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39)화 (39/112)

039. 루블리안과 첫사랑 (1)

숲 한가운데, 어린 루블리안은 머리카락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결에 잠에서 깨어났다. 완전히 잠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멍하니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던 루블리안은 조금 더 있다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번화가에 있었는데, 내가 왜 혼자 여기에 있지?”

심지어 해가 이제 막 뜨고 있었다. 곁에 리안과 그 재수 없는 큰 셀턴도 없었다. 늘 보는 풀떼기와 우거진 나무들만이 시야에 비쳤다. 아무리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도 그뿐이었다.

나뭇잎이 바람에 술렁이는 소리를 들으며 어린 루블리안은 다리를 모아 팔로 감싼 채로 웅크렸다.

리안이 남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은 걸 알았다. 일부러 그 노인네를 이따가 풀어주냐고 물었을 때 따스한 눈에 스쳐 간 미안함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도 떠날 때 인사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이제 막 여덟 살이 된 루블리안은 우울하게 입술을 삐쭉였다.

큰 셀턴이 희희낙락하며 리안에게 치대고 있을 걸 생각하니 우울함은 금세 화로 변화했다. 번화가를 구경시켜준다고 했으면서 마법이나 걸고! 숲에 버리듯 두고 가버리고! 씩씩거리던 어린 루블리안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리안이 좋은데 미웠다. 큰 셀턴은 그냥 꼴 보기도 싫었다. 약간의 우울함. 그리고 분노에 젖은 상태로 어린 루블리안은 오두막으로 이동했다. 조금 더 해가 떠오르면 훈련을 또 해야 했다.

“왔느냐.”

오두막 근처였던 터라 빠르게 도착해 문을 여니, 노인네가 한가로이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오늘따라 그 모습이 유난히 보기가 싫었다. 저 상을 엎어버리고 싶었다. 아마도 잠깐 다디단 애정을 주고 사라진 리안 때문에.

어린 루브리안은 심통 난 낯으로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오늘 훈련 안 해.”

“어제도 쉬고, 오늘도 쉰다고 하면. 도대체 언제 하려는 게냐. 쯧쯧. 이 스승은 제자를 키우지, 돼지를 키우는 게 아니다. 굳이 땅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평생을 살고 싶은 거라면 말리지는 않으마. 그렇게 되면 큰 셀턴의 애인을 못 만나는 것뿐이니…….”

“애인 아니랬어! 그리고 다시 만나? 나한테는 아무런 말도 안 해줬는데?”

문 앞에 서 있던 어린 루블리안이 스칼레인에게로 재빨리 다가갔다. 그러고는 스칼레인이 든 찻잔을 빼앗아 테이블에 큰소리가 날 정도로 내려놓으며 대답을 촉구했다.

“어느 제자가 버르장머리 없게 스승의 찻잔을 빼앗아 가느냐! 예절 교육부터 다시 받아야겠구나.”

“싫거든? 그래서 뭔데. 빨리 말해 봐. 다음에 온대? 언제 온다는데?”

다시 찻잔으로 향하는 스칼레인의 손등을 찰싹 내리친 어린 루블리안이 눈을 반짝였다. 몇 번 발꿈치를 들었다가 내리기도 했다. 기대하고 있다는 걸 고스란히 드러내는 몸짓이었다.

스칼레인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묘한 낯을 하고는 물었다.

“널 숲에 내버려 두고 갔다. 그래도 큰 셀턴의 애인이 좋더냐?”

“애인 아니라고! 귀지 좀 파, 노인네야! 잠시만. 내가 숲에 있는 거 알았어? 아는데 제자를 데리고 오지도 않은 거야? 이 미친 노인네가 진짜!”

‘애인’이라는 단어에 한번. 숲에서 밤을 보낸 것을 알면서 내버려 두었다는 깨달음에 한번. 반응하느라, 그래도 좋냐는 말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어린 루블리안은 이번엔 찻주전자를 뺏어 들었다.

하필이면 저걸 빼앗아 드는군. 스칼레인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휘저었다. 두둥실. 찻주전자가 어린 루블리안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중으로 떠올랐다. 물론 이런 짓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닌지라, 아이가 찻주전자를 힘주어 잡고 있어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지는 못했다.

“빨리! 대답하면 줄 테니까!”

“예끼. 소리 좀 그만 지르고 예의 좀 차려라, 예의 좀. 네가 사람이냐, 짐승이냐!”

순식간에 스태프를 꺼내 아이에게 휘두른 스칼레인은 익숙하다는 듯이 피하는 어린 루블리안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반항하는 눈초리에 설핏 입가에 서린 미소가 진해졌다.

스칼레인은 공격을 피한 상이라도 주듯 입을 열었다.

“약속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

“…….”

“그래도 하나는 확실하지. 너는 큰 셀턴의 애인을 만날 것이다. 그러니 못난 제자는 주머니 속의 종이나 열어보고 훈련장에 먼저 가 있거라.”

또다시 애인이 아니라고 반박하려던 어린 루블리안이 눈을 크게 떴다. 찻주전자를 험하게 테이블에 올려놓고, 바로 주머니 밖으로 살짝 튀어나온 종이를 꺼냈다.

[안녕, 루블리안. 번화가 구경은 미안해. 일이 있어서 널 숲으로 이동시켜놓고, 가게 됐어. 다음에 다시 만나면 먼저 리안, 하고 인사해줘. 다시 만날 내가 어색하더라도 잘 부탁해. 잘 있어.]

정갈한 글씨체가 리안과 어울렸다. 어린 루블리안은 쪽지를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다. 인사 없이 떠났다는 생각에 들었던 우울함과 화는 대번에 사그라들었다. 자신에게 향하는 숨은 애정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현듯 들었던 ‘내가 싫어서 떠난 거면 어쩌지.’란 걱정까지도.

하얀 뺨이 발갛게 타올랐다. 백시현이 사랑하는 청명한 파란빛 눈동자는 죽은 식물이 옆에 있다면 다시 살려버릴 정도로 생기가 돌았다.

곧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제자를 보며, 스칼레인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정신 차려라, 제자야. 나는 그런 헤벌쭉한, 꼴 보기 싫은 얼굴을 하라고 한 적이 없다.”

“노인네는 내가 어떤 얼굴이건 신경 꺼. 마력만 없었으면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할 나이면서 한창 창창한 나한테 왜 그러지? 추하게 질투하지 마.”

어린 루블리안이 콧방귀를 뀌었다. 리안의 편지 덕에 기분이 좋았기에, 스승의 시비에도 언성을 높이지 않고 넘길 수 있었다.

“허……. 허, 참…….”

덕분에 스칼레인은 비교적 얌전한 반응에 탄식을 여러 번 내뱉었다. 딱 한 번, 그것도 잠시 보았을 뿐인데 저렇게 유순하게 만들다니. 역시 피와 살점, 그리고 머리카락을 채취했어야 했다. 그게 이렇게나 아쉬울 줄이야.

얼굴과 애정에 반해버렸다는 걸 모르는 스칼레인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며 안타까워했다. 이내 그는 안타까움을 접고, 행복해 쓰러질 것 같은 어린 루블리안에게 명령했다.

“쪽지를 닳게 할 게 아니라면, 당장 나가 훈련이나 하거라. 특별히 숲에 걸렸던 함정 마법을 싹 다 갈아엎었으니,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어제 못한 몫까지 하면 된다.”

“윽. 어제 못한 몫까지라니. 제자를 죽일 셈이야?”

“쯧쯧. 저 말버릇을 진즉에 뜯어고쳤어야 했는데…….”

스칼레인은 혀를 차며 말에 토를 달던 어린 루블리안은 흘겼다. 이어 찻주전자를 들어 찻잔에 차를 따라 한 모금 마시고는 어쩔 수 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큰 셀턴은 새로 건 함정쯤이야 쉽게 뚫어버릴 텐데, 고작 저 정도에 제자는 죽다니. 큰 셀턴이 아주 오-래오-래 애인의 옆에 남겠구나.”

특히나 ‘오래오래’의 ‘오’를 길게 늘이며 어린 루블리안의 승리욕에 불을 지폈다.

어린 루블리안은 바로 오두막을 나가, 함정 마법이 여럿 깔린 숲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스승이 일부러 저리 말했다는 건 알았다. 모르면 그건 머리통이 빈 거다. 그러나 저 말을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건, 스승의 한 말에 틀린 점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어린 루블리안을 꼬박 몇 년간 재회를 기다리며 스승인 스칼레인을 밑에서 굴렀다. 대련하고, 스태프를 휘두르거나 내려찍어 머리 깨는 법을 배우고, 마력을 자유자재로 다뤄 시전하지 못하는 마법이 없을 정도로.

독하게 마음먹고 훈련한 덕에 어린 루블리안은 열세 살에 마탑주가 되어 최연소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괴물과도 같은 성장 속도였다.

“미켈.”

“예에…….”

“왜 아직도 안 올까. 벌써 10년이나 지났는데 말이야.”

마탑의 맨 꼭대기 층인 마탑주의 방에서 이제는 어리다 표현하지 못하는 열여덟 살의 루블리안이 방만하게 다리를 꼰 상태로 소파에 몸을 묻고 있었다.

보좌관, 미켈은 루블리안이 마탑주가 되고 나서 하루의 수십 번도 더 듣는 물음에 지쳤다. 처음에는 성실히 답했지만, 그럴수록 번번이 공격 마법을 쏘아대는 탓에 그는 적당히 동조하는 게 정답이라는 걸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물론 그의 대답이 ‘질리신 게 아닐까요?,’ ‘새 사랑을 찾은 걸 수도…….’, ‘아예 잊어버리신 건 아닌가요?’ 등등. 긍정적인 게 단 하나도 없단 게 문제였다. 답변 모두 질리거나, 새 사랑을 찾거나, 잊었거나, 기억 상실에 걸렸다는 류였다.

답답한 나머지 루블리안은 마탑 전체에 이 내용을 주제로 설문 조사까지 했지만, 마탑에 제정신인 마법사가 있을 리가 만무했다. ‘사랑을 왜 인간하고 하죠? 마물하고 하세요.’, ‘전 눈깔과 혀를 사랑해요…….’, ‘현실 사랑은 쓰레기야!’ 같은 괴상한 답변만 되돌아왔다.

가장 무난한 건 ‘엔조이였나 보지.’라는 답변이었다. 그 밑에는 정성스럽게 원래 다들 재미 좇으며 살고, 진지하게 굴면 질린다는 말과 향락가의 위치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답변자의 제3의 다리는 부러졌다. 누구에 의해서 그렇게 된 건지, 마탑 내의 마법사 모두가 알았다. 그리고 그들은 생각했다.

웬일로 마탑주가 봐줬다고.

그만큼 마탑 내에서 루블리안은 미친 새끼, 미친개로 통했다. 바깥은 종종 황궁에 갈 때만 나갔기에 다행히 악명은 쌓이지 않았다. 그런 마탑주를 모시는 미켈은 마침 생각났다는 듯 말을 전했다.

“그러고 보니, 들으셨습니까? 신탁이 내려왔다더군요.”

“미켈, 너는 무슨 나랑 다른 시간대에 살고 있나? 몇 달 전 이야기를 지금 꺼내는 건, 무슨 의도지?”

한심하다는 눈초리가 미켈을 향했다. 저 취급이 익숙하여, 미켈은 하하 웃으며 넘겼다. 이어 본론을 언급했다.

“용사가 나타났다고 하더군요. 잠시 마탑을 나가 신전에서만 나는 약초를 훔쳐 오다 들었습니다.”

“걸렸나?”

“경보가 울리긴 했는데, 잽싸게 튀었느니 심증만 있을 겁니다. 제가 언제 증거를 남긴 적이 있나요?”

맞는 말이었다. 애초에 신전에 걸릴 자였으면, 마탑에서 내쫓고도 남았다. 고개를 까딱인 루블리안은 그래서? 라는 눈으로 미켈을 응시했다. 그러자 미켈이 둘밖에 없는데도, 굳이 비밀을 속삭이듯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 용사가 보기 드문 완전 새까만 머리에 연갈색 홍채를 가지고 있더랍니다.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도 하는 것 같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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