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 루블리안과 지워진 시간대
녹진한 목소리만으로 알 수 있었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기어코 나를 찾아냈다. 내게 뻗어지는 팔이 느껴져 벗어나 등을 돌리니, 멀쩡한 상태인 미친놈이 보인다.
“너, 내가 있는 곳을 어떻게 알았어.”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차원 이동 마법진을 연구하다 보니 느낀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비이상적으로 내가 있는 곳을 잘 찾아내고 있었다. 루블리안조차 신에게 좌표를 물어볼 정도인데, 그것 없이 혼자.
눅눅한 새빨간 입술이 부드러이 곡선을 그리고, 눈매가 외설적으로 휘어진다. 광기에 먹힌 심해와 같은 눈동자가 번들거린다. 집착과 욕망. 여러 감정이 섞여 있다.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 적색경보가 울린다. 위험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자, 미소만 그리던 입술이 여러 둥근 모양으로 움직인다.
“자기야, 나는 자기한테 주술을 하나만 걸어놨다는 말을 한 적이 없어.”
느긋한 발걸음으로 내게 다가오는 루블리안에 마력으로 단검을 만들며 그가 온 만큼 물러났다. 그런 내 발목을 꼭 멀쩡해진 게 아쉽다는 듯이 바라본다. 시선으로 핥아지는 기분이다. 구역질이 났다.
“……주술로 내 위치를 추적이라도 했나 봐?”
“그럼. 그게 아니라면, 내가 이렇게 빨리 자기의 위치를 어떻게 찾아냈겠어. 그 애새끼가 멍청하게 굴어서 다행이야. 나처럼 추적 마법부터 걸었어야지.”
느릿하고 끈적한 목소리가 귓전에 달라붙는 것 같았다. 한 차례 귀를 거칠게 쓸어내린 나는 고민했다. 마법진은 완성되었다. 시전만 하면 되는데,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막지 않을 확률은? 없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나를 막지 못할 확률은? 이 또한 없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주술을 걸어놓았다고 했다. 이걸 풀지 못하는 이상, 내 위치는 저 쓸데없이 머리 좋은 미친 새끼 한정으로 늘 공개된 거나 다름이 없었다.
“또 머리 굴리네.”
“…….”
“그냥 순순히 날 따라오는 편이 자기도 편하지 않나?”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얼굴로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움직임 하나하나에 여유로움이 묻어나왔다. 조급해진 나와는 달리. 빠른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입술이 바짝 말랐다. 은연중에 떨리는 손으로 검을 더욱 꽉 쥐었다.
지금 갓난아기 상태인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죽이는 건 어떨까. 마지막 마법진이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었으나, 공작저에서 필요한 지식은 다 빼내었다. 더 볼 것도 없으니, 죽이고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방법도 나쁘진 않았다. 다만, 바뀔 미래와 이 계책이 성공할 확률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라는 전제가 붙었다.
“여긴 내 과거가 맞아. 난 늘 생각해. 우리 자기는 대체 왜 날 죽이지 않고 살려뒀을까……. 역시 날 좋아하나?”
그럴 일은 벌어지지 않으리라 확신하면서 헛소리를 한다. 저 페이스에 말려들면 안 됐다. 지금은 도움을 줄 루블리안 또한 없으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차원 이동 마법진을 연구한답시고 이틀이나 자지 못해서 더욱 상태가 안 좋았다. 이럴 때 오는 것도 재주다. 나는 고통을 호소하는 머리를 굴리며 탈출할 방법을 궁리했다. 이 세계에서 벗어나도 주술을 이용하여 날 쫓아올 텐데, 나는 주술은 풀지를 못한다. 그걸 풀 수 있는 건…… 지하 감옥. 지하 감옥에 갇힌 납치범 새끼뿐이다. 하지만 거기까지 도달하는 도중에 이 미친놈이 나를 잡지 못할 리가 없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견제하며, 생각을 이어나가려는데 그가 먼저 선공을 날렸다. 루블리안이었다면 먼저 스태프로 찍어눌렀을 텐데,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가만히 서서 몇십 개의 공격 마법진을 펼친 후 전개했다.
콰과광! 서둘러 보호 마법을 쓴 나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이 미친 새끼는 과거에 자기 집이 망가져도 괘념치 않았다. 부모님이나 유모가 죽어 나가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거 아닌가. 그런 의혹이 들 정도였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등장하자마자, 배로 불어났던 힘이 원래대로 몸집을 줄였다. 이유를 알 수 없으나, 평행 세계 때도 그렇고 그와 같은 세계에 있으면 힘이 약해지는 듯했다. 그렇기에 목숨을 끊거나 치명타를 입히는 건 무리였다.
내 마력과 신성력이 끝을 보일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것. 딱 그거 하나만이 가능했다.
연쇄하는 공격 마법을 막고, 공격 마법을 전개하고, 단검을 날리고. 그때 봤던 벨리텐트의 저택 꼴이 생각될 만큼 벽이고 천장이고 무너지지 않는 곳이 없다. 복도 쪽 벽도 예외는 아니었다. 뚫린 구멍 너머로 허망한 표정, 놀란 표정, 기겁한 표정 등 여러 얼굴로 사용인들과 공작 내외가 나와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바라본다.
고민 끝에 나는 저들 사이로 달려가 숨어들었다. 키워준 부모와 유모가 있으니, 잠시라도 공격을 멈추리란 생각에 따른 선택이었다. 다행히도 키워준 정이라는 건 존재하는지 아주 찰나지만 공격이 멈췄다.
나는 평생을 살아오며 마법을 전개한 속도 중 가장 빠르게 탐색 마법을 시전했다. 지하 감옥과 거기 있는 사람이 대략 잡힌다. 확인되자마자, 순간 이동 마법을 펼쳐 납치범 지척에 도착했다. 3초도 안 돼서 일어난 일이었다.
살아는 있지만, 저 증오에 차오른 눈을 보니 내 말을 들어줄 리가 만무했다. 나는 신성력과 마력을 동시에 이용하여 납치범 새끼의 기억을 조작했다. 내게 걸린 주술을 모조리 풀면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데리고 감옥을 나갈 수 있다는 식으로. 정신력이 높은 마탑주의 기억을 바꿀 수 있는 건 신성력과 마력을 한꺼번에 이용했으며, 내 응용 능력이 뛰어난 덕이었다.
반쯤 시체 상태인 마탑주가 내게 손을 뻗었다. 이어 거칠게 상한 목소리가 다 됐다고 말한다. 주술이 풀린 후 성공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마지막 마법진을 바로 전개하자, 시야가 어지럽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느 한 곳의 회로가 꼬였다. 눈앞이 일렁이며 풍경이 바뀌는 순간, 뱀처럼 웃고 있는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입술을 움직였다.
잘…… 다녀와? 입술 모양을 읽은 즉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마법은 시전되었고 차원 이동의 흐름에 속절없이 끌려갔다. 어딘가 비틀리긴 했지만, 성공했다는 감정을 느낄 새도 없었다. 이동된 곳은 온통 쌉싸름한 약초 향과 회색빛 연기로 가득했다. 절로 기침이 나왔다.
입가를 가리며 다시 마법진을 펼치려던 때였다. 불쑥 나타난 희고 커다란 손이 내 팔목을 잡아당겼다. 내 팔목을 잡은 이는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었다. 방금 본 모습과는 무언가 다른.
“놔.”
손목을 빼내려 하자, 신음이 날 정도로 강하게 움켜쥔다. 붉은 자국이 생길 듯했다. 이어 팔이 나가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거세게 나를 잡아당겨 제 무릎 위에 앉히고는 허리에 팔을 두른다. 겨우 한쪽 팔인데 벗어날 수가 없었다. 마법을 사용하려는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
“약초도 이제 효용이 없나……. 또 환각이 보이네.”
환각? 의문이 들어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바라보자, 그는 권태로우면서도 지친 낯으로 길쭉한 담뱃대에 입을 댄다. 느릿하게 빨아들이느라 홀쭉해졌던 뺨이, 이내 둥글어지는 입술 사이로 연기가 내뱉어지자 부풀어 오른다. 쌉싸름한 약초 향이 강해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런 나를 보던 그가 눈꼬리를 가느스름하게 휘며,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짧게 내뱉는다. 가히 퇴폐적이라 할만한 모습이었으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단단한 다리와 팔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법을 사용하자, 금세 무력화가 된다. 신성력으로 단검을 만들어 찌르려고 하자, 익숙하다는 듯이 막는다. 머리채를 잡으려고 하면 마법으로 손목을 묶어버린다.
풀고 묶고 찌르고 막고. 그 반복 끝에 그가 담뱃대를 한 모금 더 빨았다가 내쉰다. 일부러 연기를 내 얼굴에 뱉은 듯, 회색빛 연기가 얼굴을 덮친다. 씁쓸한 약초 향이 콧속까지 침범했다. 콜록. 생리적으로 기침이 나오고 눈이 따끔거렸다.
담뱃대를 아공간에 떨군 그가 내 눈가를 가만가만 느릿하고 끈적한 손길로 만진다. 자연스레 인상이 팍 쓰였다. 손길에서 미묘한 감정이 묻어나 더욱 그러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놔.”
눈가를 매만지는 손을 내치며 말하자,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허탈한 숨을 내뱉는다. 그는 다시 손을 올리지 않고 내쳐진 손을 응시하다, 어쩐지 위태로우면서도 수긍하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너는 환각이라도 내 말을 따라주는 적이 없지.”
“…….”
“나를 원망하나? 계속해서 편히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게 해서?”
자조적인 음성이 귀로 직결된다. 그에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여긴 시간을 되돌리기 전의, 현재로서는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잊은 지워진 시간대가 분명했다. 이 미친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날 얼마나 과거로 보낸 건지. 욕이 육성으로 나오려 했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나를 살리지 말았어야지. 나 대신 죽지 말았어야지.”
내가 뭘 들은 거지? 내가 평행 세계 루블리안 대신 죽다니. 벗어나려는 행위를 나도 모르게 멈추고, 인상을 찌푸릴 만큼 상상조차 되지 않는 말이었다. 생각을 더 하기도 전에 농익은 음성이 이어진다.
“나 같은 사람도 아닌 쓰레기 새끼를 왜 구하러 나서. 왜 그렇게 늘 죽어.”
“…….”
“왜 그딴 번거로운 감정을 내가 느끼게 만들어서 이 사달을 만들어.”
어두운 바다 깊숙히 빠지는 감상이 들게 만드는 눈동자는 유독 어두웠고, 여러 감정으로 뒤섞여있었다.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는 약초 하나로 실낱같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상황 파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쌉싸름한 약초 향에도 그저 멍한 느낌이었다. 어두운 눈동자 저 아래 잠식된 광기를 마주하자, 그제야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래서 널 내 손으로 죽이려 한 적도 있는데…….”
커다란 손이 내 목을 배회했다. 급소인지라, 낯을 굳히며 벗어나려 하는데 시간이 지나도 목을 쥔 손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도저히 힘이 안 들어가. 너는 나로 인해 죽고 다시 살아나고, 나는 너로 인해 미쳐버리고. 이 머저리 같은 짓을 벌써 몇 번이나 한 건지 모르겠어.”
허탈하게 내뱉은 숨결이 내게 닿는다. 허리춤에 닿은 팔의 힘이 약해진다. 그 틈을 타 벗어난 뒤, 거리를 벌리려 하자 내 손목이 잡힌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또다시 말했다.
“그래도 이번이 마지막일 거야. 네 운명을 다른 세계의 너한테 주기로 했거든.”
……뭐?
“그 세계에서는 죽지 마. 그 누구도 구하려 들지 마. 이리 애원할 테니 그저 살아만 있어.”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