 자연스레 웃음이 나오는 데도. 그 감정의 이름을 몰랐다. 그저 번거롭게 심장이 자꾸만 뛰는 게, 동성에게 하는 애인 행세로 인한 불쾌감 때문이라 생각했다. 초반에는 남자인데도 불구하고 괜찮다 여겼으면서 말이다.
같이 있으면 심장이 쿵쿵 뛰는 게 성가셨다.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묘하게 간질거려 거슬렸다. 하나하나 맞춰주는 게 번거로웠다. 그렇다고 해서 거리를 벌리면 또 평소랑 다른 심장 박동이 성가셨고, 평소에는 다분했던 간질거림이 사라지는 게 거슬렸다. 습관처럼 맞춰주게 되어, 주변에 백시현이 없으면 없는 대로 번거로웠다.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자신이 백시현에게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 명확하게 자각하지 못했다. 그저 번거롭고 성가시고 간지러운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감정의 의미를 깨달을 새도 없이 백시현이 숨을 거뒀다.
자신을 겨냥한 마지막 발악인 듯 남은 힘을 모조리 쏟아부은 일격에.
“미안, 해.”
그 말을 끝으로 촘촘한 검은 속눈썹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고, 따스한 연갈색 눈동자가 점차 눈꺼풀에 가려진다. 원래도 찬 몸이 더욱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저를 덮치듯이 몸을 던져 마왕의 마지막 공격을 막은 백시현을 부여잡고 데드리언에게 일갈했다.
“넋 놓지 말고. 움직여! 신성력, 신성력 써 봐, 얼른!”
그에 땅에 발이 붙은 것처럼 꼼짝하지 못했던 데드리언이 백시현의 근처로 와 그를 살폈다. 확인 후 더욱 낯이 창백해진 데드리언은 입술을 깨물었다. 마왕의 일격은 정확하게 심장을 꿰뚫었다. 이미 박동이 멈췄다. 몸이 겹쳐져 있는 루블리안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애써 부정하는 거라는 걸, 애원하는 거라는 걸 알아챈 데드리언은 고개를 숙이고는 양옆으로 저었다. 이미 죽었다는 뜻이었다.
다른 동료들의 얼굴 또한 핏기가 가셨다. 마왕을 죽이는 데 성공했다는 기쁨은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적막이 내려앉았다. 한동안 그들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은 백시현을 망연히 응시했다. 이 장면이 망막에 새겨지진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리고, 움직이자 말한 것은 몬트리오였다. 그는 남은 동료들을 챙겨 신전으로 복귀했다. 용사가 마왕을 죽임과 동시에 죽었다는 소식이 대륙 전체에 퍼졌다. 다들 용사가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했다며, 추모했다.
어떻게 저택으로 돌아온 건지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는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그 이후로 정신을 빼놓고 살았다. 권태롭고 지친 낯으로 창밖의 연갈색 나뭇가지만 바라보았다. 백시현을 생각나게 하는 색들만 멍하게 응시했다.
식사도 제대로 챙기지 않았으며, 밖을 나가는 일도 거의 없었다. 명예로운 죽음이란 말이 들려왔을 때는 모든 그릇을 던져 깨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불쾌하고 거슬리고 번거롭고 성가셨던 감정이 사라지지를 않는다. 백시현이 있어도, 없어도 그랬던 감정은 그의 부재에 더욱 크게 반응했다. 가슴 언저리가 꽉 죄는 느낌이었다. 폐부에 물이 가득 찬 느낌이었다. 이에 루블리안은 제 호흡이 정상인지 적어도 하루에 몇 번씩 확인하게 되었다.
그쯤부터 벨리텐트 가의 첫째가 제정신이 아니란 소문이 돌았다. 가끔 접시를 던지며 깨고, 가슴께를 잡고 호흡을 확인하고, 연갈색 혹은 칠흑 같은 새까만 색을 보며 넋을 놓으니 그런 소문이 돌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몬트리오가 그를 만나기 위해 벨리텐트 가를 찾아온 것은 소문이 돈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문 열어라.”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들려온 목소리에 루블리안은 힘없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다 귀찮았다. 세상이 온통 흑백으로 가득했다. 가족은 눈물을 흘리며, 제발 정신을 차려달라고 애원했다. 갑작스레 찾아온 몬트리오 알레스칸이 어떤 말을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닥 듣고 싶지도 않았다.
정신은 이미 차린 상태다. 멀쩡하지 않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지만. 백시현의 흔적처럼 남은 감정이 진득하니 붙어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 짙은 혈향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체온이, 더 이상 뛰지 않는 심장 부근이 몸에 스민 것처럼 잊히질 않았다. 제정신을 차리려면 그것들을 다 잊어야만 가능하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차려 버려서, 그 말에 더욱 예민해졌다.
“루블리안 벨리텐트.”
“…….”
“지금 네 모습을 보면, 시현이 좋아할 것 같나?”
문 너머로 들려오는 몬트리오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루블리안은 헛웃음을 흘렸다. 하다 하다 시현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너만 이별을 한 게 아니다. 나도, 알리도, 그리고 데드리언도 이별을 했지. 네가 유별났다는 건 안다. 걔는 널 안 좋아해도, 넌 걜 좋아했잖나.”
“……내가 자기를 좋아했다고?”
아주 작은 중얼거림이었으나, 몬트리오는 청각이 뛰어났다. 그 조그만 음성을 들은 그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정말로 어이가 없다는 투로 되물었다.
“너는 네 마음을 들여다볼 줄 모르나. 오죽 티가 났으면, 우리가 머무른 마을의 사람들마다 너희가 사귀느냐고 은근슬쩍 물어보겠나. 공작 부부 또한 시현과 같이 있는 네 모습을 봤다면 알아차렸을 거다.”
드물게도 혼란스러움에 빠졌다. 자신이 백시현을 좋아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면 이 번거롭고 성가시고 불쾌한 감정이 사랑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사랑은 막연히 설레고 장난스러우면서도 행복한 그런 것이 아닌가.
불쾌, 번거로움, 성가심, 거슬림.
여태 무엇이라 이름을 붙이지 못했던 감정에 의해 들었던 기분이었다. 그 달다는 ‘사랑’이란 단어와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았다.
“믿기지 않을 테지만, 너는 시현과 있을 때 늘 행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연스럽게 웃는 얼굴을 처음 봤을 때 내가 얼마나 기겁했는지 넌 모를 테지. 그러니 과거에 고여있지 말고 현재로 흘러. 시현도 그걸 원할 테니까.”
이어지는 깊은 음성에 루블리안 벨리텐트의 귀에 꽂힌 건 ‘과거’. 그 단어 하나였다. 다음 말은 듣지도 않은 채로 한동안 쓰지 않았던 머리를 굴렸다.
‘과거, 과거로 시간을 돌리면 돼…….’
이게 얼마나 미친 짓인지 그 또한 알고 있었다. 거대하지 않은 영역 대의 시간과 공간은 신이 인간에게 사용해도 좋다고 허락한 것이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호기심에 시간을 되돌리거나, 세계를 이동해보려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 끝은 모두 실패였다.
몬트리오가 혼자 뭐라고 더 지껄이고 난 후,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방을 나왔다. 밥을 먹었고, 전에 마탑에서 뜯어온 보상 중 하나인 온갖 마법 서적을 탐구했다. 그의 가족은 기뻤으나, 묘하게 어딘가 불안했다.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했다. 하지만 저렇게 열의를 쏟는 모습이 처음이라서, 따분한 표정이 아니라서 그들은 응원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끝끝내 6년 후 그는 미친 듯한 집념으로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진을 완성해냈다. 여러 시행착오 끝에 나온 마법진이었다. 망설임 없이 시전하자, 귀, 입, 코, 눈. 몸에서 구멍이 뚫린 곳은 모두 피가 넘쳐흘렀다. 고통스러웠다. 이명이 들리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죽어가는 감각을 느꼈다. 이대로 실패한 건가 낙담했을 때, 시야가 밝아졌다. 앳된 얼굴의 백시현이 멍하게 자길 쳐다보는 그에게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용사인 백시현이라고 해요.”
시간을 되돌리기 전과 똑같은 인사였다.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손을 백시현의 뺨에 가져다 대며 차지만, 살아있는 온기를 느꼈다. 당황한 표정은 그의 안중에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시현을 만지며 살아있음을 느꼈다. 미지근한 온도를 만끽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또다시 백시현이 죽었다. 이번에는 자신이 아닌 백시현이 마지막 일격의 대상이 된 탓에.
루블리안은 또다시 죽어가는 감각을 느끼며 시간을 돌렸다.
있었던 일이 모두 지워져 내렸다. 어머니가, 아버지가, 동생이.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때의 감정은 오로지 자신이 책임져야 했기에, 루블리안은 자신의 감정의 폭이 좁은 게 다행이라 여겼다.
연구한 마법진이 완벽하지는 않은지, 전과 다른 시간대로 돌아왔다.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신전에서 편지가 온 날, 끝내 편지를 받아 읽어내렸고 신전으로 향했다.
하지만 또 백시현은 죽었다.
또다시 피를 분수처럼 내뿜으며 죽어가는 감각을 느꼈다. 시간이 돌려졌다.
이번에는 마법진이 어딘가 불안정했는지, 시현이 시간을 돌리기 전을 잊지 않았다. 이번에는 죽지 않겠다. 스물두 살이 넘은 너를 볼 수 있겠다. 안일하게도 그런 안도감을 가졌었다.
백시현은 또 죽었다.
죽은 줄 알았던 마왕이 발악하며 공격을 한 바람에.
겨우 세 번 돌렸을 뿐이지만, 죽어가는 감각에 익숙해진 루블리안은 또다시 시간을 되돌렸다.
이번 마왕은 어딘가 이상했다. “너군. 너였어. 나와 계약을 하자.”란 말을 반복했다. 마왕의 행동에 동료들이 꺼림칙함을 느낄 때,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오로지 시현이 죽기 전 죽여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백시현은 또 죽었다.
마왕의 복수를 하겠다며 전염병을 퍼트린 마왕의 심복 때문에.
전염병의 치료제가 개발된 뒤, 그것을 확인한 루블리안은 또다시 시간을 되돌렸다.
마왕은 시간을 되돌리기 전처럼 이상한 말을 계속해댔다. “오염된 릴튼 숲으로 와라. 나와 계약을 맺자.” 하고.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얼른 마왕을 죽이고, 주변을 경계하며, 전염병 해독제까지 철저하게 갖췄다.
이번에는 성공하겠다는 마음과 다르게 백시현은 또 죽었다.
정말 성공하리란 안도에 딱 한 번 긴장을 놓았을 때, 암살자가 들어왔다. 치명타이기는 하겠지만, 죽지는 않을 공격이었다. 그러나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백시현이 몸을 날렸다.
루블리안은 또다시 시간을 되돌렸다.
다시. 다시. 다시. 다시. 다시. 다시. 다시. 다시.
몇 번을 돌렸는지 셀 수가 없었다. 대부분 백시현은 자신을 구하다 목숨을 잃는다. 거리를 둬도 결국엔 몸을 날리고, 가까이해도 몸을 날린다. 자기의 몸을 사리질 않았다. 루블리안은 사랑과 증오라는 감정을 동시에 깨달아버렸다.
구하지 말래도 구하는 네가 증오스럽다. 내가 강하다는 걸 알면서도 구하는 네가 사랑스럽다. 모순적인 감정들이 섞여 애증을 만들어냈다. 루블리안은 시간을 되돌린 이후로 이상한 말만 지껄이는 마왕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내 바람을 자기가 들어줄 수 있다 했으니.
그렇게 백시현이 죽은 세계.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릴튼 숲에서 마신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