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45)화 (45/112)

045. 루블리안과 과거 평행 세계 (5)

마법사에게 열흘은 수면에 빠질 만한 슬립 마법을 걸고, 그대로 지나쳤다. 우선 책상 위, 마법사가 연구하던 자료와 보고서들을 훑었다.

마물 관련 키메라 연구와 그 외 자잘한 약물 실험. 빠르게 내용을 훑어내린 나는 보고서에 쓰인 잠든 마법사의 이름까지 확인한 뒤, 철장 속에서 키리릭 거리는 마물과 혼합된 키메라를 지나쳐 먼지가 쌓인 옷장을 열어젖혔다. 검고 음침한 로브가 한아름이라, 하나를 빌려 입고 방을 나섰다.

식당이 20층이었나. 전에 루블리안과 마탑에 왔을 때, 마탑 내에서 층을 이동하는 방법을 배웠기에 손쉽게 원하던 곳으로 갈 수 있었다. 식당 내로 들어가자, 몇몇 마법사들이 종이와 펜을 붙잡은 채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게 보였다.

그 마법사 중 가장 다크서클이 진해 보이는 이의 옆에 털썩 앉았다. 이어 시선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거의 다, 다 됐어……!”라는 말만 연발하는 제정신 아닌 마법사를 건드렸다.

“허, 허억! 이, 이게 무슨 짓이야!”

그러자 예상한 반응이 날아온다. 나는 뭐가 어쨌냐는 듯이 고개를 삐뚜름하게 까딱였다. 이에 더 화가 난 듯 째진 고성이 귀를 할퀸다.

“네, 네가 날 건드렸잖아! 으악! 고, 곧 성공이었는데 까먹었어!”

정신 나간 마법사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부여잡고는 괴성을 내질렀다. 흘깃 보니 기억력 영구 보관 마법이었다. 내가 용사일 적에는 이미 개발된 마법진이라 뭐가 부족한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여기.”

“뭐?”

“여기다 연결어 쓰고 이어. 어떤 기억을 선택할지와 영구 보존에 관련한 수식은 다 짰잖아. 잇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펜을 빼앗아 빈 곳을 채워 마법진을 완성했다. 다 해놓고 코앞에서 까먹었다고 난리를 친다. 마법사는 눈을 희번덕 뜨더니, 바로 마법을 시전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린다.

“드디어……! 드. 드디어 캐롤 에드워드 도널드 3세를 기억할 수 있게 됐어……!”

우리나라로 치면 철수 영희 미애 3세와 같은 이름이었다. 끅끅 우는 소리를 내는 마법사의 옆에서 다짐했다. 이 세계를 떠나면 마탑은 절대 다시는 오지 말자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멈추겠지 싶었던 끅끅 소리가 멈추질 않았다. 저러다 실신할 것 같다. 더구나 정보를 얻기 위해 접근한 건데, 시간도 그리 충분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다른 수를 쓰기로 했다. 마법사 대부분은 명예욕이 넘친다. 마법진을 연구하여 만들면 꼭 독자적으로 이름을 올리고 싶어하기에, 도둑놈처럼 공로의 반을 가로채는 말을 꺼냈다.

“내 덕인 거 알지?”

“머, 뭐? 그, 그건 아니지! 네가 툭 치는 바람에 잠깐 까먹었던 거잖아!”

대번에 우는 소리를 멈추고, 마법사가 손에 묻었던 얼굴을 쳐올린다. 여기서는 순박한 마법사를 연기할 필요가 없기에 본래대로 무심히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나를 응시하던 마법사가 그제야 묻는다.

“그, 그런데 너 못 보던 얼굴인데? 누, 누구야?”

“못 보던 얼굴, 한두 번 봐?”

“아, 아니. 그건 아니지. 그, 그래도 식당에 오가는 마법사는 내가 다 파악하고 있는데?”

의심의 눈초리가 거두어지질 않는다. 여기서나, 공작저에서나. 몇 달간 받을 의심을 요즘 다 받고 있다. 믿었던 사람이 내 뒤통수를 치는 것도 아니니 괘념치 않긴 하다만.

“39층에 오른쪽 방, 알지?”

“매, 맨날 펑펑 터트리는 그 미친 찰스?”

“거기서 조수이자 제자로 일하고 있어.”

“……걔, 걔가 조수를 받는다고?”

의심이 더욱 깊어진다. 그럴 만했다. 특히 본인의 연구에 몰두하는 마법사는 제자를 들이지 않으니 말이다. 연구하기에도 바쁜데 남을 챙길 시간이 있나.

짐작했던 물음들이라 나는 사돈 남 말 하는 마법사의 물컵을 빼앗아 한 모금 마시며 단조롭게 대답했다.

“몇 년간 찰스가 방에서 나온 거 봤어? 새로운 연구를 시작한 날부터 몇 년간 노예처럼 부려지며 살았으니, 얼굴을 알 턱이 있겠어?”

보고서에는 진척 과정 말고도,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연구했는지 시간 또한 세세하게 쓰여있었다. 뭉텅이의 보고서를 대충 훑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그가 키메라 연구를 시작한 후로 몇 년간 방 밖에 얼굴 한번 내비치지 않았다는 것을.

“애초에 마탑은 마탑 내의 마법사가 데리고 오지 않는 이상, 위치를 몰라서 못 오는 거 알잖아. 새삼스럽게 처음 본 얼굴을 왜 의심하는 건지 모르겠네.”

“너, 너 진짜 방 안에서만 살았구나? 그 소식 못 들었어?”

“소식?”

무슨 소식을 말하는 거지. 내 되물음에 마법사의 눈에 서렸던 의심이 싹 사라졌다. 방 밖을 나오지 않아, 돌아가는 상황을 모른다고 착각하고 있는 듯했다.

“마, 마탑주께서 납치하기로 했던 벨리텐트 첫째를 노, 놓치고 그 공작가 지하 감옥에 있다는 거 말이야.”

아, 그거. 그게 벌써 퍼진 걸 보니 공범이라도 있었나. 저 사건의 중심은 나였지만, 나는 모른 척 다시 물었다.

“마탑주님이?”

“어어. 어, 어젯밤에 납치하려다 실패하셨어. 원래는 데려와서 주술을 건 다음, 마, 마탑주님이 키울 생각이셨는데 난리 났지. 그런데 그게 처, 처음 본 마탑의 마법사 때문이라는 거야. 그래서 새, 새로운 얼굴은 괜히 불똥이 튀어서 다 으, 의심받고 있는걸? 마탑주 자리도 공석이 되고 공작가가 마탑한테 저, 전쟁이라도 선포할 기세라 다, 다들 기분이 안 좋거든.”

제자로 변장한 건 잘한 일이었다. 그리고 확실히 전쟁이든, 공작가가 원하는 보상을 내어주든. 벨리텐트 가와 일어나는 마찰은 피할 수 없을 테다. 마탑주가 납치하려 했단 정황이 확실하기에, 마탑에서 발뺌은 불가능했다.

“근데 무슨 주술?”

주술이라는 말이 신경 쓰여 떠보듯 묻자, 마법사가 신나서 술술 불었다. 의심이 완전히 사라지니 입이 쉽게 열린다.

“그, 그야 다른 사람들이 벨리텐트 첫째를 보고 공작 내외를 떠올리지 않게 하는 주술이지. 고, 고위 귀족이니까, 귀찮은 일에 휘, 휘말릴까 봐 그런다고 하셨었어.”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그렇게나 닮았는데 루블리안이 벨리텐트 핏줄인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거였다. 화를 인내한 나는 물컵 테두리를 매만지며 원래 캐내려던 걸 물었다.

“그렇구나. 아, 그런데 차원 이동이나 공간 마법 연구하는 마법사는 누구야?”

큰 사건을 전했음에도 별 반응이 없어서인지, 평이한 어조 때문인지 마법사가 눈가를 찌푸리며 나를 응시했다. 잘라냈던 의심이 다시 피어오르려는 게 보였다. 긴가민가한가 보다.

“원래 마법사가 사고 안 치는 거 봤어?”

루블리안이 말한 목록만 해도 몇 개인지 모르겠다. 툭 하면 신전에 쳐들어가 마법을 써, 일부러 사이렌을 울린다는데. 지금이나 그때나 별반 다르지 않을 테다.

“모, 못 봤지……?”

“그러니까. 게다가 난 마탑주님한테 딱히 감정도 없고 관심도 없어. 어떻게든 되겠지. 난 내가 할 일이나 할 생각이라. 그래서 알아, 몰라.”

설마 이것도 모르냐는 듯이 한심하게 바라보자, 발끈한 마법사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아, 알아! 48층의 벨틴 그놈이랑 마탑주님이 연구하셨어. 그, 그런데 갑자기 그런 쪽을 연구하는 사람은 왜 찾아. 미친 찰스는 그쪽이랑 전혀 과, 관련이 없는데.”

“몇 년 동안 그 밑에서 굴려져서 이제는 자립하고 싶거든. 그러려면 한탕 해야 하고. 지금도 잠 한숨 안 자고 날 굴리던 찰스를 잠재우고 오는 길이야. 한동안 조용할걸?”

무심히 답한 나는 원하는 정보는 다 얻어냈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여기 있을 이유가 없었다. 날 바라보던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 수 있지, 하고 수긍하고 있었다. 마법사 대부분이 극한의 자기주의에 또라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그나마 식당에 있는 놈들이 쓸만한 정보를 알고, 대화가 통할 것 같아서 온 건데. 추측이 맞아 다행이었다. 뒤에서 마법진을 만든 건 자신이라며 내 이름을 넣지 않겠다고 소리치는 걸 무시하며 48층으로 이동했다.

오른쪽 방과 왼쪽 방. 어느 쪽 방인지 물어보는 걸 잊은 나는 잠금 마법이 걸린 왼쪽 방문부터 열었다. 이어 방 주인인 마법사에게 찰스를 기절시켰던 것처럼 반격할 겨를도 주지 않고 바로 목덜미를 내려쳤다. 문이 철컥 닫히고, 하루 정도 잠든 채로 있게끔 슬립 마법을 걸었다.

책상 위에는 보고서와 서류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 옆, 책에는 ‘벨틴’하고 이름이 쓰여있었다. 50% 확률로 찍었는데 맞았다. 수고를 덜었다.

날이 밝기 전까지 연구 보고서와 여기 있는 책들을 다 읽으면 될 듯했다. 그래도 실마리가 나오지 않는다면, 마탑주의 방과 황궁 서고까지 뒤적여야겠다.

먼지 한 톨 없는 의자에 앉아 보고서부터 읽어내렸다. 보고서의 절반은 읽었을 무렵, 시간을 확인하니 어제 시녀가 온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어떻게 마법진을 그려야 할지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

벨리텐트 저택 내의 손님방으로 순간 이동한 나는 걸어놓았던 마법들을 거두었다. 시간을 딱 맞춘 건지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어리숙하고 순박한 마법사의 낯을 뒤집어쓴 채, 부러 인기척이 잘 느껴지게 움직이며 문을 열었다.

“잘 주무셨나요, 마법사님.”

“네, 좋은 아침이에요. 그리고 오늘도 시중은 들어주시지 않아도 돼요.”

“네, 알겠습니다. 각하와 마님께서는 바쁘신 관계로 혼자 아침 식사를 하셔야 합니다. 방으로 가져다드릴까요?”

기사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니, 어제처럼 세숫대야와 옷을 두고 방을 나선다. 씻고, 클린 마법까지 건 나는 옷을 갈아입었다. 어제 입었던 것과 다를 바 없는 부드러운 소재에, 활동하기 편한 옷이다.

“야.”

욕실에서 방으로 나오자, 이른 아침부터 찾아와 문에 몸을 기대고 있는 전속 마법사가 눈에 들어온다. 의혹을 품은 붉은 눈동자에 내가 담겼다. 피에 물든 것만 같다.

“왜 부르세요?”

“너 왜 계속, 으아악!”

그리고 폼을 잡던 전속 마법사는 아침을 가져온 기사가 문을 연 탓에 휘청거리다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쪽팔리는지 얼굴이 붉어진다. 아침부터 루블리안도 아닌 사람이 얼굴을 붉히는 광경을 보다니. 속이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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