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 루블리안과 과거 평행 세계 (2)
벗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돌아온 벨리텐트의 저택 침대에 누워 있으니, 잡생각이 많아진다. 루블리안은 어디로 떨어졌고, 신이 날 여기에 떨군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루블리안과 내가 떨어져야 할 이유가 있나. 그게 아니라면 단순한 변덕인가, 하는.
한낱 인간이 신의 뜻을 이해하기는 힘들다. 머리에 든 생각부터가 아예 달랐다. 말 한마디면 세계를 없앨 힘을 가진 자들이었다.
침대 끝에 있는 베개를 가지고 와 끌어안았다. 막막하다. 여기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어린 평행 세계의 그 미친놈을 살려준 거였으나, 세계를 넘는 방법을 언제쯤 찾아 실행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
벨리텐트 공작가의 거대한 서재. 그리고 마탑의 서재. 된다면 황궁의 금서 서고까지 뒤져야 할 판이다. 세계를 이동하는 것을 최초로 성공시킨 게 루블리안이기에, 지금은 성공시킨 사람도, 그 사례도 없다. 처음부터 다 내가 해야만 했다.
하필 용사 시절에 차원 이동 마법 쪽에는 부러 관심을 두지 않았던 터라, 더 오래 조사해야 할 듯했다. 진짜 큰일 났다.
루블리안이 날 찾아오는 건 괜찮았다. 주술 건도 다 해결이 되었으니 더 빨리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그러니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만나기 전에, 루블리안이 나를 찾아내거나, 내가 자력으로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우선 잠을 자고 일어나기로 했다. 한창 의심받는 와중에 돌아다녔다가는 좋은 꼴을 보지 못한다. 세계를 넘은 만큼, 힘이 강대해졌기에 날 이길 사람은 없지만 다른 세계에서 난리를 쳤다간 뒤처리가 귀찮아진다. 언젠가 돌아온 신이 시말서 이야기를 다시 꺼내며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건 방지하고 싶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암흑 속에 잠긴 기분이다. 피곤했는지, 금세 졸음이 몰려왔다. 잠에 빠지기 직전. 위협 거리가 될 만한 게 조금도 없긴 했지만,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언제 올지 몰라 마법으로 방 안에 누군가 들어오면 내게 알림이 오게끔 했다. 그러고는 빠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똑똑.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려오고, 부스스한 상태로 눈을 떴다. 넓은 창의 끝과 끝에 달린 쳐진 커튼 사이로 가느다란 빛줄기가 들어왔다. 한쪽 커튼을 잡아당기니, 아침인 듯 환한 빛이 눈을 덮쳐 질끈 감았다가 느리게 떴다.
푹 잔 걸 보니, 밤새 찾아 온 사람은 없는 듯했다. 실제로 걸었던 마법이 발동된 흔적 또한 없었다. 한 번 머리를 쓸어올리고, 다시금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환각 마법이 잘 걸려 있는지 확인했다. 이내 어제 걸어놓았던 마법을 거두고,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향하여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어제는 늦은 시각 탓에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시녀, 린네입니다.”
갈색 머리칼의 시녀가 두 손을 배에 올려놓고는 공손히 인사했다. 연 문을 잡은 상태로 나는 숫기가 없어 보이게끔 눈을 몇 번 깜빡거린 뒤,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각하와 마님께서 조찬을 함께 하시자고 부르십니다.”
“린네는 시중을 들어주러 왔나요?”
“네.”
“들고 온 세숫대야랑 옷만 주세요. 누군가한테 시중을 맡겨본 적이 없어 어색해서요…….”
예전에 데드리언이 민망하다는 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던 것을 상기하며, 최대한 따라 했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느낌이 어색하다. 원래 잘 웃지를 않으니, 웃는 연기가 가장 어려웠다.
“네. 그럼 안에 놔드리겠습니다.”
들어오겠다는 말에 문 앞에서 방을 가로막던 내가 비켜섰다. 들어온 시녀는 안쪽 욕실에 세숫대야를 가져다 놓고, 옷 또한 한쪽에 걸쳐놨다. 이후 방 앞에서 기다릴 테니, 준비가 끝나면 나오라는 말을 전한 뒤 복도로 나갔다. 문이 닫혔다.
기사를 시녀로 변장시키다니. 어지간히도 의심받고 있는 듯했다. 시녀처럼 굴지만, 조금씩 드러나는 각진 걸음걸이, 언뜻 비치는 손의 굳은살을 보면 모를 수가 없었다. 감춘다고 감춘 것 같긴 하지만, 3년이라는 시간은 내 눈썰미를 한층 키워버렸다.
세숫대야의 물로 세수를 한 나는 시녀로 변장한 기사가 가져온 옷을 보았다. 혼자 입기 편한 간단한 복장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바로 앞에 기사가 서 있었다. 습관인 건지, 기사의 묵직함이 담긴 채로 서 있는데 이 정도면 알아차리라고 떠먹여 주는 수준이다. 알아차리는지 확인하기 위함인가 싶기도 한데, 마탑주와 한패로 보고 있다 쳐도 이건 쓸모없는 짓이었다.
“따라오세요.”
그 말을 끝으로 앞장서서 걷는 기사를 따라갔다. 그러고는 순박하고 마탑을 들어간 이후로 나온 적이 없어 사회성 없는 마법사를 연기하기 위해 신기하다는 듯 두리번두리번하며, 저택을 살폈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공작일 때와 다른 거라고는 저택에 걸린 마법의 유무였다. 전에는 온통 비자연적인 마력이 저택을 감싸고 있었다면, 지금은 순정하기만 했다. 자연적인 마력만이 느껴졌다.
식당으로 가는 도중 사용인들의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지만, 그 역시 눈치채지 못한 척했다. 원래 마법사들은 대부분 마이페이스였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각하와 마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 네. 안내해줘서 고마워요.”
고개를 가볍게 꾸벅하고는 문을 열고 식당으로 들어섰다. 세로로 기다란 하얀 식탁 위에는 중앙에 일렬로, 띄엄띄엄 촛대가 있었고 그 외에는 온통 음식으로 채워져 있었다. 사람 셋이서 다 먹지 못할 양이었다.
“안녕하세요.”
“앉지.”
공작은 대답하며 고갯짓으로 자리를 가리켰고, 공작 부인은 인자한 미소로 고개를 숙였다가 올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체했다.
가리킨 자리의 의자를 빼내어 앉은 나는 둥근 접시에 담긴 수프를 기준으로 오른쪽, 왼쪽에 나열된 제각각의 나이프와 포크, 수저를 응시했다. 용사일 적, 예법을 배웠기에 당연히 뭐가 어느 용도에 쓰는지를 알았다. 몬트리오가 성심성의껏 가르치고, 루블리안이 개수작을 걸던 기억이 여전했다.
그러나 여기서 쓸 줄 알면 괜한 설정 오류가 난다. 내가 연기하는 순박하고 사회성 없는 마법사는 평민이라, 신원이 불분명한 것이니. 거기다 마법사는 수가 그리 많지 않아 평민이라도 좋은 대우를 받는 덕에 예법을 배우려면 배울 수야 있지만, 마법사 대부분은 하나에 미쳐있다. 예법을 배울 시간에 하나라도 더 연구할 작자들이란 거다.
“제가 마법만 연구하고 살았었던 터라, 예법을 몰라요.”
“그럴 줄은 몰라 배려하지 못했군. 미안하네.”
“아니요. 아니에요!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
알리가 놀란 표정을 지었던 걸 따라 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손사래를 쳤다. 아, 힘들다. 차라리 나중에 신이 시말서 쓴다며 우는 소리를 듣고, 이 저택의 모든 이를 잠재우고 돌아갈 방법을 찾을 걸 그랬나. 후회했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
신의 울음소리가 더 싫었다. 그 두통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업무가 과중할 공작을 잠들게 했다간, 외부로 어떠한 말이 나돌아다닐지. 그리고 공작을 찾아오는 사람이 생길지도 몰랐다. 오는 사람을 잠재우고, 또 잠재우다간 괜한 소문까지 날 테니 이게 최선이다.
결정을 내린 나는 제각기 놓인 수저와 나이프, 포크에 두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마치 뭘 써야 하는지 생각하다 결론을 내린 것처럼.
“예법을 몰라서 그냥 막 먹어도 될까요?”
“그러도록.”
공작의 말에 평민에게 가장 익숙한 큰 수저를 잡았다. 이어 몰래 신성력으로 수프를 정화한 후 떠먹었다. 자백제라든가, 무언가 들어있을 수도 있었다.
“어제 한 말은 모두 사실인가?”
“네.”
이미 정화해버려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직설적으로 묻는 걸 보니 맞은 듯했다. 용사 시절에 여러 가지 짓을 하며 구른 게 이렇게 도움이 된다.
“마탑에서는 주로 무얼 했지?”
“마탑에 들어간 이후로부터 최근까지 시간 마법에 관심이 생겨 연구하다 포기했어요. 세계를 이동하는 걸 다른 마법사가 연구한다는데 흥미로워서 동참하기로 했거든요.”
“허, 세계를 이동하는 방법?”
“네. 근데 이제 마탑에 돌아가기가 어렵게 돼서…….”
루블리안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던 걸 상기하며, 고개를 아래로 수그리고 말끝을 흐렸다. 차원 이동에 관련된 책을 살피기 위해 밑밥이었다.
“그렇다면 서재를 내어주지. 선조분들이 여러 분야에 관심이 많아, 마탑보다는 아니겠지만 찾아보면 책이 많을 테지.”
“정말인가요?”
놀란 표정, 놀란 표정.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최대한 눈을 크게 확장했다. 미약하게 서린 의심이 크기를 줄였다. 진짜 자백제라도 들어있었나 보네. 확실해졌다.
그러나 의심은 크기를 줄였을 뿐.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서재를 허락하는 것도 내가 움직일 사정거리를 줄여 감시하려는 의도일 터다. 명색의 공작이라는 작자가 순진한 마법사를 의심해 미안하다는 의미로 덜컥 내어줄 리가 없었다.
“그래. 안내는 오늘 그대를 안내한 시녀에게 해달라 하면 되네.”
“감사합니다!”
환히 웃는 건 제일 못한다. 그 때문에 양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루블리안에 대한 마음을 처음 자각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의 설렘이 눈동자에 생기도록.
다시 수저를 움직여 수프를 떠먹는데, 루블리안에게 신이 빗은 외모를 물려준 공작이 웃었다. 휘어진 눈매 아래 눈동자 속 애정이 아닌 의심이 있다는 것만 빼면 웃는 모습이 상당히 닮았다.
이렇게 닮았는데 어째서 루블리안이 벨리텐트의 출생이란 의혹설이 돌지 않았는지 의문이 든 순간, 공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신, 한 가지 청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나?”
“청이요? 제게요?”
“그래, 그대에게. 어제 보았던 내 아들의 방에는 원래 마법이 걸려있었네. 지정된 인물을 제외한 이가 방에 들어가면 경보가 울리는 마법이었는데, 어제 그 마탑주가 그걸 없애버려 난감하게 되었지 뭔가. 그대가 새로 걸어줄 수 있겠나?”
여전히 웃는 낯의 공작을 보며 생각했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양심이 없던 게, 유전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