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 루블리안과 과거 평행 세계 (3)
이 세계에서 마법사는 귀중한 인력이다. 앞서 말했듯 수가 그리 많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그런 마법사들이 보편적으로 어려워하는 지정된 인물이 있는 마법을 무보수로 해달라니. 내 실력을 의심하면서도, 순박한 마법사를 등쳐먹으려는 속셈이 보였다.
이래서 귀족이 별로였다. 자칫 잘못하면 나도 모르는 새에 귀족의 손아귀에서 굴려지고 있다.
“어렵나?”
대답이 늦어지자, 양심 없는 유전자를 전해준 공작이 고개를 비스듬히 하며 묻는다.
까놓고 말하자면, 나는 어렵지 않았다. 수식과 복잡한 고대 언어를 사용할 필요 없이 손 한번 까딱하면 끝이었다. 용사인데 그 정도도 못 할 리가 있나.
그러나 지금은 용사가 아닌 순진한 마법사일 뿐이었다. 원래의 내가 아닌 연기 중인 마법사 시점에서 머리를 굴려야 했다.
나는 머뭇거리는 척 작게 입을 벌렸다가 닫기를 반복하다 자신이 없다는 투로 목소리를 내었다.
“할 수 있긴 해요. 그런데 완벽하지는 않을 것 같아서요. 제가 시간 마법만 몇 년을 연구하다 세계를 이동하는 마법을 최근에 연구하게 되었다고 했잖아요. 시간 마법에만 몰두했다 보니, 생활 마법이 조금 서툴러요……. 시간 마법을 인생의 절반 넘게 잡고 있었는데도 성공시키지 못할 만큼 실력이 막 좋다고도 못 하거든요.”
“흐음. 그렇단 말이지? 완벽하지는 않아도 좋아. 임시방편으로나마 해줄 수 있겠나?”
결국 어떻게든 등쳐먹겠다는 거다. 여기서 그래도 안 될 것 같아요, 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괜찮다면 해주겠다는 듯이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수프를 입에 넣었다.
공작은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식사를 재개했다. 공작 부인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안심하는 낯이다.
적은 대화가 오가는 식사는 공작이 “일이 있어 먼저 일어나 보지. 부인, 가십시다.”하고 말하는 순간 끝났다. 식당 끄트머리 벽에 붙어있던 시녀로 변장한 기사 한 명과 나머지들이 떠나는 공작 부부에게 인사했다.
나 또한 고개를 수그리며 인사하고는 편하게 음식을 먹었다. 먹고 나선 서재로 가 마법과 관련된 책들부터 확인해야겠다.
수프로 시작해서 고기까지 먹었다. 배가 불렀으나, 식탁에는 아직도 음식이 한가득 남아있었다. 남은 것들은 사용인들이 먹을 테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시녀인 척하는 기사가 따라붙는다.
“도련님의 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네? 저는 서재에 먼저 가려고 했는데요.”
“각하께서 마법사분이 식사를 끝마치면 도련님의 방으로 안내하라 지시하셨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언제 마법을 거는지 시간을 말하지 않길래 이렇게 허술할 리가 없어 의문이 들었었는데, 기사에게 일러두었다 이거지. 한마디로 통보였다.
멋대로 나를 주무르려는 게 불쾌했다. 그러나 내게는 들어준다는 선택지밖에 없었다. 이제 와 말을 바꿀 수도 없고, 이 세계에서 사고 칠 생각도 없으니 말이다.
쉽게 납득하던 알리를 떠올리며 그렇구나, 하는 식의 얼굴을 한 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수긍했다. 기사는 앞장을 서며 그런 날 안내했다.
드넓다고 여겨지는 복도를 걷고, 어제 그 납치범 새끼와 대면했던 방에 도착했다. 그 안에는 자그마한 체구의 남자 한 명과 나이가 든 듯한 여자 한 명이 요람 곁에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마법사님. 도련님의 유모, 다벤다라고 해요.”
“공작가의 직속 마법사, 튀르아.”
유모라고 한 이는 푸근한 얼굴로 미소 지었고, 직속 마법사라고 한 이는 껄렁한 몸짓으로 대충 인사했다. 직속 마법사가 보내는 적대가, 그저 사람이 좋아 보이는 유모 옆에 있어서 그런지 확연했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다 때려치우고 잠들게 하고 싶었다. 잘하는지에 대한 여부와 상관없이 연기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며 순박한 낯을 꾸며냈다.
“안녕하세요.”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아, 평민이라 성이 없어요. 리안이라고 불러주시면 돼요.”
생각해 보니, 여태 공작저에 들어와서 그 누구와도 통성명을 하지 않았다. 공작 부부도 내게 묻지를 않았고, 딱히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럼 뒷조사는 하지도 않은 건가. 어차피 신원 불명이라 상관이야 없지만.
평민이라는 말에 직속 마법사는 풉, 하고 비웃음을 터트렸다. 평민이라 트집 잡을 모양새라 벌써 귀찮다. 원래라면 내가 나서기도 전에 루블리안이 스태프로 머리를 깰 텐데. 잠시간 루블리안을 생각하던 나는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직속 마법사가 있는데, 왜 제가 마법을 거나요?”
직속 마법사가 있는데 내게 부탁한 이유는 두 가지로 짐작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내 실력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위험 분자인지 아닌지 판단하기도 쉽고, 쓸모를 판단하기에도 좋으니 말이다.
두 번째는 직속 마법사의 실력이 뛰어나지 않아서이다. 물론 지정자를 정하여 마법을 시전하는 것이 어려운 축에 속했으나, 공작가의 직속 마법사인데 이걸 못하면 조금 문제가 있지 않나. 그런 심정으로 이를 꽉 깨물고 얼굴이 붉어진 직속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네가 더 잘나서 그런 거 아니니까 착각하지 마! 고작 이런 쉬운 마법에 고급 인력인 나를 쓰지 않는 것뿐이라고!”
“그래요……? 소중한 아이를 위해 고급 인력을 쓰지 않다니. 요즘 바깥은 뭔가 달라졌나 보네요? 제가 다섯 살 이후로 마탑을 처음 나와서 잘 몰라요.”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순수하게 포장하여 돌려 깠다. 아무래도 실력이 형편없어 나에게 열등감을 느끼거나, 공작이 나에게 이 마법을 걸라고 시킨 게 마음에 차지 않는 것 같다. 길길이 날뛰는 직속 마법사를 뒤로하고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법사님? 바닥 말고 소파에 편히 앉아서 하세요.”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유모가 바닥에 앉은 나를 바라보며 소파를 지목했다. 바로 성공시켜버리면 실력이 드러나 곤란하니, 적당히 고민하다 바닥에 걸 생각이었는데. 유모는 그걸 몰라서인지 당황한 듯했다.
“헹! 평민이 그렇지, 뭐. 바닥이 잘 어울리네.”
직속 마법사는 털썩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고는 일어난 나를 비웃으며 노려보았다. 박시찬이 저 꼴을 봤으면 추르아 튀하다, 하며 어디 한 곳이 아픈 이를 보듯 안쓰러운 시선을 보낼 터였다.
그걸 좀 이용할까 했는데, 유모가 나섰다. 푸근하고 포용력 있는 얼굴이 순식간에 사납게 뒤바뀐다. 다른 인격이 있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튀르아!”
참다못해 소리 지른 모양이다. 자신이 뭘 잘못했냐는 듯이 당당하던 직속 마법사는 점차 기세를 줄였다. 이내 입술을 삐죽이며 서운하다는 티를 낸다.
“네가 뭘 잘했다고 서운해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듣다 보니, 루블리안의 유모는 저 직속 마법사의 엄마인 듯했다. 그녀는 ‘내가 너 때문에 정말 못 살겠다.’, ‘널 신임하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란 거 알잖아.’ 등등의 말로 다 큰 놈을 타일렀다.
용사가 되기 이전에 이 장면을 봤다면 서글펐을 테다. 내가 바라던 가족의 애정이 눈에 훤히 들어오니까. 그러나 지금은 저 공방전이 빨리 끝났으면 했다. 귀가 아프다.
“다벤다님. 이만하시는 게 어떨까요? 마법사님이 계세요.”
끝나지 않을 듯한 저 모자의 대화를 끊은 건, 시녀인 척하는 기사였다. 그녀는 조금 전과 다르지 않은 무표정으로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를 내었다.
직속 마법사의 등짝을 때리던 유모는 날 보고는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어머. 죄송합니다. 못 볼 꼴을 보여드렸네요. 튀르아. 너도 사과해.”
죄송하다는 표정은 얼굴이 직속 마법사에게 돌아가자마자, 매섭게 돌변했다. 윽, 앓는 소리를 낸 직속 마법사는 사과하기 싫단 뚱한 얼굴을 하고는 작게 “미안…….”이라고 했다. 다 큰 놈이 징그럽게 뭐 하는 건지. 속과 상반되게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하고는 소파에 앉았다.
“그런데 리안 님. 펜과 종이는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펜…… 하고 종이요?”
느릿하게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뜬금없이 펜과 종이가 왜 나오는지, 그 까닭을 모르겠다. 이런 내 모습을 보던 직속 마법사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너, 설마 마력으로 마법진 그려?”
그 한마디로 내 잘못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보통 마법사들은 종이에 펜으로 수식과 고대 언어를 이용하여 마법진을 그린 후 전개했다. 그 마법진을 머리에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익숙해지면 손짓 한 번으로 시전이 가능한 거였다.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마력으로 실타래처럼 얇게 뽑아 해결하거나, 마법진을 외운 탓에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아니요? 그렇게 강했으면 마탑주님한테 대를 들 수 있었겠죠. 얼른 마법을 건다는 거에 흥분해서 잠시 잊은 것뿐이에요.”
먼저 펜과 종이 이야기를 꺼내서 망정이지, 평소대로 했으면 큰 사달이 날 뻔했다. 평범하고 순박한 마법사의 길이 이렇게 험난할 줄은 또 몰랐다. 나는 유모가 전달해주는 펜과 종이를 받고 고민했다.
어느 정도 수준으로 느리게 마법을 전개해야 보통 마법사 취급을 받지? 내가 아는 마법사는 루블리안과 납치범 새끼밖에 없었다. 오래 안 건 루블리안이었는데, 그는 나보다 마법을 더 잘 사용했다. 마법 시전 속도가 나랑 비슷하니 참고가 안 됐다.
“뭐야. 너 기초도 몰라?”
펜만 잡고 아무것도 쓰고 있지 않으니 불쑥 직속 마법사가 끼어들었다. 내가 들고 있는 펜을 빼앗고는 수식과 고대 언어를 적는다.
아마 내가 허튼짓하지 않고 제대로 된 마법을 거는지 확인하기 위해 감시 차원에서 곁에 있는 것 같은데, 도움이 됐다. 일반적인 속도가 어느 정도인지 알겠다.
……그런데 이 속도면 다른 이랑 싸울 때 적다가 죽는 거 아닌가. 느려도 너무 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