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루블리안과 파괴된 세계 (4)
“뭐?”
“루블리안!”
“혀, 형!”
반색하는 신관과 반대되게 가족들의 눈이 다 동그랗게 뜨였다. 경악과 걱정이 어린, 비슷한 색채의 세 쌍의 눈동자에 여유롭게 찻잔의 테두리를 검지로 살살 쓰는 그가 담긴다. 그는 싱그러운 미소를 입가 걸쳤다.
“가서 제대로 거절하고 올게요.”
순식간에 가족과 신관의 표정이 뒤바뀐다. 안도하는 낯들을 보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신관에게 시선을 멈췄다. 여전히 목석같으나, 초조함이 드러난다.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지금 삶이 권태롭고 따분했다. 그러나 용사의 동료가 되어 마왕을 처치할 생각 따위는 추후도 없었다.
굳이 편한 이 생활을 버리고, 손에 피를 묻힐 필요가 뭐가 있나. 마왕과 관련된 신탁이니만큼 거절이 어렵긴 할 테지만. 신전에 무엇을 쥐여주고 거절을 할까 고민하며 찻잔의 표면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느지막하게 신관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 대답 하나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우선 어떻게든 신전에 데리고 가겠다는 거였다.
“그럼 바로 신전에 갈 채비를 해 주시길 바랍니다.”
“내 아들을 바로 데려가겠다고? 이 미친 것들이 진짜! 마력이나 신성력이 있는 것들은 도대체 예의를 어디다 팔아먹은 거야!”
결국 참다못한 어머니가 분을 표출했다.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아버지와 동생과 함께 사납게 눈을 뜬 어머니를 말렸다. 어차피 가서 거절만 하고 바로 올 거란 말을 하면서.
그렇게 신전에 도착한 그는 저를 제외한 용사와 그의 동료가 있다는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3황자, 몬트리오 알레스칸과 링컨 자작가의 첫 번째 여식, 알리, 그리고 다음 세대 교황으로 내정된 신관, 데드리언 러셀이 보인다. 그리고 그 끝에 걸린 건.
‘……리안?’
갓난아기 시절이었지만, 기억이 선명했다. 인공적인 빛에 의해 어쩐지 갈색처럼 보이기도 하는 윤기 나는 흑발과 온화한 연갈색 눈동자. 거기에 그때와 다르지 않은 앳된 얼굴. 낯짝을 뜯어볼 것처럼 직시하던 루블리안과 시선을 마주한 백시현은 멍하게 눈을 깜빡이다 입을 열었다.
“아. 안녕하세요. ……용사인 백시현이라고 해요.”
‘백시현?’
용사란 말이 어색한지 뜸을 들이다 내뱉은 소개에 루블리안은 도리어 의문스러워졌다. 이름을 분명 리안이라고 들었었는데, 가짜 이름을 댄 건가 싶었다.
앞에 있는 용사를 벨리텐트 공작저로 데려가 부모님께 물어볼 수도 없었다. 마법을 배우면서 그때 모습을 바꾼 게 환각이란 걸 알아차렸고, 저와 죽어버린 멍청한 납치범만이 리안의 진짜 모습을 목격했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물어보아도 환각이 덧씌워진 얼굴의 설명이 이어지리라.
첫 호기심도 가져가더니, 오랜만에 일은 호기심도 차지해버린다. 루블리안은 저를 모르는 것 같은 순진무구한 낯과, 그때와 다른 태도에 보란 듯이 눈꼬리를 접었다. 리안인지, 백시현인지. 두 이름 중 무엇이 진짜인지 모를 용사의 어깨가 아주 조금 튀어 올랐다가 잠잠해진다.
그 반응을 보던 루블리안은 입을 열어 신관을 불렀다.
“신관.”
“네.”
“종이와 펜 좀 가지고 오세요.”
“네……?”
“부모님께 토벌을 함께 떠난다고 편지를 남기려고요.”
같이 온 신관에게 싫냐는 듯이 고개를 비스듬히 하자, 재빨리 움직인다. 거칠게 닫히는 문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특유의 여유로운 움직임으로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백시현의 앞에 당도했다.
“루블리안 벨리텐트에요.”
“……아, 네.”
“불러 볼래요?”
“네?”
묘하게 순하면서 무심한 낯의 눈이 조금 크기를 키웠다. 루블리안은 엄지로 그의 아랫입술을 살포시 누르며 다시 한번 말했다.
“안 돼요?”
“……루블리안 벨리텐트.”
망설이다 나온 이름은 예상외로 그다지 큰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남자치고는 목소리가 곱다, 딱 그 정도의 감상. 호기심이 동한 상대이니, 다른 감정을 느끼려나 했던 호기심은 금세 해결되었다.
루블리안은 눈치를 보다 멀어지는 백시현의 머리에 갈 곳을 잃고 붕 뜬 손을 제자리로 가져왔다. 입술이 닿았던 엄지를 검지와 비비며 일부러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벨리텐트는 성이에요. 편하게 루블리안으로 불러요.”
백시현이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독기 없는 무심함은 짧은 새 봤던 낯과 확연히 차이가 났다. 제대로 된 생각이 가능했던 순간부터 끊임없이 되뇐 기억 속 리안은 순함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된 일을 다 겪고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당황하지 않을 것 같은 무심함만이 존재했다.
그때 분노를 내비친 사람은 어디로 간 건지. 쌍둥이인가. 루블리안은 우선 백시현과 거리를 좁히며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로 했다. 천천히 숨통을 조르는 것처럼.
“시현?”
“네.”
“저랑 사귈래요?”
그래서였다. 희대의 개소리를 내뱉은 것은.
“헉.”
“뭐?”
“와.”
가구처럼 숨죽이며 구경하던 셋이 반응했다. 그보다 조금 늦게 넋이 나간 백시현의 입이 열리고, 멍청한 되물음이 돌아온다.
“……네?”
“원래는 토벌도 거절하러 온 거였는데…… 첫눈에 반했거든요. 싫어요?”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자신이 얼마나 제정신 아닌 새끼로 보일지 알고 있었다. 첫 만남에, 그것도 동성에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고, 조금 더 눈매를 휘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금빛 속눈썹이 내려앉았다가 올라가면서 창공 같은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 안에 담긴 백시현은 작게 입을 벌렸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대답 안 해줘요?”
상체를 숙여 얼굴 사이의 거리를 좁힌 루블리안 벨리텐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길게 뻗은 검은 속눈썹을, 미지근한 온도의 연갈색 눈동자를, 곧은 콧대를, 도톰한 입술을 차례차례 훑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무렇지 않네.’
호기심이 동하는 상대여서 그런지, 남자라는 성별과 관계없이 토악질이 나오지 않았다. 무도회에서 다른 가문의 영식에게 불려 나가 고백받았을 때는 그 자리에서 할 뻔할 정도로 역겨웠는데 말이다. 그는 불그스름해진 하얀 귀를 검지로 톡 건드렸다. 용사의 어깨가 움찔 떨리고, 이내 고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죄송합니다만 거절하겠습니다.”
“으음. 왜요?”
정녕 모르냐는 눈빛이다.
‘모를 리가 있나.’
일부러 되물은 루블리안은 내색하지 않고 더욱 화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용사의 눈가가 움찔 떨린다. 아무래도 얼굴에 약한 듯했다.
“……초면인데다가 서로를 잘 모르니까요. 당신,”
“루블리안이요.”
당신이라는 말을 루블리안으로 고치자, 용사가 멈칫했다.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그 틈을 타 얼굴을 조금 더 들이밀었다. 또 움찔 떨린다. 이번에는 목이 뒤로 움직이기까지 한다. 이어 고운 음성이 자그맣게 들려온다.
“……루블리안한테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요컨대 처음 만난 게 문제라는 거네요?”
“네.”
“좋아요. 천천히 느긋하게 알아가 보면 되겠어요. 그렇죠?”
느릿하게 답한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명답을 내린 것처럼 당당했다. 동시에 전체적으로 하얗기만 한 공간에 색채를 불어넣을 정도로 미려한 미소를 여전히 내걸고 있었다. 잠시나마 명답을 들었다 착각할 만큼이나.
“……네?”
“‘네.’라고 대답한 거네요. 좋아요, 잘 지내봐요. 시현, 가족 관계는 어떻게 돼요?”
“그걸 왜 물어봐요?”
“알아가 보기로 했으니까요.”
황당하다는 용사에게 느른히 말한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쌍둥이가 있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가 여태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몇몇 부분을 탈탈 털어냈다. 그 알아간다는 빌미로 시작된 추궁은 신관이 종이와 펜을 가지고 온 뒤에야 끝이 났다.
루블리안 벨리텐트가 편지를 공작저에 부쳐달라고 하고, 풍경같이 있던 이들이 끼어들어 서로를 소개했다. 그러고는 하룻밤을 신전에서 묵고, 다음날 토벌을 떠났다.
하루, 이틀, 한 달, 일 년.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일 년 동안 인내심 있게 백시현을 관찰했다.
백시현은 눈치가 빨랐다. 늘 미소를 짓고 있으나, 저가 자길 관찰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도 내버려 둔 걸 보면, 꽤 관대한 성격이거나, 저가 자길 좋아해서 그러는 거라고 멍청하게 착각하는 게 아닐까 싶다. 첫눈에 반했다며 고백을 날렸으니.
그리고 초반만 해도 착한 아이 콤플렉스라도 있는 건지, 묘하게 순하면서 무심한 낯으로 여기저길 돕던 성격이 사라졌다. 아마도 저 삼인방의 영향일 테다.
그것 외에도 마법, 신성력, 검술, 계책. 모든 방면에서 뛰어나다는 걸 알 수 있었고, 우리를 자신이 정한 선의 경계에 두며 저울질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더불어 가짜 미소가 아닌 진실한 미소는 거의 짓지 않는다는 것 또한.
딱 그런 느낌이다. 미묘하게 점차 ‘리안’을 닮아가고 있단 느낌. 그 생각을 곱씹으며 루블리안은 후계자 수업을 이른 시일 내로 뗐던 비상한 머리를 굴렸다.
‘미래에서 왔던 건가.’
그때였다. 푸른 눈동자와 연갈색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했다. 먼저 입을 연 건 루블리안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 백시현이었다.
“루블리안.”
“왜 불러, 시현?”
봄바람이 느릿하게 일렁이는 듯한 목소리였다. 물결치듯 흔들리는 눈부신 금발을 눈에 담으며 백시현은 줄곧 궁금했던 것을 입에 담았다.
“아직도 나 좋아해? 아니면 뭐가 그렇게 궁금해? 관찰할 게 아직도 더 남았어?”
방금까지 했던 생각을 읽은 것처럼 흘러나온 물음에 루블리안은 가느스름하게 눈을 휘었다. 지금이 저 경계선 너머에 들어갈 기회란 걸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저 경계선 안으로 들어가 속을 낱낱이 파헤치고 싶었다. 늘 그 기회를 노렸다.
아마 여전히 응어리지듯 남은 ‘리안’에 대한 호기심 때문일 테다.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더 알고 싶고,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진실로 그 때문이라 여겼다.
사랑도 애정도 어떤 감정인지, 어떻게 생겨 먹은 건지 알 수 없었으나, 그 감정과 최대한 비슷하길 바라며 입안에 단 사탕이 굴러다닐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관찰이라니. 원래 좋아하면 저절로 시선이 간다잖아.”
그냥 내가 여전히 널 좋아할 뿐이야.
고백하는 사람답지 않게 담백하고 여유로운 태도를 보인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예상치 못한 답을 받은 얼굴인 백시현을 응시했다. 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또 알아낸 게 있다면, 백시현은 애정에 목말라 있다는 것이었다.
그 감정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러한 ‘사랑’이란 감정을 평생 느낄 일이 없을 테다. 그렇기에 온전한 애정은 줄 수 없었으나, 어느 정도 흉내 낸 가짜는 줄 수 있었다.
물론 백시현이 저를 좋아한다는 건 아니었다. 그저 경계선에 발을 걸친, 딱 선 앞까지 친근해진 동료인 저의 고백을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이리라 예상하는 것뿐이었다.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굳게 닫힌 입에서 나올 답을 기다렸다. 이내 고민을 끝낸 듯 고개를 들어 올린다. 눈이 마주치고 입술이 열린다.
“……그럼 사귈래?”
“응.”
예상한 답에 기다렸다는 듯 수락하자, 백시현이 잠시 멈칫한다. 달싹이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물음에는 미약한 민망함이 서려 있었다.
“그럼 막, ……자기나 여보 같은 호칭도 해?”
“자기가 바란다면, 얼마든지.”
백시현처럼 멈칫했던 루블리안 벨리텐트가 대답했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평소보다 짙어졌다는 사실을 그는 알아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