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8. 루블리안과 파괴된 세계 (1)
끝 음이 여운을 남기듯 떨어지자, 나는 앞서 들었던 말들을 다 잊어버릴 정도로 굳어버렸다. 왜 자신을 대신하여 죽었냐며, 자조 어린 목소리로 나를 탓하던 음성은 금세 절절한 감정을 품고 제발 살아달라 애걸하고 있었다. 내가 봐왔던 평행 세계의 루블리안과 괴리감이 너무나 컸다. 한없이 여유로운 모습이 아닌 톡 건들기만 해도 무너질 듯한 위태로운 모습이, 이렇게 애원하는 모습이 낯설었다.
“데리러 갈 테니, 살아만 있어.”
“…….”
“네가 미워 죽었으면 하는데, 네가 좋아 살았으면 해. 그러니 우선 살아. 살아서 끝을 보자. 스물두 살을 넘은 후에 이 질긴 인연인지, 악연인지 모를 것을 끝내자.”
그는 고개를 숙여 내 손목 안쪽에 입술을 지분거린 후, 가볍게 떼어 냈다. 가볍게 떨어진 것과 다르게 문질러진 손목에 질척이는 감정이 들러 붙어있는 것만 같았다. 무겁고 고인 감정이 달갑지 않았다.
손목을 빼내려 하자, 그가 힘을 풀었다가 세게 잡아 그대로 나를 당겼다. 아까처럼 놔줄 줄 알았던 내가 멍청했다. 무너지는 중심에 의자 등받이에 손을 얹었다. 얼굴이 가까워, 뒤로 물러나려고 하자 그가 허락하지 않는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눈동자에 이채가 스친다. 불길했다. 환상이 아니란 걸 알아차렸나. 순간적으로 풀리는 힘에 팔을 강하게 내치고 마법을 써 그에게서 벗어났다.
신과 흡사하게 목소리 하나가 웅웅거리듯 머리에 울린다.
[네가 미치긴 했나 보군. 잘 봐. 저건 환상이 아니야.]
악마의 속삭임이 이럴까 싶은, 더 낮고 음습한 목소리다. 최대한 평행 세계 루블리안과 거리를 벌린 후, 마법을 시전할 준비를 했다.
의자를 내팽개치듯 일어난 그가 천천히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맞붙은 입술을 뗀다.
“너…… 환상이 아니구나.”
절절한 감정이 사라진, 이제야 깨달았다는 음성을 끝으로 내게 다가오려는 모습이 시야 담긴다. 더 이상 잡힐 생각은 없었다. 나는 손을 튕겼다. 일렁이는 풍경 속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환희에 찬 낯을 했다. 꺼림칙했다.
_oOo_
백시현이 마탑에 침입한 시각, 루블리안은 심기가 불편하단 걸 감추지 않고 드러내며 푹신한 의자에 앉아 골머리를 싸맸다.
“미켈.”
“또 무슨 짓을 저지르시려고 부릅니까…….”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낯이었다. 미켈은 그간 루블리안이 행한 망나니짓을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개중 가장 끔찍했던 역시 진짜로 신전을 폭파해버린 거였다. 몇 시간이 지나니 자신의 원성에 의해 원상 복구도 제대로 했지만, 폭파로 인해 하얀 파편이 튀는 걸 봤을 때의 심정이란. 상쾌한 동시에 마탑에 돈을 청구할까 봐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
아무리 부숴도 신이 나오지 않자, 원래도 더러운 성격이 더욱 더러워진 루블리안은 흉흉한 눈빛으로 미켈을 바라보았다.
“내가 뭘 얼마만큼 저질렀다고.”
“예에……. 신전을 폭파하시고, 번화가의 사람을 모두 잠재우고, 산의 나무를 뽑아 거꾸로 뒤집어 놓으시고, 황궁의 금을 다 녹게 하셨지만 아무런 짓도 하지 않으셨죠. 예에…….”
“미켈, 죽고 싶나?”
누가 봐도 비꼬는 소리에 루블리안이 날카롭게 반응했다. 말로 사람을 벨 수 있다면, 이미 베고도 남았을 수준이었다. 미켈은 바로 꼬리를 내렸다.
“아닙니다.”
“그래야지.”
구시렁거리는 미켈을 내버려 둔 채, 루블리안은 생각에 잠겼다. 차원 이동은 오로지 공간만 관여하는 게 아니었다. 시간 또한 마찬가지였다. 즉, 정확한 좌표와 시간대를 알지 못한다면 시현을 찾지 못한다는 소리였다.
저번에는 신이 알려줬다지만, 지금은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아무리 난리를 쳐도 신이 나오질 않는다. 일일이 모든 시간대를 돌아다니며 찾다가는 엇갈릴 확률이 높았다.
고심하고 고심한 끝에 루블리안은 백시현의 고유 세계로 향하기로 했다. 고유 세계에도 없고, 평행 세계에도 없는 시현이 어느 시간대의, 어느 세계로 떨어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시현은 끝내 무슨 일이 있어도 원래 세계로 돌아올 터였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마음을 정한 루블리안은 푹신한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어 서류들을 읽으며 일을 처리하는 중인 미켈을 불렀다.
“미켈.”
“예?”
“나 이제 간다.”
그러자 산책하러 가자는 말을 들은 강아지처럼 반색한 미켈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당탕. 뒤로 넘어가는 의자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너무나 좋아하는 모습을 보인 미켈은 땀을 뻘뻘 흘렸고, 루블리안은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했다. 기왕이면 가는 김에 선물 하나를 선물해주자고.
“복구했던 숲, 다시 나무 엎어버릴 테니까 알아서 처리해. 아, 보존 마법도 걸어놓도록 하지.”
“……예? 예? 에, 에이~ 왜 그러십니까, 마탑주님.”
“난 한 번 뱉은 말 제대로 지켜. 그렇게 오래 나를 보좌했으면서 설마 모르진 않겠지.”
모를 리가 있겠냐! 미켈은 오랜만에 소리를 내지르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여기서 대들면 상황만 더 악화될 뿐이었다. 신전을 폭파할까, 하고 중얼거리듯 뱉은 말도 지키는 이였다. 진짜로 주변은 상관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미켈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마탑이 세워진 이래로 가장 강한 마탑주의 보존 마법. 그것을 과연 누가 풀 수 있을까. 마탑의 돈이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미켈은 서러움을 참아냈다.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지.”
루블리안은 숲으로 향하여 제 말을 지킨 뒤에, 시현의 고유 세계로 이동했다. 텁텁한 공기가 폐로 들어오고, 뿌연 미세먼지가 눈에 들어온다. 자신의 세계와는 확연히 다른 풍경. 높은 건축물들과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들이 도로를 지나친다.
처음 시현의 세계에 왔을 때는 드물게도 당황했었다. 모든 게 달랐다. 괜스레 시현도 이런 기분이 들었나, 생각할 정도였다. 그 모습을 눈에 담던 루블리안은 전에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사놨던 집으로 향했다.
시현에게 동거를 하자고 청할 예정이었는데, 그 나이 든 새끼가 다 망쳐놓았다. 딱 필요한 가구만 사놓고 나머지는 같이 채우기 위해 비워뒀었으나, 그런 날이 오기엔 아직 먼 듯했다. 마탑주의 방에 있던 것만큼이나 폭신한 소파에 앉은 루블리안은 검지를 들었다가 내리며 탁탁 일정한 박자로 두들겼다.
당장이라도 시현을 찾아 나서고 싶었지만, 이게 최선이라는 걸 알았다. 여기서 평행 세계의 그 미친놈을 어떻게 죽일지 고민하는 게 실용적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다른 세계로 넘어가, 한바탕 일을 저지른 뒤 다른 신에게라도 시현의 위치를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신의 목소리는 해당 신의 축복 및 가호를 받아야만 듣는 게 가능했다. 저번처럼 예외적으로 신들이 세계에 내려오지 않는 이상은.
눈가를 꾹꾹 누른 루블리안은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깊이 상념에 빠지면 빠질수록 현재로서는 믿는 것밖에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온몸을 덮쳤다. 리안을 다시 만난 날 이후로 느끼지 않았던 어딘가 텅 빈 공허한 감각과 괜한 생각들이 들이닥쳤다.
딱 하루였다. 리안과, 그러니까 시현과 만난 것은. 그런데 그 하루가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쪽지 하나만을 꼭 쥔 채로 하루, 이틀, 한 달, 일 년, 십 년. 그 긴 세월을 버텼다. 오죽했으면 첫 번째로 쓰게 된 마법이 보존 마법이었을까.
그전까지는 마법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고, 의욕도 없었다. 자신을 주운 사람이 마탑주였고, 운 좋게 자신의 재능이 마법에 지충되어 있어 의무적으로 배워야 할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걸 바꾼 게 쪽지 하나였다. 너무나 자주 본 탓에 너덜거리는 쪽지를 보존하겠다는 마음으로 훈련에 열중했다. 마법을 제대로 배우겠단 마음이 그렇게 생겼다는 걸, 아마 시현을 꿈에도 모를 테다.
아공간에 소중히 모셔놓은 종이를 떠올리다, 루블리안은 다시 원래 주제로 되돌아왔다. 평행 세계의 나이 많은 놈 또한 종내에는 이곳으로 올 테다. 이번에는 저번에 못다 한 전투의 끝장을 봐야 했다. 머릿속으로 여러 시뮬레이션을 그려보며, 작전을 세웠다.
그리고 다음 날, 저녁. 미세하게 움직이는 마력 파동과 동시에 평행 세계의 루블리안이 등장했다. 루블리안도, 평행 세계의 루블리안도. 서로가 이곳에 있다는 걸 금세 알아차렸다. 그 알아챔은 당연하게도 전투로 이어졌다.
둘은 백시현 외에는 타인에게 신경을 기울이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 둘을 말릴 백시현이 없었다. 하다못해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도움을 줄 만한 신조차 없었다. 투명 마법도 쓰지 않았기에, 둘이 건물을 부수며 싸우는 모습은 뉴스로 생생하게 중개될 정도였다. 그리고 그 전투 한 가운데에서 백시현이 등장했다.
누가 봐도 촬영 중인 하늘을 떠다니는 헬기와 완전히 가루가 되어버린 주변. 후각에 스미는 비릿한 피 냄새까지. 제대로 성공한 마법진을 통해 루블리안의 곁으로 온 백시현은 주변을 둘러보다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말했다.
“……너네 미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