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40)화 (40/112)

040. 루블리안과 첫사랑 (2)

느른히 소파에 기대어 있던 루블리안이 새까만 머리카락과 연갈색 홍채라는 말에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고는 혹시 잘못 들은 게 아닌지, 제 귀를 의심하며 다급하게 입을 뗐다.

“다시 말해 봐. 뭐?”

“예?”

“미켈, 너는 귀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나? 방금 한 말 토씨 하나 안 틀리게 다시 말해.”

바보 같은 되물음에 신경질을 낸 루블리안이 싸늘한 시선으로 미켈을 훑었다. 늘 듣던 말이라 아무렇지 않은 미켈은 “예에…….”하고 대답한 뒤 입을 열었다.

“그 용사가 보기 드문 완전 새까만 머리에 연갈색 홍채를 가지고 있더랍니다.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도 하는 것 같던데요?”

정말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말이었다.

루블리안은 잘못 듣지 않았다는 걸 세 번 정도 확인했다. 즉, 저 ‘다시 말해 봐.’를 두 번이나 더 했다는 거였다.

“마탑주님. 오늘은 더 진상이시네요.”

그리고 그걸 받아준 미켈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손에 있는 서류를 읽어내렸다.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다른 것에 집중하는 루블리안 탓에 마탑 내 서류는 대부분 미켈이 담당했다. 최종 결재만 루블리안이 하는 식이었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연갈색 홍채. 그 두 가지에 루블리안은 평소보다 예민해졌다. 관대하게 공격 마법 하나로 넘어가 줬을 진상이라는 말에 열 개의 마법진을 전개하여 공격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보호 마법을 펼친 미켈은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도 이런 일이 허다하여 보존 마법과 보호 마법을 걸어놓았기에 어디 상하거나, 부서진 가구가 없었다.

“미켈, 용사는 어디서 머무르는 중이지?”

방금 공격 마법을 날린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뻔뻔한 루블리안은 연신 검지를 두들겼다. 애꿎은 소파 가죽에 손톱자국이 남을까 걱정될 정도로 한 곳에만 집중해서.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쓸모없긴.”

“그 쓸모없는 사람이 마탑의 서류를 다 담당하고 있는데요. 파업해도 됩니까?”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 검지에 시선을 둔 미켈이 루블리안과 눈을 마주치자, 들고 있는 서류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그가 마탑 내에서 중요한 위치라는 걸 상기시키려는 행동이었다.

그 행동에 루블리안은 코웃음을 치고는 되물었다.

“될 것 같나?”

마탑의 마법사들에게 마탑주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물론 악용을 방지하기 위해 마탑주의 권한에도 제한이 있긴 했다. 그러나 그 제한에 서류를 보는 것은 없었다.

그러니 미켈이 파업하게 되는 순간은, 그가 이 세상에 없는 순간임을 뜻했다. 그걸 둘 다 잘 알았다. 미켈은 결국 또 “예에…….”하는 대답밖엔 하지 못했다.

“안 되겠네. 미켈, 당장 신전에 쳐들어간다.”

검지를 움직이던 걸 멈춘 루블리안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이어 로브를 챙겨입고, 부적처럼 가지고 있던 쪽지가 주머니에 있는지 확인했다.

정리된 듯 깔끔한 움직임을 보며 미켈은 저럴 줄 알았다는 눈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나 이성적이며, 뒤처리까지 깔끔한 인간이 늘 ‘그’ 리안하고만 연관되면 앞뒤를 가리질 않는다.

“이번에는 확신합니까? 용사가 찾던 분일 거라고.”

“글쎄. 이번엔 왠지 맞을 것 같긴 한데, 확신은 얼굴을 보고해야지.”

마탑주라는 자리에 오른 뒤로 루블리안은 계속해서 리안을 찾았다. 정보 길드에 리안의 외형 조건들을 제시하여, 조건에 맞는 모든 대륙의 사람의 보고서를 읽어내렸다. 그러나 리안은 없었고, 리안의 행방 찾기는 5년간 이어지고 있었다.

만일 용사였기에,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기에 그런 것이라면 찾아도 나오지 않은 게 이해가 간다. 그러나 과거, 평화롭던 세계에 잠시 용사가 왔었다는 건 모순적이었다. 납득이 되는 것과 되지 않는 것들이 루블리안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로브를 걸친 루블리안은 가서 확인하자는 마음으로 미켈을 바라보았다.

“마탑 잘 지키고 있어.”

집 지키는 개한테 하는 말이나 다름없었으나, 이 또한 익숙했다. 미켈은 당당하게 규율을 어기며 신전에 정보를 털러 가는 마탑주에게 고갯짓으로 인사했다.

그 고갯짓을 보기가 무섭게 루블리안은 순간 이동 마법을 사용했다. 새하얀 탓에 순결하다 여기질 만 한 신전 내부에 순식간에 도착했다. 마법이 사용됨을 감지하여 삐―, 하는 경보가 울렸다.

“또야? 마탑 새끼들이지, 이거?”

“물증이 없어서 잡질 못하네. 잡히기만 해봐라, 진짜…….”

쉬는 시간을 가지던 몇몇 성기사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루블리안이 여전히 투명화 마법을 사용 중인 터라, 경보는 꺼지지 않았다. 그들의 귀에 삐 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려댔다.

다른 곳으로 사라지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뗀 루블리안 우선 이례적으로 신전에 머무를 수 있는 손님 방을 찾아갔다. 용사가 있다면 바로 확인하면 되는 것이었고, 아니라면 신전 내부 사람에게 정보를 털고 정신을 휘저어 놓으면 됐다.

옆에 있는 것도 모르고, 경보를 울린 놈을 찾겠다고 다급하게 걸음을 옮기는 신관들을 비웃으며 루블리안은 느긋하게 움직였다.

신전에 간다고 했던 날, 리안이 사라져서 그런지 그냥 신전이 싫었다. 애초에 신 같은 건 믿지도 않았으니, 별다른 타격도 없었다. 루블리안은 그때를 떠올리며, 용사가 리안이길 빌었다. 누구에게 향하는지 모를 바람이었다.

이내 루블리안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계속 울리는 경보에 손님 방의 문 앞을 지키던 성기사 대부분이 화난 상태로 범인을 잡기 위해 움직였다. 그 탓에 경비가 허술해, 루블리안은 손쉽게 마법을 사용하여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위에서 쏟아지는 인공적인 빛을 그대로 받아 오묘하게 빛나는 새까만 머리카락. 그 밑에 따스한 연갈색 눈동자. 오뚝한 코와 작은 입술까지. 오밀조밀한 얼굴은 그때와 똑같았다. 리안이다. 일순 루블리안은 멍하게 신관 한 명과 리안을 응시했다.

“죄송합니다. 곧 해결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 들려서 물어본 것뿐이에요. 괜찮아요.”

“용사님……!”

감격한 신관이 리안의 두 손을 잡으려 했다. 그 장면을 목도하는 순간, 루블리안은 단숨에 정신을 차렸다. 지금 누가 누구한테 손을 대는 건지. 화가 치밀었다.

신관의 손목을 잡아 확 뒤로 잡아당기고 놓자, 신관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누구냐! 감히 용사님이 계신 곳을……!”

“시끄럽네. 잠들어나 있어.”

싸늘한 목소리를 낸 루블리안이 손을 휘젓자, 신관이 잠에 빠졌다. 방해꾼을 치운 루블리안은 이 방에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마법을 걸었다. 문을 두드리는 쾅쾅 소리가 거슬려 사일런스 마법까지 걸고 나서야 만족한 루블리안은 비로소 리안을 바라보았다.

“리안!”

“……누구세요? 그리고 지금 이게 무슨 짓이죠?”

반기는 기색이 완연한 경쾌한 목소리에 돌아오는 건, 경계심 짙은 단조로운 음성이었다. 리안은 굳은 얼굴로 루블리안과 쓰러진 신관을 한 번씩 눈에 담았다.

누구냐는 물음에 루블리안은 리안의 뒷말이 들리지 않았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제대로 숨은 쉬고 있나 싶을 정도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루도 빠짐없이 떠올랐던 연갈색 눈동자에는 그날 보았던 애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따스했던 눈이 시리게 가라앉고 있다. 경계심과 의심이 가득했다. 아는 체하는 자신을 처음 본 듯 모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모르는 척이 아니다. 저건 진실한 반응이었다.

반사적으로 손이 뻗어 나갔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차갑지만 보드라운 손이 아닌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리안의 움직임이었다. 리안이 손을 피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루블리안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의 낯이 이보다 창백해질 수는 없을 정도로 하얗게 질렸다.

왜 나를 피하지? 어째서 리안이 나를 모르지? 혼란스러움의 연속이었다. 의문이 끊이지를 않았다. 그 순간 뇌리에 스쳐 가는 것이 있었다. 하도 봐서 외워버린 쪽지의 문장이었다.

‘다음에 다시 만나면 먼저 리안, 하고 인사해줘. 다시 만날 내가 어색하더라도 잘 부탁해.’

마치 이럴 미래를 알고 있었다는 듯한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묘하게 이상하다 싶은 느낌이 있었지만, 이럴 줄은 몰랐다. 스스로 기억을 지운 건가? 어째서? 루블리안은 입가를 가리며 상체를 숙였다. 배신감인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감정들이 휘몰아쳤다.

그때 뺨에 차가운 손이 닿았다. 얼굴이 들어 올려지고, 지금 이 혼란을 초래한 이의 얼굴이 시야에 가득 찬다. 루블리안은 천천히 묘하게 앳된 얼굴을 훑었다.

방금까지 경계심이 가득했던 눈동자가, 시리기만 하던 눈동자가 따뜻해졌다. 처음 만난 그날과 같은 점이라고는 리안의 외형과 본질적인 상냥함뿐인데도, 그날과 겹쳐볼 정도로.

“괜찮으세요?”

리안의 목소리 하나로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봄꽃이 피어오르는 듯한 착각이 일어났다. 그날과 같은 깊고 따스한 애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저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한 순수한 걱정에, 경계심을 버리고 손을 내미는 저 다정함에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기억에 손을 댄 건지, 미래라도 보고 온 건지. 아직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리안이 리안이라는 건 변치 않아서, 무어라 확정 지을 수 없는 감정을 사그라트릴 수 있었다. 루블리안은 천천히 숨을 들이켜고 내쉬며 진정했다.

리안이 미래를 예견한 듯한 말을 쓴 쪽지를 전한 이유가 있을 테다. 그러니 천천히 그것을 알아내면 됐다. 조급해할 필요는 없었다. 앞에 있는 건, 결국 자신에게 애정을 내비치던 리안이었다. 루블리안은 그리 생각하며 슬그머니 쑥스러운 낯을 했다.

“네에.”

어쩌면 다시 한번 사랑에 빠진 낯이기도 했다.

_oOo_

신의 농간에 의해 홀로 어떤 공간에 떨어진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이 도저히 파악되지 않았다. 루블리안과 따로 포탈을 넘었고, 홀로 떨어졌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갔다. 그런데 어째서 조금 전까지 봤던 스칼레인이, 얼굴 하나 변하지 않은 말버릇 나쁜 루블리안의 스승이 갓난아기를 납치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쯧. 이렇게 빨리 들킬 줄은 몰랐는데. 운이 안 좋은 자신을 탓해라.”

그 말이 끝난 순간 재빠르게 움직이는 마력이 느껴졌다. 공격 마법을 펼치려는 게 보여 습관적으로 모조리 파훼하자, 그의 낯이 굳는다.

그 틈을 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스칼레인이 아이를 납치할 이유가 뭐가 있지. 게다가 아이를 납치해서 무엇을 하려는 거지. 같이 살려는 것도 아니, 잠시만. 같이 살아?

……설마, 그러면 저 갓난아기가 루블리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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