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44)화 (44/112)

044. 루블리안과 과거 평행 세계 (4)

“생활 마법이 오랜만이라, 잠시 잊어버린 거예요. 감사합니다.”

충격적인 속도에 새삼스럽게 내가 얼마나 강한지 알게 된 나는 종이와 펜을 다시 돌려받았다. 동시에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얼마나 터무니없이 강한 건지도 깨닫게 되었다.

느릿느릿. 기억을 더듬듯이 느리게 수식과 고대 언어를 섞어 마법진을 그려나갔다. 직속 마법사가 그렸던 부분에 실수가 하나 있길래 그것도 고쳤다. 천천히 적어 내리다 보니, 사방이 조용했다. 마음에 드는 사람 한 명 없는 방 안, 이 고요한 정적이 마음에 들었다.

그 정적을 깬 건 다름 아닌 마법진을 그리는 내 손을 빤히 보던 유모였다.

“감사해요.”

앞뒤를 모두 자른, 느닷없는 감사 인사였다. 인사를 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는데. 마법진을 그려준 걸 감사하다고 하는 건가. 이런 내 의아함을 알아차린 듯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유모가 분유 냄새가 날 것만 같은 미소를 지었다.

“어제 저도 문 앞에 있었거든요. 도련님을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한참 어린 나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인다. “그러고 보니 인사를 안 드린 것 같아서요.”라며 말을 덧붙이기까지 하는데, 이쯤 되면 자연스럽게 의문이 든다.

……이런 유모 밑에서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대체 왜 그따위로 자란 거지? 저절로 갓난아기인 평행 세계 루블리안에게 향하려는 시선을 막고, 쑥스럽다는 낯을 꾸며냈다. 루블리안이 살살 애교를 피우며 여러 표정을 한 게, 이럴 때 도움이 된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어요. 어릴 적에 부모님을 잃어서, 부모님이 없는 기분을 잘 알거든요…….”

또다시 거짓된 이야기를 내뱉으며, 없는 취급하지만 존재하기는 하는 부모를 죽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어찌 보면 패륜이긴 하지만, 나도 그들에겐 없는 자식이나 마찬가지니, 상관없었다.

유모는 안쓰럽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런 눈빛을 받고 경계심을 풀려고 했던 거라 나는 괜찮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웃는 걸 못 하는 덕에 더욱 ‘괜찮은 척’ 같아 보였으리라.

몇 번 오가던 대화가 멈추고 다시 느릿한 동작으로 마법진을 그려나갔다. 이 지루한 작업은 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끝을 맺을 수 있었다. 1초면 되는 걸 한 시간이나 잡고 있었다니. 다른 마법사들은 매번 이렇게나 시간 낭비를 하고 사는 건지.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어서 그런지 유독 답답했다.

“지정자는 각하와 마님, 그리고 유모분과 시녀분으로 했어요. 제가 마법을 걸어 불가피하게도 저도 포함되고요.”

마법을 시전한 뒤, 기사를 바라보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처음보다 적대심이 줄어든 직속 마법사는 설렁설렁, 유모는 푸근하게 웃으며 내게 인사를 건넨다. 나는 예의 바르게 인사를 되돌려준 뒤, 기사에게 말했다.

“이제 서재에 가도 될까요?”

“네. 안내해 드릴게요.”

무슨 독종을 보는 눈을 한 기사가 움직였다. 한 번 봤었던 구조가 나오고, 서재 문 앞에 도착했다. 서재 역시 위치가 바뀌지 않았다. 문을 열자 보이는 장엄한 내부 또한 마찬가지였다. 책장 수만 조금 줄어든 듯했다.

두 번째로 봐서 놀랍지 않지만, 고개를 양옆으로 열심히 움직였다. 무릇 마법사라면 연구에 미쳐있기 마련이라, 새로운 지식을 탐구할 생각에 눈을 반짝이는 게 맞았다. 마탑에 갔을 때 봤던 맛이 간 눈을 기억해내며 따라 했다.

“마법 관련 서적은 이쪽에 있습니다. 저는 여기 서 있을 테니, 방에 가실 때 부르시면 됩니다.”

“저 때문에 계속 여기에 있는 건가요? 혹시 다른 일이 있다면 그냥 보고 오셔도 돼요. 저 어차피 몇 시간 동안 여기에만 있을 거라서요.”

상대를 배려하는 어투는 쉬웠다. 어릴 적, 부모에게 칭찬 한번 받아보겠다고 착한 아이인 척을 하도 해서 그랬다.

기사는 제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고개를 젓는 것으로 괜찮다며 의사 표명을 했다.

“네, 혹시라도 일 있으면 다녀와도 돼요.”

나도 더 권유하지 않고, 짤막한 말을 남기고 기사가 안내했던 책장으로 향했다. <마법의 기원1>, <마법에 재능이 있다고? 야 나두!>, <마법, 그 심오한 학문>, <마법을 배우고 싶어요>……. 그나마 저번에 본 주술 책보다는 정상적이었다.

이쪽은 대부분 기초고……. 커다란 책장을 둘러보며 나는 세계를 건너는 것과 관련이 있을 법한 책을 찾았다. 루블리안이 성공을 했으니, 이 세계의 여러 마법서를 보다 보면 뭔가 나올 터였다.

_oOo_

한창, 백시현이 스칼레인의 아기 납치를 저지하던 시각. 또다시 시현과 떨어진 루블리안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변덕스러운 신의 말을 믿으면 안 됐다. 거부할 수 없는 기운이 등을 떠밀었을 때 어떻게든 반항을 했어야 했다. 다시 세계를 쥐 잡듯 잡아 백시현을 찾아야 할 상황에 직면한 루블리안은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가, 예전에 훔쳤던 성물을 아공간에서 꺼내 패대기치며 화를 분출했다.

언제나 신전이 문제다. 신전이 일을 망쳐놓는다. 어릴 적부터, 정확히는 리안과 헤어진 이후부터 신전을 싫어한 루블리안은 소리라도 내지르고 싶었다. 이 짜증을 다 풀어내고 싶었다.

‘그 미친 새끼가 먼저 찾으면 안 되는데.’

본인 고유의 세계로 떨어진 루블리안은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상기하고는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저번에는 세계를 부숴서 신을 강제로 끄집어냈지만, 지금은 안 될 테다.

신이 거하게 사고를 친 자신 때문에 더는 난리를 쳐도 나오지 못한다는 말을 스치듯 전하고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이 신은 불평은 가득해도, 거짓은 입에 담지 않는다. 그걸 아는 루블리안은 바로 다른 세계를 엎어버리지 않았다. 그저 백시현의 고유 세계와 평행 세계에 들러 시현이 있는지 기운만 확인한 뒤,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탑 내로 이동했다.

“마탑주님?!”

“미켈, 시끄러워.”

“예에…… 가 아니라! 다신 안 올 거라고 하셨던 분이 왜……?”

마탑주 자리를 계승하고 떠난 루블리안이 나타나자, 미켈은 반갑기는 했으나, 당혹스러움이 컸다. ‘그’ 리안이 떠났다고, 눈이 돈 상태로 마탑주 자리를 내던지고 가버린 사람이 왜 여기 있단 말인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런 미켈을 바라보며 루블리안이 혀를 찼다.

“그 꼴도 보기 싫은 표정 짓지 말랬지. 사정이 있어서 왔으니 소란스럽게 굴지 마.”

루블리안은 남의 방에 침범해 놓고는 자기의 방이라는 마냥, 미켈에게 명령했다. 습관적으로 수긍하려 했던 미켈이 발끈하려다 말았다. 마탑주 자리를 버리고 떠나간 그 날과 같았다. 눈이 제대로 맛 갔다.

여기서 더 건드려봤자, 손해 보는 건 자신이다. 그 손해는 목숨일 테고. 미켈은 조용히 몸을 사리며 서류를 정리했다. 어째 루블리안이 떠나기 전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신전을 폭파하면, 제아무리 바쁜 신이라도 기어 나오겠지.”

미묘한 감상에 젖었던 미켈은 작은 중얼거림을 들고, 새끼손가락으로 제 귀를 후볐다. 아무래도 잘못 들은 것 같았다. 신전을 뭐?

고개를 돌려, 음산한 기운을 내뿜는 루블리안을 바라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절대 잘못 들은 게 아니다. 저 눈 돌아간 얼굴은 진심으로 신전을 폭파하고 싶어 하는 중이었다.

이 때문에 극심한 피로를 느낀 미켈은 진심으로 생각했다.

얼른 다시 가줬으면…….

_oOo_

차원 이동 마법진을 만들겠다고 다짐하고 책장에서 여러 마법서를 꺼낸 뒤로 그 자리에서 몇 시간이 지났는지 느낄 겨를도 없이 서적만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슬슬 꼬리뼈 부근이 아팠다. 정신을 차리고 창밖을 보니 하늘이 어둑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무리 찾아도 답이 없다. 벨리텐트 공작가의 서재는 넓었지만, 마법에 관한 서적들이 대부분 초심자용이었다. 낡은 고서도 꽤 있긴 한데, 이걸로는 세계를 넘는 마법진을 만들지 못한다. 평행 세계에서 스치듯 본 마법 서적이 없는 걸 보니, 그것들은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공작이 되고 난 이후에 사 온 책 같았다.

세계와 세계. 그것을 연결 짓는 건 뭘까. 보통은 그걸 이용하여 넘어가지 않나. 원초적인 것부터 하나씩 조사하며 둥그런 테이블 위에 더는 자리가 없어 아래까지 책이 침범할 무렵, 내게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마법사님. 저녁도 거르실 건가요.”

다가온 기사가 내게 물었다. 그녀는 내뱉은 말을 제대로 지켰다. 쨍하게 떴던 해가 어둠에 가려질 이 시간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책을 읽느라 뻑뻑한 눈가를 둥글게 문지르며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 저녁을 먹기에는 애매하게 늦은 시간이었다. 나는 읽고 있던 페이지를 확인한 후 책을 덮었다. 그러고는 책을 챙기며 물었다.

“방에서 간단하게 먹을 수 있을까요? 또, 이 책만 방에 가져가도 될까요?”

“네. 방까지 모셔다드리고, 저녁을 챙겨올게요.”

그 말을 들은 후, 쌓아둔 책들을 내버려 둔 채 기사를 따라 서재를 나섰다. 꺼낸 책의 양이 점점 불어날 때, 기사가 이미 정리는 나중에 시종이 와서 할 거라 이야기했기 때문이었다.

서재에서 손님방은 그리 멀지 않았다. 금세 방에 도착한 나는 들어가 테이블에 앉아 책을 펼쳤다. 아무래도 이 책도 꽝인 듯했다. 세계, 그 자체에 대한 정보를 찾기가 땅 파서 100원 찾기만큼이나 어려웠다.

손톱을 탁탁 치며 생각에 잠겼다. 평행 세계에 갔을 때, 금서는 따로 있단 듯이 말했으니, 내일 공작에게 슬그머니 물어봐야겠다. 다른 책은 더 없냐고.

슬슬 마탑에도 가볼 생각을 하는데, 노크 소리가 울렸다. 들어와도 된다고 허락하자, 문이 열리고 질질 트레이를 끌며 여전히 시녀인 척하는 기사가 들어온다. 그러고는 테이블에 간단한 음식을 두고 벽면에 붙는다. 다 먹을 때까지 가지 않을 모양새였다.

이번에도 신성력을 이용해 정화한 후, 음식을 입에 넣어 빠르게 씹었다. 왜 빨리 먹지. 라는 생각보다는 얼른 다시 책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 보일 터라 상관없었다.

밤이 깊었으니, 모두가 잠들 무렵 마탑에 갈 생각이었다. 그쪽은 이 시간에 더욱 활발할 터였다. 루블리안이 펑 터지는 소리에 밤에 잠을 못 잔다며 투정을 부리던 걸 기억하고 있는 덕이었다.

음식을 다 먹자, 기사가 왔을 때처럼 깨끗이 빈 접시를 트레이에 올려 나갔다. 드디어 혼자 있게 된 나는 어제와 같은 마법을 걸어 놓고, 내가 자는 것처럼 보이게끔 정교한 환상 마법을 사용했다.

그 후, 마탑으로 이동했다. 아마 전이랑 좌표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테다. 내 예상은 맞아떨어졌고, 루블리안이 말했던 것처럼 펑! 펑! 터지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렸다.

끝이 안 보이는 계단 한가운데로 이동된 나는 터지는 소리가 가장 많이 나는 곳으로 이동했다. 보통 방에서 터지는 소리가 많이 나는 마법사는 은둔하여 하나에만 몰두하기 마련이었다.

펑 소리가 끊이지 않는 방의 문을 허락도 없이 연 나는 방 주인인 마법사를 보자마자 기절시켰다. 빠르게 일어난 일이라, 누가 기절시켰는지조차 알지 못하곤 마법사가 축 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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