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 루블리안과 과거 세계 (13)
나는 살짝 무릎을 굽히고 상체를 숙였다. 내밀어진 작은 손을 내 손으로 덮었다.
“나는 리안이야.”
이어 내 소개를 했다. 이렇게 마주 보니 데드리언과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난다. 처음 다 같이 모였을 때, 서로 자기소개를 한 뒤부터 나를 왜 그렇게 뚫어져라 보나 했더니, 이래서였나.
시선을 돌려 루블리안을 올려다보며 그에게 잡힌 손을 아래로 당겼다. 너도 인사하라는 뜻이었다. 그러자 루블리안이 못 당하겠다는 듯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이현.”
앞뒤 다 자르고 정말 이름만 말한다. 불타는 인성의 소유자다워서 할 말을 잃었다. 저기에 그게 끝이냐는 말을 얹어봤자, 치댐만 돌아오리란 걸 알아 침묵했다.
루블리안에게 뗀 시선은 어린 데드리언에게서 멎었다. 아이는 다시 표정을 갈무리한 듯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이따금 지루함이 엿보일 뿐이었다.
“비밀 신탁인데, 이렇게 사람 많을 때 가도 돼?”
“네. 괜찮습니다. 들키지 않으면 되니까요.”
들킬 리 없다고 확정 짓는다. 우리를 믿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고 있었다. 데드리언은 어릴 때부터 머리가 좋았나. 그런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아이가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겠다며 맞붙은 입술을 뗐다.
“신탁을 내려받는 곳이 따로 있습니다. 신께서 허락하지 않은 이들은 문을 건드는 것조차 하지 못하나, 두 분은 신께서 부르셨으니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우선, 신전에 기도를 드리러 온 것처럼 입장하시고 왼쪽 복도의 화장실로 가시면 됩니다. 그곳 바닥 타일 중 흠이 난 것이 있을 겁니다. 그 타일을 떼어내면 제가 챙겨놓은 신관복이 있을 테니 갈아입으시고, 제가 올 때까지 기다리시면 됩니다. 중간에 걸릴 걱정은 놓으셔도 됩니다. 제게 함부로 말을 걸 수 있는 이들은 없으니까요.”
끝이라는 양 열렸던 입이 딱 다물린다. 대체 신탁은 언제 받았기에, 준비를 다 해놓은 건지. 신이 신탁을 내리며 좌측으로 가면 신관복이 안배되어 있다든가. 그런 소리를 할 리 없지 않은가. 과거인 이곳의 신이 현재의 신과 같다면 의심할 법도 하지만, 다르다고 그랬다.
“우리에 대한 신탁을 언제 받았어?”
“1시간 전입니다.”
호기심에 물은 질문에 대한 답을 듣자마자 생각했다. 데드리언은 어렸을 때부터 두뇌 회전이 빨랐구나, 하고. 이 신탁을 받은 자는 아이뿐인데, 다른 이가 작전을 짜고 준비했을 리도 없었다. 겨우 열세 살, 열네 살로 보이는데 대단하다 싶었다.
“질문은 이게 끝인가요?”
“이현. 더 물어볼 거 있어?”
루블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제 없으니,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아이의 무표정과 도를 넘은 차분함이 걸리긴 했으나, 뭘 묻기도 애매했다.
일방적으로 내가 데드리언을 아는 거니, 이 친밀감과 신뢰도 오롯이 나만 있는 것이었다. 갑자기 사적인 질문을 한다면, 아까처럼 이상한 사람 취급이나 받을 게 분명했다. 혹은 호기심 많고 오지랖 넓은 사람처럼 보이거나.
“그럼 같이 출발하시죠. 물론 신전에는 따로 들어갈 겁니다. 그리고 혹시나 모르실까 하여 말씀드리지만, 마법사시라면 마법은 사용해선 안 됩니다. 신전 내에서는 마법을 금하고 있으며, 탐지 광물이 신전 건물에 녹아있습니다.”
아이가 잡은 손을 당기고 발걸음을 떼며 말했다. 저건 신전의 규칙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었다. 신전에 안 가도 신전 규칙을 하나 말해보라면, 필히 저게 나온다. 혹시 모르니까 알려준 거라고는 했지만, 우릴 얼마나 문외한으로 보는 건지 알겠다.
그러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린 데드리언이니 말이다. 나는 문손잡이를 잡는 작은 뒷모습을 바라보다, 이끌려주던 걸 멈췄다.
“……?”
아이가 뒤를 돌아본다. 당겨도 내가 오질 않으니 의아한가 보다.
“일행이 더 있거든.”
침대를 가리키자, 어린 데드리언의 시선이 따라붙는다. 어린 루블리안이 고요히 잠든 모습을 본 아이가 침묵한다. 예상 범위에는 나랑 루블리안만 있던 것 같으니, 작전을 틀어야 할 테다.
“깨워주실 수 있으신가요?”
“글쎄…….”
마법으로 깨울 수는 있지만, 그렇게 되면 어린 루블리안의 불같은 성질을 감당해야 했다. 번화가를 구경시켜준다고 해놓고는 골목을 채 빠져나가기도 전에 마법으로 잠들게 해버렸으니 말이다. 물론 내가 아닌 루블리안이 그랬지만, 지금 어린 루블리안이 깨어난다면 둘이 싸우느라 시간이 지체될 터였다.
“조금 귀찮아지긴 할 텐데, 그냥 가자.”
“……네?”
무표정한 얼굴에 또다시 감정이 떠올랐다. 제대로 들은 게 맞냐는 듯한 황당함이다.
아이를 빤히 보다, 나는 크고 작은 손이 들어찼던 양손을 홀가분하게 만들었다. 다행히도 둘 다 쉽게 놔주었다. 루블리안은 마지막까지 놓기 싫은 듯 한 번 힘주어 잡았다가 풀어줬다.
“내가 다 해결할게. 너는,”
한 번 숨을 들이켜며 어린 루블리안보다 커다란 아이를 쑥 들어 올렸다. 이어 루블리안에게 넘겨주며 숨을 들이켜느라 멈췄던 말을 이었다.
“앞에서 신탁을 받는 그 방으로 가기만 해.”
여느 때와 같이 고저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멍한 눈으로 나를 보던 아이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침대에 있는 어린 루블리안을 들어 안았다. 원래는 루블리안에게 안으라고 하려 했지만…… 둘 다 끔찍이도 싫어할 것 같아서 포기했다.
“리안.”
“왜.”
“저는 속이 좁아터져서 정부는 안 돼요. 저도 지고지순하게 당신만 바라볼 테니까, 당신도 그래야 해요.”
헛소리 좀 그만하라고 하려 했는데, 망막에 비치는 루블리안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했다. 사뿐히 내려갔다가 올라가는 금빛 속눈썹이 만든 차양 안의 맑고 청명한 눈동자 역시 그러했다. 나는 또다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저딴 걸 진심으로 걱정하는 거야, 지금? 물론 나는 루블리안과 연애나 결혼을 할 생각은 없었다. 합법적으로 서로를 묶는 끈을 맸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리란 전제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내게 유일무이한 ‘사랑’이란 감정은 이미 루블리안이 싹 다 갈취해간 지 오래였다.
사람 마음이 변하는 건 한순간이라지만, 내가 내 목숨을 내어줄 만큼 본인을 좋아한다는 걸 이미 확신하고 있으면서 너무한 거 아닌가. 게다가 여긴 정부가 흔하지만, 내 세계는 아니었다. 나는 불륜을 저지르는 사람이 될 생각이 없었다.
“대답해주세요. 네에?”
맥이 빠져 대답을 하지 않고 있으니, 살랑살랑 봄바람을 이는 듯한 목소리로 종용해댄다. 그와 대조되게 나와 루블리안 사이에 있던 어린 데드리언은 싸함이 감도는 무표정으로 우리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얼른 이 싹을 잘라내야겠다. 나는 입을 열었다.
“너랑도 그 누구랑도 그럴 생각 없으니까. 헛소리 그만하고 신전 앞으로 이동하기나 해.”
그 누구랑도 그럴 일 없다는 것에 자신이 포함된 게 마음에 안 들어 보였으나, 이내 루블리안은 투명화 마법을 먼저 걸고 순간 이동 마법을 시전했다. 익숙한 울렁이는 감각이 몸을 덮친다. 환한 빛이 위에서 쏟아진다. 눈앞에는 웅장한 백색의 신전이 있었다.
“마법은 안 됩니다.”
“알아. 데드리언을 내려줘. 투명화 마법도 풀고.”
말하는 동시에 신성력으로 막을 만들어 둘렀다. 투명화 마법이랑 다를 바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이는 건 막에서 벗어난 어린 데드리언뿐이었다. 아이의 무표정에 금세 감정이 들어찬다. 놀란 듯 눈을 크게 뜨였다.
“이, 이게 무슨…….”
어리긴 하지만, 데드리언이니 보이리라 생각했다. 자연적으로 분포된 신성력으로 착각할 만큼 신성력이 미세하게 분포하여 면을 이룬 것이.
평행 세계의 데드리언이 소리를 차단할 때 신성력 막을 만들었듯, 용사 시절 데드리언도 당연히 가능했다. 물론 이 세계에서 나와 데드리언만 가능할 만큼 어려운 것이었다.
“안내해.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
잠시 소리 차단을 거두어 말을 전하자, 데드리언이 꿀꺽 침을 삼키고는 움직였다. 또다시 얼굴에 감정이 사라진다. 인형 같은 모습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때 바로 옆쪽으로 사람이 와 살짝 몸을 틀었다. 주의할 점 정도야 용사 시절에 하도 말해서 알고 있을 루블리안에게 조심하라는 의미로 한 번 더 말했다.
“사람 닿지 않게 조심해. 알지?”
“당연히 알죠, 시현.”
신성력을 막으로 만들어 두른 것이니, 닿으면 알아차릴 가능성이 컸다. 이래서 밤이면 사람이 없어 침입이 쉬우리라 여겼던 건데. 낮인 만큼 인파가 넘쳤다.
우리는 어린 데드리언을 따라 신전 내부로 들어갔다. 수도 내의 신전이라, 본격적으로 토벌을 준비하기 전 몇 번 와본 적이 있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그런지, 기억 속 신전과 달라진 점이 없었다.
지나가는 신관들은 데드리언을 보며 아무런 말도 붙이지 않았다. 몇몇은 무시했고, 몇몇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는 제 갈 길을 갔다. 아마 신성력이 뛰어나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원래 뭐든 뛰어나면 질투와 시기, 동경이 따라오기 마련이었다.
갈수록 신관이 없어지더니, 이제는 아예 없다. 탁탁. 아이의 발걸음만이 텅 빈 복도에 크게 울렸다. 이내 목적지를 향해가던 다리가 뚝 멈춘다. 아이의 앞에는 화려하고 장엄한 문이 있었다.
“제 역할은 여기까지이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어린 데드리언이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가 들어 올렸다. 역시 저 깍듯하고 감정 없는 낯이 거슬린다. 신발을 아무리 털어도 모래 알갱이가 빠지지 않는 기분이다. 데드리언의 풀어지고 자유로운 모습을 알기에, 저 모습이 눈에 밟혔다. 아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이대로 헤어지면 더욱 그렇겠지.
내가 아는 데드리언이라면, 지금 아무런 말을 하지 않더라도 끝내 스스로 신전에서 벗어날 터였다. 떠나갈 사람은 떠나가기 마련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를 내는 건, 그가 내 동료이자 친우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조금 더 빨리 자유를 맛봤으면 했다. 어울리지 않게 부리는 오지랖이라 보아도 할 말이 없었다.
“데드리언.”
마왕의 목을 베고 네가 했던 질문을 떠올린다. 더불어 돈만 받고 튈 생각이라던, 더 이상 신전에 묶일 생각이 없다던 너를.
“너는 신전을 떠난다면 뭘 할 거야?”
한없이 자유로웠던 너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