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35)화 (35/112)

035. 루블리안과 과거 세계 (12)

내 대답을 듣고도 루블리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지만. 나는 내 뺨을 붙잡은 손에서 벗어나, 지금 상황과 관련 없는 내 감정 논쟁을 멈췄다. 이어 원래 말하던 주제를 입에 담았다.

“그래서 걔네를 보낸 다음에는 뭘 했길래,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건데.”

“그쪽 아저씨도 저랑 엇비슷하게 상처가 났거든요. 거기다 저택 내에, 신성력이 있는 사람은 모조리 딴 곳으로 보냈으니까 치료하는 데만 해도 오래 걸릴 거예요. 저택도 다 무너지긴 했는데, 그쪽은 시간이 딱히 걸리진 않을 것 같아요.”

확실히 저택은 복구 마법을 사용하면 될 테니,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을 테다. 다친 곳을 치유하는 것과 나를 찾는 것에만 시간이 좀 들 것 같았다.

버릇처럼 손톱끼리 맞부딪혔다. 딱딱. 일정한 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창에서 들어오는 햇빛을 등진 채, 길게 늘어진 내 그림자를 밟고 있는 루블리안에게 물었다.

“신한테는 어떻게 축복 및 가호를 얻어내려고?”

“으음.”

난처하다는 듯이 눈썹을 아래로 내린다. 원래 같았으면 곧장 설명을 내놓았을 터였다. 설마 생각도 하지 않고 온 건가. 불현듯 불안감이 나를 덮쳤다. 나는 여전히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루블리안을 바라보았다.

“……아니지?”

“시현이 생각하는 게 맞긴 해요. 무계획이긴 하거든요.”

위로 솟아있던 눈꼬리가 아래로 축 처지자, 순한 낯이 된다. 슬그머니 뺨을 복숭앗빛으로 물들이며, 배시시 웃는 얼굴에 할 말을 잃었다. 자신 있게 신전으로 가자고 했으니, 당연히 방법이 있는 줄 알았는데. 지금 저게 무슨 망언인지 모르겠다.

이런 내 심정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듯, 루블리안이 탁탁 치는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걸었다. 이내 한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인지 살살 교태를 부린다. 그러나 어느 정도 어이없음을 가라앉힐 뿐, 아예 없어지지는 못했다.

나는 다른 쪽 손과 다르게 휑한 손으로 루블리안의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아야.”

마력을 실은 것도 아니기에 아프지 않을 텐데, 그는 일부러 앙살을 부렸다. 빨개지지도 않은 이마를 한 손으로 문지르며 나를 응시한다. 무언가 바라는 게 있는 눈이었다.

그러나 지금 잘못한 건 루블리안이었다.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내가 입을 싹 닫고, ‘많이 아팠어?’라는 예의상의 말도 내뱉지 않자, 그가 서운한 것처럼 말끝을 늘리며 어리광을 부린다.

“너무 아파요. 시현이 ‘호오’ 한 번만 해주면 나을 것 같기도 한데…….”

루블리안의 검지와 고리처럼 걸린 검지가 살랑살랑 앞뒤로 약하게 흔들렸다. 루블리안은 말도 안 되는 걸 해달라 하고 있었다. 나는 딱밤을 날렸던 손으로, 연분홍색으로 물든 보드라운 뺨을 잡아당겼다.

“누가 계획도 안 짜래.”

“그티만, 드러바여.(그치만, 들어봐요.)”

그리 세게 잡아당기지도 않았고, 한쪽만 잡아당겼음에도 불구하고 발음이 질질 샌다.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뺨을 놔준 나는 고갯짓을 했다. 설명하란 의미였다.

아쉬운 눈길로 뺨에서 떨어져 나간 손을 바라보던 루블리안이 입을 열었다. 낭랑한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든다.

“시현은 이 상황을 처음 겪잖아요, 그렇죠?”

“어.”

“근데 저는 어릴 때 이미 이 상황을 한 번 겪어봤잖아요.”

루블리안의 시선이 입을 헤벌린 상태로 세상 모르게 자는 어린 루블리안에게 향했다가, 도로 내게 돌아왔다. 바닷물이 찰랑거리는 듯한 눈동자에 오로지 나만이 담긴다. 설핏 그의 눈이 좀 더 완곡한 선을 그렸다.

“그 과거가 있기에, 제가 시현하고 만나는 거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는 어릴 적 제 기억을 따라가는 중이에요.”

“……그 기억에는 이렇게 계획 없이 번화가로 오는 것도 있었다?”

“지금의 제가 어린 루블리안을 잠재웠듯, 잠에 빠져서 계획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랬지 않을까 싶어요. 깨어났을 때는 모든 게 끝나있었거든요.”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추측일 뿐이었다. 확실한 방안이 없었다. 계획을 짜지 않고 움직였을 때가 극히 적은 터라, 이래도 괜찮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것에 관해 물어볼 만한 건 신뿐인데, 신은 루블리안이 친 사고 때문에 자리를 비웠다. 정보를 알아낼 구석이 없다.

“사실 여기도 어느 정도 부수면 신이 알아서 나오지 않을까 싶긴 했는데―.”

“루블리안. 여기 과거야. 눈에 띄는 짓은 줄여.”

“으응. 당신이 그렇게 말할 것 같더라.”

반달로 눈을 접으며 웃은 루블리안이 얽힌 검지를 당겼다.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게 되자, 이내 품 안에 갇힌다. 두 팔이 나를 안정감 있게 끌어안았다. 따뜻한 체온이 나를 감싸고, 산뜻하면서도 시원한 루블리안의 체향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아까 운 것도 있고, 내가 잘못한 점도 있었기에 이번만 눈감아주기로 했다. 벗어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적당히 윗옷의 아래쪽을 양손으로 부여잡았다.

……그런데 얘는 대체 어떻게 신에게 축복과 가호를 받은 거지? 문득 의문이 든다. 툭 하면 신 부르겠다는 이유로 세계를 파괴할 생각이 가득인 앤데, 어떻게 받은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그만큼 과거의 신이 괴짜인가 싶기도 했다.

뭐가 됐든 신을 만나야 하는 건 사실이라, 다시 머리를 굴리려고 할 때였다. 똑똑. 깔끔한 노크 소리가 두 번 울렸다. 그것도 문 아래쪽에서.

탐지 마법을 쓰니, 문 앞의 인물은 아이가 확실했다. 대략 어린 루블리안쯤 되는 아이였다. 묘하게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기도 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나가보려는데, 루블리안이 날 놓아주지 않았다.

“놔.”

“으음. 놓기 싫은데…… 이 상태로 갈까요?”

“이 꼴로 뒤뚱뒤뚱 걷자고?”

진심인가, 저거? 어이없단 투로 말하자, 루블리안이 사르륵 눈을 더욱 접었다.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푸른 눈동자는 진심이 아닐 리 있냐는 물음을 담고 있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놓으라는 말을 재차 하려는데, 루블리안이 선수를 쳤다.

“그런데 시현. 혹시 방금 한 말 다시 해줄 순 없어요?”

이번에는 무슨 말에 꽂힌 건지. 방금 한 말에 꽂힐 만한 게…… 뒤뚱뒤뚱인가. 전부터 루블리안은 내가 말한 것 중 어감이 마음에 들면 나 보고 몇 번 더 반복해서 말해달라 했었다. 대부분 입술이 둥글어지는 것들이었다.

“없어. 그러니까 얼른 놔.”

“소리가 안 들리는 걸 보니, 그냥 간 게 아닐까요?”

놓기 싫다는 말을 돌려 말한다. 루블리안은 나를 더욱 꼭 끌어안으며 놓아줄 의지가 없다는 걸 표했다. 그러나 어이가 없는 점은, 저거다.

“네가 마법을 썼으니까 안 들리지.”

루블리안을 나무라며 문을 향해 손짓하자, 탕탕탕탕!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문이 쉴 새 없이 떨리던 것과 습관적으로 읽어버린 마력의 흐름 탓에 모를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말한다. 놔.”

애초에 제대로 속일 생각도 없었으면서. 이건 떨어질 걸 알기에, 붙어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려는 수작일 뿐이었다.

얌전히 나를 놓아준 루블리안은 대신 깍지를 껴왔다. 풀려고 하니, 애처로이 눈을 깜빡이며 미인계를 쓴다. 결국 한 손은 내어주고, 아까보다 커진 탕탕탕탕! 소리가 들리는 문을 열었다. 열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싱그러운 물빛 머리카락과 눈동자였다.

……데드리언?

“신께서 신탁을 내리셨습니다. 잠시 들어가, 그 신탁을 설명해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그리 말하는 아이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자그마한 감정도 담기지 않았다. 목소리조차 차분하고 고요했다. 똑똑 두드리다가 문이 안 열리니 거칠게 쾅쾅 두드린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은 분명히 데드리언이다. 익숙한 기운을 감지한 것도 아마 데드리언이기 때문일 듯한데. 나는 우선 옆으로 자리를 비켜, 아이가 들어올 자리를 만들었다.

“감사합니다.”

새하얀 신관복은 기장이 길었다. 아이가 걸을 때마다 바닥에 옷자락이 질질 끌렸다. 방에 아이가 들어온 뒤에는 문을 닫았다.

아이는 들어온 자리에 그대로 서서 입을 열었다.

“신께서 은밀히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다물라 하셨으니, 다른 분들이 이 신탁의 존재를 알게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제 세례명을 걸고 약조 드립니다.”

푸른 물빛 눈동자가 공허했다. 영혼이 있되, 없는 느낌이었다. 데드리언임이 거의 확실한 아이는 본인의 삶을 사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감정이 없었다.

은연중 데드리언은 어렸을 적에 사고뭉치처럼 자랐으리라 생각했는데. 상상과 너무나 달랐다. 생각해 보면 언제나 데드리언은 신관을 때려치우고 싶어 했다. 자의로 신관이 된 게 아닌가? 내 동료인 데드리언의 과거여서 그런지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신탁, 듣지 않으실 건가요?”

말없이 빤히 응시하기만 해서 그런지, 아이는 대답을 요청해왔다. 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신탁을 듣겠다는 의사 표명을 했다. 하필이면 신을 만나야 할 시점에, 우리에게 비밀스레 전해지는 신탁이 내려왔다, 라. 타이밍이 참 공교로웠다.

“들으라, 나의 아이들아. 내, 너희들이 나를 영접하고 싶음을 안다. 무엇을 바라는지도 안다. 나의 아이 중 현명하고, 강대한 힘을 지닌 아이를 보낼지어니. 그 아이를 따라 나의 공간으로 오너라.”

우리에게 주어진 신탁은 끝이라는 듯이 아이의 입이 굳게 닫혔다. 한 발자국 움직여 내게 더욱 가까워진 아이가 손을 내밀었다.

“신의 말씀은 절대적입니다.”

거절은 안 된다는 말이었다. 보면 볼수록 내가 알던 데드리언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자유를 꿈꾸고 활달하게 움직이던 그와 달리 어린 데드리언은 거대한 힘에 속박되어 있었다. 스스로 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갈게. 그런데 네 이름은 뭐야?”

푸른 눈동자가 동그랗게 뜨였다. 마치 이름을 물어볼 줄은 몰랐다는 듯이. 처음으로 감정을 내비친다. 나는 아이가 대답할 때까지 천천히 기다렸다. 이 이상한 사람은 뭐지? 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봄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미심쩍게 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데드리언입니다.”

기다림 끝에 나온 이름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내게 친숙하고 소중한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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