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8. 루블리안과 과거 세계 (15)
들려오는 목소리에 바라보자, 큰 키에 백발을 길게 늘어뜨린 남자 한 명과 그의 등 뒤로 복슬복슬해 보이는 분홍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보였다. 분홍 머리카락 남자의 등 뒤로 날개로 추정되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래도 천사인 듯했다.
“와……. 이르, 얘네 사실 신계의 아이들 아닐까? 얼굴이 어떻게 이렇게 생겼지?”
과거의 신으로 추정되는 이의 뒤에서 얼굴만 내밀고 있던 천사는 상체를 좀 더 옆으로 기울였다. 그에 따라 커다란 흰 날개도 함께 움직였다. 무겁지도 않은 지, 분홍 머리칼의 천사는 입을 작게 벌리고는 감탄사를 흘렸다.
“나엘.”
“신계의 신하고 천사만큼 외모가 미쳐서 그냥 한번 말해본 거야.”
“하아……. 속어는 되도록 자제하라 몇 번을 말했는데 듣지를 않는군.”
이르라고 불렸던 백발의 신이 이마를 짚었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는 표정이었으나, 에메랄드빛 눈동자에는 애정이 담겨있었다. 말썽꾸러기 취급을 하고 있지만, 그를 상당히 아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맥락상 이곳에 등장했으니, 신이겠지만 나는 확실히 하기 위하여 물었다.
“당신은 신이 맞나요?”
“아직 소개하지 않았었지. 난 현재 이 세계를 담당하고 있는 신이다. 신은 원래 진명을 알려주지 않으니, 다른 사람들처럼 신이라 부르도록.”
신이 맞냐는 질문에도 그는 불쾌해하지 않고 차분히 답했다. 과거, 이 세계를 담당했던 신은 현재 담당하는 신과 성격 차이가 극심했다.
그런데 서로 이르, 나엘이라고 부르지 않았나. 그렇다면 저 이름은 가명인가 싶었다. 혹은 애칭이거나. 천사와 신으로 구분하면 되니 큰 상관은 없어, 이름에 대한 것은 저 구석 한편에 박아두었다. 나는 가장 궁금했던 걸 묻기로 했다.
“네. 혹시 질문 하나만 해도 괜찮을까요?”
“응응! 내가 다 답해줄게~!”
신의 뒤에 있던 분홍 머리카락의 천사가 옆으로 나와 제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며, 손을 번쩍 들었다. 며칠 굶은 개가 개껌을 발견한 것처럼 눈이 과도하게 반짝인다. 왜 저렇게 흥분한 건지 모를 일이다. 왠지 모르게 못 미덥다.
신을 바라보자, 그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고개를 까딱인다. 항상 저렇게 활발하고 명랑한 건지. 이쪽은 이미 포기한 낯이었다.
“갑자기 신탁을 내리신 이유가 뭔지 궁금해서요.”
한 번도 보지 않은 인간에게 신이 도움을 줄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단순한 변덕인가 싶기도 했다. 아니면 불쌍한 인간을 굽어살필 만큼 자애로운 건가 싶기도 하고. 어쨌든 저들이 우리에게 협조해줄 이유가 없다는 말이었다.
우리는 신의 축복 및 가호를 얻지만, 신과 천사는 우리에게 얻을 것이 없다. 어린 데드리언에게 이야기를 듣고 난 뒤부터 조금씩 생각하고 있던 건데, 답이 나오질 않는다.
“아~ 그거? 별 건 아니고, 너희 이야기가 좀 흥미롭더라고.”
“……이야기?”
여태 조용히 신과 천사를 관찰하던 루블리안이 의아하다는 어투로 작게 읊조렸다. 나 또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분홍 머리칼의 천사를 응시하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신계의 일이라 자세히 알려줄 수는 없지만, 우리는 너희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다 알고 있어. 그래서 너희가 과거로 와 신을 만나려 하는 것도 알고 있었지. 그래서 너희의 모든 시간대가 흥미롭고, 재밌길래 내가 이르한테 조른 거야. 축복이랑 가호 다 주자고!”
분홍색 머리카락의 천사가 생글생글 웃었다. 저 천사를 보니, 확실히 인간과 다르다는 게 느껴졌다. 어떻게 하면 내 과거가 유흥거리인 것처럼 말할 수 있는 건지. 어릴 적의 기억은 대부분 나에겐 좋지 못했다. 아등바등 가족의 애정 한 줌을 얻겠다고 꼴사납게 굴었을 때였으니 말이다.
분홍 머리 천사는 걸음을 옮겨 내 앞까지 당도했다. 이어 기웃기웃 내 시야에 자신이 가득 담기도록 가까이 다가와 묻는다.
“더 궁금한 거 있어?”
“……지금 바로 걸어주실 수 있나요?”
“축복이랑 가호? 당연하지~!”
어디서 가져온 건지, 약간 뒤로 물러난 분홍 머리 천사는 팔을 접었다가 쭉 피면서 분홍 꽃잎을 날렸다. 뒤로 물러난다 해도 거리가 가까운 축에 속했기에 꽃잎이 얼굴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꽃잎으로 뺨 맞긴 또 처음이다.
“나엘. 왜 멋대로 허락하지? 축복과 가호는 네가 아니라 내가 거는 거라는 것 좀 명심해뒀으면 좋겠군.”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한 신이 손을 일자로 세워 분홍 머리 천사의 정수리를 툭 건드렸다. 때렸다나 쳤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약한 힘이었다. 이내 손을 거둔 신은 내 품에서 잠든 어린 루블리안을 손가락으로 지목했다.
“그 아이가 받을 테지. 여기에 눕혀.”
신이 말한 ‘여기’는 신과 천사가 나타났던 원형 위였다. 나는 신의 말을 따라 아이를 원형 위에 눕혔다. 아이는 여전히 새근새근 잘 자고 있다.
본인의 동의를 얻고 데려온 거지만, 무슨 납치범이라도 된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루블리안은 자고 일어나니 모든 게 끝나있었다고 했다. 그 무렵에는 우리가 이미 이 세계를 떠났을 터라, 일어나면 숲속에 혼자일 아이가 어떠한 기분을 느낄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빠르게 끝내지.”
무언가를 잡아채듯 신의 손이 매끄럽고 고아한 선을 그리며 허공을 휘저었다. 이어 양손을 맞부딪히며 손뼉을 치자, 섬광탄이 터진 것처럼 시야가 새하얗게 변했다. 동시에 아이가 있던 곳을 중심으로 몰아치는 바람과 거센 기운에 단단한 팔이 내 허리를 잡아당겨 끌어안았다. 점차 먹먹한 귀와 시야가 되돌아오고, 보이는 건 아까와 다름없이 잠들어 있는 어린 루블리안이었다.
신은 살짝 무릎을 굽히고 상체를 수그려 어린 루블리안의 이마에 손을 댔다. 일순 아이의 이마에 반짝거리는 빛과 함께 어떠한 문자가 새겨졌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잘 끝났으니 이제 돌아가면 되겠군.”
만족스러운 음성과 다르게 볼 일을 다 마쳤다는 무던한 태도였다. 우리도 마찬가지기에, 아이를 숲속으로 데려다 놓고 조용히 이동하려 했다. 그런데 불쑥 분홍 머리의 천사가 날개를 파닥이며 끼어들었다.
“짜쟌! 우리가 세계 이동 서비스도 해줄게!”
“……나엘.”
눈을 찡그리듯 감으며 신이 검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골치 아프다는 게 훤히 보였다. 상관이 위장약을 가지고 다녀야 할 것 같은 모습은 처음 본다.
“억지 좀 그만 부려라. 이들은 자의적으로 세계를 넘어왔기에, 우리가 다른 세계로 넘겨주려면 상부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거 알고 있지 않나.”
“당연히 알지. 그리고 주신님을 제외하면 상부의 우두머리가 이르라는 것도 모를 수가 없지. 원래 한 번쯤 일탈로 권력 남용 해보는 거랬어!”
알리와 맞먹는 해맑음이었다. 그나저나 신이 매일 욕하던 상부 중 우두머리가 저 신이었나. 나는 내 머리에 뺨을 비비는 루블리안을 익숙하게 내버려 두고는 신이 분홍 머리 천사에게 무어라 대답할지 구경했다.
“감히 누가 그런 말을…….”
“주신님이!”
“…….”
“주신님이 그랬다니까?”
분홍 머리 천사가 두 손의 검지로 신을 콕콕콕콕 찔러댔다. 대답 안 하냐는 뜻이 담긴 행위였다. 정말 싫다는 얼굴로 신이 입을 뗐다.
“……언제나 주신님이 하신 말은 옳지. 너무 정당해서 누가 말한 건지 물어본 거다.”
누가 보면 사약이라도 삼키고 있는 줄 알겠다. 나는 정리되어 가는 신과 천사를 보다가, 루블리안에게 말을 걸었다.
“우린 신이 데려다줄 것 같은데, 그 전에 어린 루블리안부터 집에 데려다주자.”
“좋아요. 잠에서 깰 때쯤엔 저희가 없을 테니, 시현이 쪽지 하나만 남겨줄래요?”
“쪽지를 받았었나 봐?”
“네, 그렇지만 무슨 내용인지는 안 알려줄 거예요.”
내 머리에서 얼굴을 뗀 건지 무게감이 사라졌다. 이내 루블리안은 내 허리를 감싸던 팔 하나를 풀고는 펜과 종이를 건네주었다.
쪽지를 쓰려고 하니, 마왕 토벌을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가 떠오른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고민한 시간이 길었다. 근데도 썼던 게 돌아간다는 말 하나였다. 지금도 썩 다르지는 않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기로 했다. 루블리안에게서 벗어난 후 계단 한 칸을 내려가 앉았다. 이어 펜을 잡은 손을 움직였다. 몇 자 안 되긴 했지만, ‘나 돌아가.’ 이 네 글자보다는 많았다.
“다 썼어요? 쓴 쪽지, 저한테 주세요.”
“여기.”
내가 건넨 두 번 접은 쪽지를 받은 루블리안은 아이에게로 향했다. 이어 쪽지를 잠든 아이의 주머니에 넣고, 순간 이동 마법을 시전했다. 어렸을 때부터 거기서 자랐으니, 숲 좌표를 정확히 알고 있는 듯했다.
“다 됐으면 둘 다 이리 와!”
그때였다. 활달한 목소리가 귀에 다이렉트로 꽂혔다. 폴짝폴짝이라는 의태어가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 만큼 분홍 머리 천사는 신났는지 점프를 하고 있었다.
그쪽으로 다가가자, 포탈이라고 불러야 할 것만 같은 입구가 있었다. 포탈 근처만 비정상적으로 무형의 기운이 흐른다. 공간과 공간을 가르면 이런가 싶은 느낌이었다.
“한 명씩 들어가야 해. 먼저 루블리안 셀턴부터 입장~!”
“난 같이 가고 싶은데? 어차피 나와 시현은 목적지도 같지 않나요.”
나긋나긋한 음성이 부드럽게 귀를 감쌌다. 내 어깨에 살포시 올라온 손에, 뒤를 바라보니 루블리안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원칙이라 안 돼. 자자, 루블리안 강제 입장!”
강제라는 말에 걸맞게 손짓 한 번에 루블리안이 반항도 하지 못하고, 무언가에 떠밀리듯 포탈 속으로 들어갔다. 분홍 머리 천사는 나를 보더니 더욱 화사하게 웃었다.
“재밌었어. 고마워.”
안녕.
무형의 기운에 등이 떠밀려 포탈 내로 들어가자, 보이는 건 저 입 모양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저 인사가 불안하게만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이동된 곳에는 루블리안이 없었다.
옹알이도 트지 못한 것 같은 아이를 납치해 가는 스칼레인만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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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따로 보냈어야 했나?”
“이편이 더 재밌잖아! 게다가 따로 안 가면 같은 곳으로 갈 텐데 그렇게 하면 미래가 바뀌니까, 이게 맞지.”
신, 프레이르의 질문에 천사 모습이던 신, 나타니엘이 대답했다. 프레이르는 납득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는 고난과 역경이 있기 마련이다.
“아, 프레이르.”
“나타니엘. 왜 부르지?”
“사실 아까 주신님이 말했다는 그거 거짓말이었어!”
그러나 그 고난과 역경이 자신에게 찾아올 줄은 몰랐다. 프레이르는 속은 자기 자신을 탓하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주신께서 관대하게 판결을 내려주시길 빌어야 할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