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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49)화 (49/112)

49. 루블리안과 파괴된 세계 (2)

환희에 찬 낯의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뒤로 하고 시전한 차원 이동 마법진이 성공했던 건지 내 눈에 들어오는 건 또다시 피 웅덩이에 빠졌다가 나온 듯한 루블리안이었다.

그 모습에 한 번, 높은 건축물들이 다 부서져 사방이 으스러진 콘크리트로 가득한 모습에 한 번, 누가 봐도 실시간 촬영 중인 헬기에 한 번. 총 세 번을 연달아 놀랐다. 찬물로 세척이라도 한 것처럼 머릿속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너네 미쳤어?”

내 등장에 일시적으로 싸움을 멈춘 루블리안과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응시하며 말했다. 방금 봤던 약초 향이 가득한, 지워진 시간대의 행태와 다르게 피를 흘리면서도 여유로운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빙글빙글 웃으며 손을 움직였다. 비명이 울리고, 순식간에 헬기가 추락했다. 팡! 헬기가 추락한 곳을 중심으로 거친 바람이 나를 할퀴었다.

이 미친 새끼는 내가 저 촬영 중인 헬기가 거슬리는 줄 알고 아예 마법으로 추락시켜버렸다. 미친 새끼라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잔혹했다.

그러고 있으니 루블리안이 내게 다가와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시현은 민간인한테 피해 가는 거 안 좋아하잖아요. 마법으로 오는 사람 막고, 신경 쓰면서 하다 보니까……. 점점 마력이 떨어져서 어쩔 수 없었어요.”

“난 원래 자기 빼고는 신경 안 써서.”

죄책감 한 점 없이 그저 내 눈치를 보며 시무룩해하는 루블리안의 목소리 뒤로 느긋한 음성이 따라붙었다. 피범벅이 된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지그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루블리안을 신성력으로 치유하고 대규모 마법진을 펼쳐, 이 지역 모든 이들을 지금의 기억을 잃고 잠들게 했다. 그리고 직접 묻고 싶었던 의문을 입에 담았다.

“여기, 내가 살던 세계가 내 세계 아닌 거지? 평행 세계의, 그러니까 마왕이 된 백시현의 세계야, 여기?”

“네?”

내 말에 루블리안이 당황하는 게 보였다. 밑도 끝도 없는 소리였으니, 그는 이해하지 못할 테다.

그와 반대로 이 내막을 설계한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먹잇감의 목을 느릿하게 조이는 뱀처럼 눈을 휘었다. 방금까지 봤던 권태롭고 지친 눈동자는 없었다. 오로지 광기만이 남아 번들거리고 있었다. 섬뜩했다.

“자기야, 이미 확신하고 있으면서 답이 필요해?”

“…….”

“그때는 정말 환상인 줄 알았는데……. 일이 이렇게 꼬인 거였다니.”

턱에 손을 대고, 고개를 비스듬히 한 루블리안이 흥미롭다는 식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이내 상처가 다 치유된 루블리안을 흘기더니 아공간에서 포션을 꺼내 마셨다. 찰랑이는 색이 푸르다. 치유의 포션인 듯했다.

‘신.’

속으로 신을 불러봤지만, 무응답이다. 둘의 싸움을 막았는데도 이미 휘말려 피해를 입은 무구한 사람들과 이 난리를 어떻게 해결할지는 우선 제쳐두어야 할 성싶었다.

나는 압축한 신성력으로 롱소드의 형태를 만들어 잡았다. 루블리안도 다시 제대로 스태프를 들었다. 준비 태세를 한 우리를 보고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마력으로 검을 만든 순간. 잠시간 멈췄던 전투가 재개되었다.

허공에 수십 개의 공격 마법진이 떠오른다. 붉은빛으로 타오르는 마법진에서 날아오는 공격들에 버티지 못한 방어 마법진이 금세 깨진다. 막지 못한 탄환과 같은 공격이 쇄도한다. 이를 피하며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뒤로 순간 이동해 검을 내지르자, 마력으로 만들어진 검과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검이 맞부딪힌다.

“자기야, 표정 다 굳었네. 나랑 싸우는 게 그렇게 긴장돼?”

날카로운 소음과 어울리지 않는 여유로운 말씨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나와 검을 맞대면서도 전혀 긴장감이 없었다.

“이것 봐. 대답도 없잖아.”

“닥, 쳐.”

도발하는 평행 세계 루블리안에게 짤막하게 대꾸하고 검에 신성력을 더하며 강하게 쥐었다. 이내 거세게 맞부딪힌 상극의 두 기운이 버티지 못하고, 큰소리와 함께 연기를 흩날리며 터져 버렸다.

그 폭발의 여파로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잡고 있던 검이 터진 터라, 손바닥에 상처가 깊게 패고 선혈이 흘렀다. 금세 다시 검을 만든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마법을 이용하여 내 앞길을 막는 동시에 루블리안을 향해 검을 맹렬하게 휘두른다. 마력을 두른 단단한 스태프와 마력 검이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충돌한다. 날카로운 소음이 귀를 찢기듯 파고든다.

나 또한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공격하기 위해 순간 이동을 하려 하자마자, 거센 마력이 살갗을 파고들 만큼 발목을 세게 죄이며 뒤로 당긴다. 마치 이동을 막으려는 듯이.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았다. 발목을 감싼 마력의 끈을 잘라내고 파열된 발목을 신성력으로 치유했다. 다시금 공격 마법과 방어 마법이 맞부딪쳤는지, 터지는 소리와 함께 피어오른 연기 속에서 귀를 기울였다.

어쩐지 비슷한 발소리가 들린다. 헷갈리게 하기 위해서인지 루블리안의 걸음걸이를 흉내 낸 듯하지만, 미묘하게 달랐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찾아낸 나는 신성력으로 만든 검을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이것도 사랑의 힘인가…….”

마치 분명 똑같이 따라 했다는 투였다. 사랑의 힘이라니. 그런 게 아니었으나, 짜증 좀 나보라는 마음으로 평소라면 아니라 대꾸했을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런 내 속내를 짐작했다는 듯이 웃은 그는 날카로운 소음 없이 물 흐르듯 유려하게 공격을 재개했다. 나는 검을 조금 더 세게 고쳐잡았다. 찌르고, 베고, 휘두른다. 그 기본적인 것들을 응용하면서 마법을 사용했다.

솔직히 이리 공격하면서도 치명상을 입힐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이제 와 밝혀졌지만, 나는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힘이 강해져야 하는 게 정상이지만, 이상하게도 강해지지 않는다. 그런 나와 다르게 비약적으로 마력이 강해지고 넘치게 된 두 루블리안은 현재 비슷한 양의 마력을 가지고 있다. 자세히 살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거기까지면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아마 무수히 많은 시간을 돌렸을 터였다. 셀 수 없을 만큼 토벌해봤단 뜻이었다. 전투의 흐름을 읽는 능력과 감각, 재빠른 판단력. 직접 경험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그에게는 차고 넘쳤다.

그리고…….

“자기야, 또 여기 빈다.”

내 전투 시 습관까지도 다 파악하고 있다. 그의 손짓에 저 멀리로 내던져진 나는 몸이 땅에 부딪히기 전, 순간 이동을 전개하여 다시금 평행 세계 루블리안에게 검을 내질렀다. 그가 나를 죽일 생각이 없다는 것을, 죽이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루블리안보다 내가 앞에서 공격하는 게 맞았다. 루블리안을 살려두는 이유는 오로지 나 때문인 듯했으니, 언제 수틀려 뒤통수를 칠지 몰랐다.

그의 움직임을 잠시라도 멈추기 위해 마력들을 두꺼운 실처럼 뽑아 빠르게 쏟아 냈다. 그러나 그는 마력을 좀 더 날카롭게 만들어 일순간에 실처럼 뽑아낸 마력을 다 잘라버렸다. 파고들 틈이 없다.

앞뒤로 루블리안과 협공을 하니, 순간 이동으로 마법을 피해버리질 않나. 순간 이동 마법진을 깨려 하니, 신성력으로 만든 검은 마력으로 무력화시킨 후 스태프를 마력 검으로 막으며 자리를 피하질 않나. 같은 사람인지 의혹이 생길 정도로 터무니없이 강하다.

누가 먼저 체력과 마력이 닳냐의 싸움이었다. 쉴 새 없이 공방전이 이어졌다. 길어지는 전투에 신성력은 슬슬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힘만 강해졌더라면, 신성력이 이렇게 바닥을 보이지는 않았을 텐데. 의미 없는 가정을 제쳐두고 남은 마력도 파악했다. 저쪽이 마력을 쓰니, 대부분의 공격을 신성력으로 한 덕에 마력은 어느 정도는 있었다. 가장 문제는 용사일 때, 단련된 신체와 다른 내 몸이었다. 숨이 달리고, 호흡이 진정되지 않았다.

다행인 건, 평행 세계 루블리안도 포션을 다 썼다는 거다. 자잘하지만 상처가 하나, 둘. 늘어났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죽이지 못한다. 별안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회가 온다면, 그를 죽일 수 있을까?

또다시 멀찍이 내던져진 나는 마력을 그물처럼 펼쳐 땅과 충돌하는 것을 막았다. 그러고는 아주 잠깐 숨을 골랐다. 이어 막연히 죽일 기회가 오면, 그 기회를 이용할 수 있는지 고심했다.

알리가 말했던 ‘희생양’은 곧 ‘평행 세계 백시현’을 가리킨다. 여태껏 내 고유 세계라 알고 왔던 세계의, 이 자리의 진정한 주인이자, ‘죽을 운명’이었던 나를 대체한 사람이다. 대체되어 죽은 까닭이, 저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나를 살리려 했기 때문이었고.

물론 내게는 없는 기억이다. 되돌려지기 이전의 시간이다. 그러니 시간을 돌리기 전, 내가 왜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구하기 위해 대신 죽었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 둘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 내가 평행 세계 루블리안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은 다 한기가 돌았다. 따뜻한 색 하나 없이 차디찬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런데도 나 또한 사람인지라, 일순 멈칫하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였다.

나 하나 살리려 모든 것을 포기한 채로 시간을 되돌리고 또 되돌린 자를, 종내에는 날 살리려다 미쳐버린 자를 죽일 수 있겠냐고. 저 심장에 검을 꽂을 수 있겠냐고.

그렇다고 해서 그를 죽이지 않으면 이 상황이 그저 계속 지속될 뿐이다. 누구 한 명은 죽어야 끝이 났다. 만일 기회가 왔을 때 멈칫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았다. 이어 잡념을 완벽히 털어내고, 응축한 마력으로 만든 검을 고쳐잡았다. 신성력은 이제 치유에만 쓰도록 아껴둬야 했다.

다시 누구 한 명은 죽어야 끝이 나는 공방전에 끼어들었다. 나도, 루블리안도, 평행 세계 루블리안도 점차 상처가 늘어갔다. 계속해서 생긴 상처 때문에 피가 멈출 기미가 안 보였다.

두 루블리안은 남은 마력이 슬슬 떨어지는지, 다량의 마법진을 전개하지 않았다. 이젠 검을 쓴다는 것만 빼면 육탄전이랑 다를 게 없었다. 오랜 전투에 혼미한 정신을 꽉 부여잡았다. 몸이 온통 피범벅에 땀 범벅이었다. 숨을 고르게 내쉬며 마력 검을 휘두르는 순간, 푹. 깊게 박혔다.

내 검이,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심장 언저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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