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루블리안과 파괴된 세계 (3)
기쁨보다 먼저 든 감정은 당황스러움이었다. 내가 심장에 꽂은 게 아닌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와서 꽂아준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여태까지 보인 움직임을 상기하면 그는 분명히 피할 수 있었다. 내가 없을 때만 해도 루블리안의 스태프를 다 피하고 있지 않았던가.
게다가 그는 지금 궤도를 예측한 듯이 검의 끝이 향할 곳으로 살며시 움직였다. 그 찰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망연히 바닥에 늘어진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휜 채로 천천히 호흡하고 있었다.
“너, 너…….”
말이 이어지질 않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머리가 파업을 선언했다. 그런 내 머리를 일깨운 건 어딘가 장난스러운 구석이 있는 음성이었다.
“자기야, 정신 차려. 왜 이렇게 얼이 빠졌지?”
진정으로 내가 이리 구는 이유를 모른다기보다는, 내가 정신을 차리게 하려는 게 목적인 듯했다.
이리 죽어줄 거였으면, 도대체 왜 지금까지 이런 짓들을 한 건지. 왜 전투를 이어나갔던 건지. 도무지 의중을 헤아릴 수 없는 행동은 혼란을 초래했다.
“넋이 나간 것도 귀엽긴 한데……. 나한테 시간이 별로 없어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게 기적이었다. 보통 사람이면 말하다 이미 저 말을 내뱉다 죽었다. 마력 검이 꽂힌 상태로 그는 내 발을 잡고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죽을 거면, 자기 손에 죽고 싶었어.”
“…….”
“선택은, 후우, 네 몫이야.”
느린 속도의 말이 끝나자, 머리가 아파 왔다. 고성을 내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평행 세계 백시현의 찌꺼기보다 심했다. 머릿속이 뒤집히고, 쥐어짜이고, 할 수 있는 고문이란 고문은 다 당한 느낌이었다. 이내 내 것이 아닌 기억들이 가득 차오른다.
그 순간, 루블리안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끝으로 의식을 잃었다.
_oOo_
말을 트고, 어느 정도 생각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었을 무렵. 여덟 살의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종종 갓난아기 시절 몇 없는 기억 중 하나를 떠올렸다.
종내에는 죽음을 맞이한 마탑주였던 납치범을 처리한 리안이라는 인간에게 구해진 일이었다.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어렸을 때부터 그다지 감정을 잘 느끼는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누가 다쳐도 무감각했으며, 죽은 새가 바닥에 있다면 가엾다는 감상도 없이 그냥 지나칠 정도였다.
그런 그에게는 가족의 애정보다도, 유모의 애정보다도, 사용인들의 애정보다도 그때 백시현이 보여준 선연한 분노가 더욱 생소하고 이상했다.
‘어떻게 생판 모르는 사람을 위해 그리 화를 낼 수가 있지?’
가족과 유모, 그리고 사용인들은 연결 고리가 있지만, 그 리안이라는 자는 아니었다. 대체 어떤 삶을 살면 생판 모르는 사람을 위해 대가 없는 분노를 표출할 수 있나 싶었다. 그 분노가 그가 아닌 다른 이를 향했다는 걸 모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아무튼 그는 그때의 기억이 쉽사리 잊히지 않았다. 가장 인상 깊은 기억을 뽑으라고 하면 고작 8년이지만, 망설임 없이 필시 그 기억을 뽑으리라.
여덟 살 루블리안 벨리텐트의 첫 호기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리안이라는 자가 궁금했다. 그러나 가족에게 물어도, 유모에게 물어도, 사용인들에게 물어도. 그 누구의 입에서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모두 그때의 일은 함구해야 한다는 것처럼 쉬쉬했다.
그렇게 시간에 떠밀린 루블리안 벨리텐트가 열 살이 되었을 때, 마탑은 양심 없게도 마탑주 자리를 권했다. 납치 전적에, 그로 인해 전쟁 대신 공작가한테 탈탈 털렸으면 말이다. 머리가 좋다는 마법사들만 모인 집단치고는 상당히 헛되고 멍청한 포부였다.
“이 미친 마법사들이……!”
“부인, 화를 가라앉혀. 몸에 좋지 않다는 걸 알잖나.”
“델리스! 당신은 화도 안 나?! 납치 계획도 같이 짠 이 미친 새끼들이, 공범이면서 우리 애를 데려가겠다고 하는데, 이게 미친 게 아니면 뭐야!”
루블리안은 저렇게 분개하는 어머니를 그저 느긋하게 바라보았다. 원체 감정을 잘 느끼지를 못하니 마탑의 마법사가 대단한 머저리라는 감상이 끝이었다.
“알아. 나도 어떻게 화가 안 나겠어. 우리 아들인데. 그리고 지금 우리 첫째 둘째가 그 말을 듣고 있어서 그런 거야.”
“아…….”
배려도 마찬가지였다. 감정의 폭이 작아 눈동자 너머로 여러 감정이 엿보일 때면, 어떻게 저럴 수 있나, 라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아. 가끔가다 감정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정말 귀찮겠다 싶은 생각 하나랑. 그리 생각한 루블리안은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입을 열었다.
“어머니.”
“왜 그러니?”
“가지 않을게요. 화내지 마세요. 아버지 말대로 화는 안 좋은걸요.”
진심으로 하는 걱정은 아니었다. 감정이 결여된 말을 하면 제가 다 슬프다는 얼굴을 하는 어머니가 보기 싫을 뿐이었다. 그 얼굴은 제가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감상을 일게끔 했으니.
루블리안은 눈을 동그랗게 뜨다 “그래, 엄마가 다 엎어버릴게!” 하며 열의를 불태우는 어머니를 보던 시선을 아버지에게로 옮겼다. 광기가 서리지 않은 그저 권태로운 푸른 눈동자와 푸른빛의 물에 녹빛 물을 세 방울 떨군 듯한 눈동자가 교차한다.
진짜로 걱정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확인하는 눈빛이다. 꺼림칙함이 아닌 감정의 폭이 작은 첫째 아이에 대한 걱정에서 비롯된. 금빛 속눈썹을 팔랑이던 루블리안은 슬쩍 눈을 접었다. 괜찮다는 의미였다.
거짓이 아니었다. 루블리안은 정말 괜찮았다.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에 따라오는 불편함은 없었다. 그야 그럴 것이 감정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가족들은 변함없이 저를 사랑했고, 사용인들은 저를 모셔야 했다. 누군가의 속내를 헤아리는 게 아니라 그 헤아림을 받는 처지이니 편하기만 했다.
“으잉. 형아, 어디 가?”
얽힌 시선이 끊긴 건, 네 살 어린 동생의 앳된 목소리 때문이었다. 이제 여섯 살이 된 루드비히 벨리텐트가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였다. 한창 집중을 못 할 나이인 그는 대화를 제대로 듣지 못한 듯했다. 아버지의 눈동자 색을 복사한 듯한 눈을 바라보며 루블리안이 고개를 내저었다.
“안 가. 뚝.”
“으응. 뚝! 근데 나 안 울었는데?”
다 따라 하고 나서 바보 같은 물음을 던진다. 부모님이 웃음을 터뜨리며 동생을 귀여워할 때,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한 폭의 그림 같은 미소를 지었다. 겉보기엔 화려한 색채로 가득했지만, 사실 덧입히기 전의 색은 무채색일 듯한 미소였다.
루드비히에게 신경이 쏠린 그의 부모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후 마탑 건은 황궁에 항의하는 탄원서를 올리고, 난리가 나면서 마무리되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물살에 휩쓸리듯 또 시간이 지나갔다. 후계자 수업을 듣고, 마탑의 마법사가 아닌 마법사를 고용해 수업을 듣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많은 일을 겪은 루블리안 벨리텐트가 열여덟 살이 되던 해였다.
용사가 나타났다.
루블리안 벨리텐트가 그 소식을 듣게 된 건, 편지를 무시한 공작가에 기어코 파견된 신관이 왔을 때였다.
비상한 머리로 후계자 수업은 이미 일찍이 다 떼고, 아버지를 도와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시각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집무실 안으로 들려왔다. 허락이 떨어지자 집사, 베이가 신전에서 왔다는 편지를 페이퍼나이프와 함께 은쟁반 위에 올려 가져왔다.
“신전? 거기서 우리한테 볼일이 무엇이 있다고.”
미심쩍다는 얼굴로 편지를 집어 든 공작은 능숙하게 페이퍼나이프를 이용하여 편지를 뜯었다. 손짓 하나하나에서 기품이 느껴졌다.
편지를 들고 있는 아버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본 루블리안은 뭔가 잘못됐음을 알아차렸다. 천천히 신전에서 아버지를 화나게 할만한 이유를 되짚던, 그는 돌연 책상을 내리치는 아버지의 주먹에 눈을 미미하게 키웠다. 아무리 화가 나도 고요히 삭이던 아버지가 이리 격하게 반응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무슨 내용이길래 그러세요?”
원래 빳빳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편지를 구긴 그의 아버지가 일그러진 낯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눈동자 속에는 슬픔과 분노가 공존했다.
“왜 하필 너에게만…….”
“저랑 관련 있는 내용이 쓰여있나 보네요. 주세요.”
“아니, 아니다. 무시할 것이니 신경 쓰지 마라. 너는 이 편지가 도착한 사실을 보지도, 듣지도 못한 거다.”
제발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드러났다. 다른 이라면 궁금해할 법도 했지만, 루블리안은 열여덟 살이 되고도 감정의 폭은 그리 넓어지지 않았다. 좋다고 할 수 없는 감정들만 좀 배웠다.
“그렇게 할게요. 베이도, 슬레온도 그러도록 해.”
그러니 한 번의 반항 없이 무심히 넘길 수 있었다. 당초에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신전에서 편지가 왔었다는 사실을 지워버렸던 차에 신관이 왔다. 편지를 보낸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던 날이었다.
“당신 같으면 그 위험한 곳에 당신네 애를 보내겠어요? 아아. 아니지. 신을 모시는 종으로서 신이 애를 죽음의 길로 인도하면 거기로 보내겠네! 내가 생각을 잘못했네!”
“부인, 너무 흥분했어. 잠시 진정하게. 그리고 신관, 우리 아들을 보낼 일은 죽어도 없으니, 다시 신전으로 돌아가지 그러나. 아니, 돌아가.”
권유형으로 말했던 그의 아버지가 말을 정정했다. 당사자인 루블리안은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로 응접실에 앉아 느긋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창과 방패의 싸움을 관망했다.
“공작 각하와 공작 부인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신탁입니다. 이곳저곳을 파괴하고 마물을 푸는 마왕을 죽일 용사가 나타났는데, 그 용사의 동료가 첫째 공자님이라 신께서 전하시는데, 어찌 그냥 갈 수 있단 말입니까.”
‘아. 그렇게 된 건가.’
차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루블리안은 목석같은 신관, 눈을 동그랗게 뜬 동생,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뱉는 어머니, 마지막으로 완고한 아버지를 훑었다. 이어 가족이 기겁할 만한 답을 내놓았다.
“갈게요, 신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