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37)화 (37/112)

037. 루블리안과 과거 세계 (14)

내 물음에 어린 데드리언이 신전을 떠나리란 확신이 서려 있어선지, 딱딱하기만 했던 얼굴이 일순 둥글어졌다가 빠르게 경직된다.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는 나갈 일이 없습니다.”

찰나였지만, 푸른 눈동자에 경계가 스쳤다. 신탁 때문에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 헤어지기 전,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니 당연했다.

손짓 한 번으로 막을 아예 거둔 나는 어린 루블리안을 추슬러 안고는 무릎을 굽혔다. 목이 아플 정도로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있던 아이 때문이었다. 신이 곁에 있었다면, 나답지 않게 상냥하다며 영혼부터 확인했을 짓이었다.

얼굴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무의식적으로 어린 데드리언이 목을 뒤로 뺀다. 그런 아이와 눈을 맞추며 운을 뗐다. 최대한 가볍고, 그냥 들려주고 싶었다는 듯이.

“내 친우가 신관이었는데, 신전을 정말 싫어했어.”

꽉 막힌 신관복이 싫다며 다 찢어놓고, 가벼운 옷차림을 하던 데드리언을 떠올렸다. 언젠가 한 번은 신발 없이 맨발로 숲속을 돌아다녀서 발에 상처가 나고도, 금세 치료하고는 웃던 데드리언이 떠올랐다. 그는 자유롭게 하늘을 비행하는 새를 연상시켰다.

“결국 신전을 떠나 같이 여행했는데, 엄청나게 행복해했어. 신전의 규율들을 무척이나 혐오했지. 자유로운 게 좋다고 아예 신전을 떠날 생각을 하더라.”

“…….”

“너처럼 신성력도 뛰어났어. 차기 교황으로 찍혔었다나.”

귀족이나 권력 구도 같은 것들을 몬트리오와 데드리언에게 배웠다. 그러니 차기 교황으로 거론되었었다는 걸, 심지어 역대 최고로 풍부한 신성력에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걸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입술을 일자로 다물고 더욱 표정을 굳힌 어린 데드리언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너도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어. 규율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왜, 저한테 그런 말을 해주시는 거죠?”

네가 내 친우라서. 말할 수 없는 진실한 속내를 아래에 처박았다.

경계와 간절함. 조화로워지지 않는 감정들로 혼탁해진 푸른 눈동자를 보며 미약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최근에 딱 한 번 웃은 것 빼고는 미소를 지은 적이 극히 드물어 올라가는 입술이 어색했다.

“내가 말했던 친우와 네가 닮았거든.”

“전 동정은 싫어요.”

딱 잘라 말한 어린 데드리언의 얼굴이 팍 구겨진다. 나는 아이에게 친절히 정정해주었다.

“동정이 아니야.”

이건 친애다. 동시에 나에게 여러 가지를 경험하게 해준, 다시는 보지 못할 친우에게 전하는 감사 인사이기도 하다.

내 목소리는 여전히 높낮이의 변화가 없어 무심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아이는 동정이 아니라는 내 말에 무언가 느낀 듯했다. 날카롭게 세우던 가시가 둥글어진다. 나는 마지막으로 미래를 아주 살짝 흘리기로 했다.

이건 과거의 일. 그러니 미래를 흘리는 건 위험하지만, 내 동료인 데드리언은 어릴 적 내 확언을 들었으리라.

내 사람만 챙기는, 이기적인 나에게.

아니라면 미래가 약간 틀어질 수도 있긴 하지만, 맞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친해진 후 데드리언이 괜히 나에게 덕분이라며, 고맙단 인사를 했을 리도 없었다. 그때는 무슨 의뭉스러운 소린가 했지만, 이제야 이해가 간다. 그간 있던 일을 되돌아보니 더욱 믿음이 생긴다.

신이 아닌 한낱 인간인 내가 예언과 가까운 확언을 입에 담았다. 여전히 고저 없어, 공허하다 느껴질 만한 목소리로.

“너는 내 친우처럼 될 거야. 동료도 생길 거고, 여행도 다닐 거야.”

“…….”

“또, 자유를 맛보겠지. 물론 고난도 겪을 테지만, 종내에는 행복해질 거고.”

행복해지려나. 사실 마지막 말은 모르겠다. 토벌이 끝난 후, 바로 원래 세계로 돌아와서. 저건 그저 내 소망이었다. 용사의 동료로 수고 좀 했으니, 편히 여행을 다니며 행복하게 자유를 누렸으면 하는.

마왕 토벌을 여행으로 바꿔 말하니, 사기꾼이 된 기분이긴 했다. 그러나 완벽한 미래를 흘리는 건 위험하기에 별수 없었다. 신탁처럼 적당히 감추는 두루뭉술함이 가장 나았다.

할 말을 다 한 나는 굽혔던 무릎을 폈다. 순식간에 키 차이가 벌어지고, 눈높이가 달라진다. 나는 어쩐지 마음에 안 든다는 낯을 한 루블리안을 흘깃 보다, 손잡이가 없는 문에 손을 댔다. 저절로 문이 열리는 장면을 눈에 담다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사고도 치고, 하고 싶은 건 다 해봐. 그리고 안내해줘서 고마워.”

“저기……!”

무어라 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우리는 하얀 섬광과 함께 이미 빨리듯 신탁을 받는 장소로 들어와 버렸다. 해주고 싶은 말을 다 해서 어련히 잘하겠지 싶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두뇌 회전이 빠른 데드리언이니 말이다.

아이에게서 신경을 거두고 눈앞에 놓인 장소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양 바닥에 30cm 정도의 길이로 일렬로 홈이 파여있으며, 그 안에 맑고 투명한 물이 담겨있었다. 일렬로 파인 홈 주변에는 알아볼 수 없는 언어가 금빛으로 반짝였다. 그 일렬의 홈이 멈추는 곳에는 세 칸 정도의 계단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신을 형상화한 동상 두 개가 얕게 원형으로 솟은 곳을 기준으로 대칭을 이루며 자리 잡고 있었다. 원형으로 솟은 곳 앞에는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하얀 비석이 존재했다.

역시 기시감이 들던 건 이유가 있었다. 여기는 처음 신과 만난 장소였다.

계단을 올라 원형으로 솟은 장소에 가면 신이 나타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다른 신이지만, 내가 용사로 발탁되어 꿈에서 신과 처음 만났을 때, 신은 저곳에 있었다.

“루블리안.”

습관처럼 손가락을 움직이다, 저기로 가자는 말을 하기 위해 루블리안을 돌아봤다. 그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어린 데드리언에게 말할 때도 불만스러워 보이더니, 뭐가 그렇게 걸리는 건지 모르겠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어떤 점이 마음에 들지 않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물어도 되나, 라는 의문이 언제나 자연스레 따라붙는다. 그럴 것이 우리에게는 이별이 예정되어 있으니까.

마왕 토벌할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예정된 헤어짐은 변함없이 우리의 곁에 맴돌고 있었다. 같은 세상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니, ‘함께’라는 건 불가능했다.

루블리안이 들으면 살살 애교를 피우며 평생 같이 살 거라 하겠지만, 세계의 규칙들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신의 축복 및 가호를 받았더라도, 균형이 한번 틀어지면 끝이었다. 거기다 욕망을 억누르다 한 번에 분출하면 마왕이 된다는 말도 신이 했으니, 뭐든 자기의 고유 세계가 아니라면 걸리는 게 많았다.

“시현, 안 물어봐요?”

어물쩍거리던 나를 알아차린 듯 루블리안이 삐진 투로 말했다. 말문을 터줬으니, 얼른 물어보라는 의사 표현을 확실히 한다.

나는 고민했다. 시치미를 뗄지, 매번 그랬듯 당기는 대로 끌려가 줄지. 누군가 내 행동을 본다면 답답해할 것이 분명했다. 서로 마음을 알지만, 예정된 이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눈 가리고 아웅 중이니.

대답이 늦어지자, 루블리안이 내 한쪽 손을 가져가 손바닥에 입술을 비벼댄다. 말랑하여 뭉그러지는 입술의 감촉이 지나치게 생생해 낯이 확 뜨거워졌다. 손바닥에 하는 가벼운 입맞춤까지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진득한 접촉은 아니었다.

손을 확 빼려니, 빼지지 않는다. 도리어 말랑한 감촉 새로 뜨거운 온도를 지닌 혀가 뭉근히 손바닥을 핥아 올리다 쪽쪽 소리를 내며 피부를 빨아올린다. 손가락 사이로 비치는 장난스럽게 휘어진 눈매 아래 맑은 눈동자에 열망이 가득했다.

“대답 안 해줄 거예요?”

입술이 손바닥에 닿아있는 탓에 뜨거운 숨결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대답하지 않으면 계속 이런 행위를 지속하리란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할 테니까. 우선 놔.”

“알겠어요.”

쪽. 소리 나게 입술을 붙였다가 뗀 루블리안이 내 손을 놔줬다. 손바닥이라 그런지 붉은 자국은 남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문제는 타액이었다. 원래 같았으면 클린 마법을 썼겠지만, 여긴 신전 내부였다. 마법을 사용해서는 안 됐다. 저기 물은 아마 성수일 터라, 닦기가 그랬다.

“아무 짓도 하지 않을 테니까. 잠시 손 좀 다시 주세요.”

불신의 눈초리로 루블리안을 바라보다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루블리안은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내 손바닥을 살살 닦았다. 아주 소중한 것을 만지는 듯한 손길이라,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당신은 어린아이가 좋아요?”

다 닦고 손을 놔준 루블리안이 물었다. 조금 전 어린 데드리언에게 왜 웃어준 거냐는 질문의 연장선이었다.

“별로 안 좋아해.”

“……정말요?”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너희라서 챙긴 거야. 용사일 때, 내가 다른 애들 놀아주거나 챙겨주는 거, 봤어?”

미심쩍어하는 루블리안에게 확실히 못을 박았다. 용사 시절 나는 저잣거리의 어린애들을 동정은 해도 이렇게 안아주거나, 직접적으로 예언과 비슷한 말을 해준 적이 없었다. 늘 내 곁에서 떨어지질 않던 루블리안이 가장 잘 알 터였다.

“아니요. 못 봤죠.”

“웃어준 것도 별 이유 없어.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어.”

그다지 큰 이유가 없었다. 정말 그냥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렸다. 루블리안은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저기로 가자. 도대체 신탁을 받는 곳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만일 신이 우리를 보고 있다면, 신성한 곳을 더럽혔다는 죄로 나타나지 않아도 할 말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입술 부비기에 아이를 안던 팔에 힘이 빠졌었다. 나는 아이를 다시 고쳐 안고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루블리안도 나를 따라왔다. 하얀 계단을 오르고, 둥근 원형에 발을 걸친 것과 동시에 루블리안이 내 뺨에 가볍게 입 맞추며 속삭였다.

“다음번에는 저한테 웃어줘야 해요.”

그에 무어라 반응할 겨를도 없이 낮고 울림이 깊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방인들. 남의 연애에 관심 없으니, 애정 표현은 다른 곳에서 하도록 해. 그나마 도를 넘는 행위는 하지 않아 다행이군. 여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게 들려오니.”

“한마디로 발랑 까지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말이야!”

이어 명랑한 목소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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