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34)화 (34/112)

034. 루블리안과 과거 세계 (11)

대답 없이 루블리안을 이끌고 가려니까, 안 가려고 버틴다. 환하게 웃는 낯이 이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한숨을 한번 내쉰 나는 그가 원하는 말을 들려주었다. 기어코 내게서 답을 끌어낸다.

“너 때문에 그런 거니까. 미친 짓거리 한다는 소리 말고 안내나 해.”

“알겠어요, 시현.”

방금 미친 소리를 한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양 사근사근 답한 루블리안의 뒤로 하얀 백합이 피어오르는 착시가 일었다. 그것만으로도 지금 그의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었다. 자신만 신경 써 달라고 울던 놈은 확신을 얻자, 곧 날아갈 듯했다.

날아가도 신계에서 쫓아낼 것 같지만. 특히나 내게 붙어있는 신이.

신전은 밤에 침입한다고 하니, 한가로이 번화가를 거니는 기분이다. 게다가 루블리안이 곁에 있다 보니 팽팽하던 긴장감은 어느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언제 올지, 어떻게 나올지 모르기에 한시가 급한데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나타날 경우의 수를 가늠하며, 그저 잡힌 손이 이동하는 대로 따라 걷는데 불쑥 애교스러운 음성이 귀에 자리 잡았다.

“시현, 걱정 안 해도 괜찮아요.”

내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다 안다는 얼굴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할 걱정은 한정적이니, 알 수밖에 없을 테다. 그런데 알면서 걱정 안 해도 괜찮다는 건 무슨 말인지. 평행 세계에서 어떠한 일을 하고 온 건지에 대한 의문이 더욱 부피를 키웠다.

길 한복판에서 물을 만한 건 아니었지만, 그 내용을 누가 들어도 큰 타격은 없었다. 평행 세계에서 일어난 일이라 알 사람도 없고, 적당히 생략할 건 생략하면서 말할 테니 설령 누가 듣는다 해도 무슨 의미인지 모를 것이다. 거기다 사람들 소음에 알아서 묻힐 터였다.

그리 생각했으나 혹시 모르니 방음 마법까지 걸고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으음. 거기서 한바탕하고 왔단 말? 이제 곧 여관이에요. 들어가서 말해요.”

달랑달랑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며 루블리안이 웃었다. 그 말을 한 뒤, 몇 발자국 가지 않아 발걸음이 뚝 멈췄다. 정말 가까운 거리에 여관이 있었다. 눈대중으로 여관 외부를 훑었다. 예상보다도 깨끗하고 좋았다. 신전 근처이면서, 다른 곳에 비해 관광지로 발달한 곳이니 숙박업소가 안 좋을 리 없긴 했다.

그런데 우리 둘 다 돈이 없지 않나.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 루블리안이 아공간에서 돈을 꺼냈다. 이어 알아서 말을 트고 돈까지 낸 다음 방을 얻어냈다. 당일 오후에 방을 잡는 것이라, 방이 남아있을지 고민했는데 그럴 필요도 없어 보였다.

8번이라 쓰인 키를 받고, 계단을 올랐다. 계단은 삐걱거리는 소리는커녕 매끈하기만 했다. 두 층을 오르자, 문 위에 써진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갈수록 숫자가 커졌다. 나와 루블리안은 8번 방 앞으로 향했다. 이내 루블리안이 손잡이의 열쇠 구멍에 열쇠를 꽂고 돌렸다.

달칵. 잠금이 풀리고 문이 열리자, 커다란 창문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너머에는 조금 전까지 있었던 거리가 보였다. 방음이 강한 듯 바깥소리는 일절 들리지 않았지만, 보이는 움직임만으로도 활달한 기운이 여기까지 느껴진다.

“방은 왜 하나로 잡았냐고 안 물어봐요? 역시 저랑 같은 방 쓰고 싶었던 거죠?”

온전히 방에 들어가지 않고, 그 앞에서 내부를 둘러보던 루블리안이 나를 뒤에서 끌어안고 하는 소리는 늘 그렇듯 영양가 없었다. 매일 헛소리, 개소리, 되지도 않는 소리로 치부 당하면서 참 끈질기다 싶었다. 그 끈질김 때문에 종내에는 좋아하게 된 거지만.

“저녁에 나갈 건데, 쓸데없이 두 갤 잡는 것보다 하나가 낫지.”

“으응. 나가기 전까지 저랑 쓰고 싶었다는 거죠?”

귓가에 말캉한 감촉이 내려앉고, 숨결과 목소리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익숙한 짓은 내버려 두고 한숨을 내쉬었다. 또 자기식대로 해석한다. 말이 통하질 않아, 대화를 나누는 의미가 없었다.

여기서 그게 아니지 않냐는 내지의 반박을 해봤자였다. 루블리안에게 말려들어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하다가 시간을 날릴 게 분명하다.

“문이나 닫아.”

짧은 일축에 부드러운 감촉이 귓등에 내려앉았다가, 떨어졌다. 쪽 소리가 나는 건 덤이었다. 반사적으로 귓등을 감추듯 손으로 덮으며 뒤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하지 말랬지.”

“뭘요?”

나를 앞으로 더 보내며 루블리안이 눈웃음을 쳤다. 도톰하게 솟은 애교살이, 가느스름하게 휘어진 눈매가, 그 사이로 보이는 반절은 가려진 맑은 눈동자가 새겨지듯 망막에 가득 찬다. 절로 짜증이 가라앉는다. 신경질을 낼 수가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나는 루블리안의 미인계에 무력화되었다. 자신의 강점을 알고, 능란하게 이용하는데 도가 텄다. 늘 느끼는 거지만, 샐샐 웃으며 날 휘두르는 게 여우가 따로 없다.

내 허리를 감싼 손 중 한 손이 문을 닫을 때, 다른 쪽 손을 들추고 루블리안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곧장 침대로 가 아이를 눕혔다. 풀어진 낯으로 입을 오물오물 움직인다. 자는 모습이 천사 같았다.

아이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이 방에 방음 마법을 걸었다. 이어 닫힌 문에 기대어 꿀에 절인 눈으로 날 바라보는 루블리안에게 의문을 표했다.

“아까 한바탕 했다는 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의 의미인데요. 음, 시현이 떠나가고 난 뒤에 다른 놈들은 죽어도 이상하질 않아서 딴 세상으로 보내고,”

“너 걔네한테 악감정이라도 있어?”

드물게 말을 자르며 묻자, 루블리안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정말 뭐가 잘못된 것인지 모르는 순한 얼굴이었다. 저 표정은 지어낸 것이 아니었다. 진심이다, 저거.

“자기 세상이 아닌 곳에 가면, 어떻게 되는지 너 알잖아.”

심지어 셋이 같은 세상으로 갔다고 하면 더 답이 없다. 용사의 동료였던, 능력치가 뛰어난 이들이 다른 세계로 함께 넘어가 마왕이 된다고 가정하면 이보다 끔찍할 수가 없다. 게다가 그들을 처치하라고 신이 또 날 소환할 수도 있었다.

내 말에 자기의 고유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 가면 대부분 마왕이 된다는 걸 잊고 있었던 듯 루블리안이 짤막한 탄식을 내뱉었다. “아” 하고.

그보다 더 큰 반응을 내비친 건 오히려 신이었다.

[와, 아니, 아니……! 이건 아니죠! 미치겠다. 어떡하죠, 시현? 우선 지금 당장 제가 담당하는 세계들 좀 둘러보고 올게요. 셋이 한 세계에 떨어지면 거기 멸망해요! 상층부가 허가 내려주면 괜찮을지도 모르긴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진짜 희박해서……. 아오. 이 일을 저지른 사람이 왜 하필 시현의 동료인 루블리안일까요. 왜 하필 제가 담당하는 세계의 사람이어서……. 시말서 쓰게 생겼네요. 저 한동안 답이 없더라도 걱정하지 마세요. 끝나면 올게요.]

신이 말을 속사포로 내뱉었다. 미치겠다는 게 여실히 드러났다. 시말서를 써야 해서 그런지 말끝은 음울하게 떨리기까지 했다. 이게 끝인 듯 목소리가 뚝 끊겼다가, 다시 맑아진 머리에 소리가 들어찼다.

[아! 깜빡하고 말을 안 했는데요. 여기 신은 제가 아니에요!]

‘뭐?’

[저는 6년 전에 승급해서 신이 됐고, 그때 다른 신께서 담당하던 세계를 물려받았거든요. 지금은 제가 신이 아닐 때에요. 우선 이쪽 신님께 이야길 전달하고 여기에 있을 수 있던 거라…… 지금 시현이 만나려는 신은 과거의 제가 아니에요. 더 말해주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서요. 저 이만 가볼게요. 나중에 봐요!]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는 듯이 목소리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머리를 울리는 신의 목소리가 사라졌음에도 골이 아팠다.

“시현. 괜찮아요?”

보드라운 손이 내 뺨을 감싸고는 살짝 숙인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내 두통의 원인인 루블리안이 시야에 담겼다.

“괜찮아. 그런데 너, 아예 잊고 있던 거야?”

“다른 세계로 넘어가면 마왕 되는 거요?”

“어, 그거.”

내가 수긍하자, 루블리안이 엄지로 내 뺨을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이었다.

“시현은 안 그런 척해도 그 자식들 죽으면 신경 쓸 거잖아요. 물론 당신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

“지금도 정곡이라서 말 못 하는 거잖아요. 어쨌든 그래서 살려줄까, 해서 보낸 거였는데. 그때는 시현이 무모한 짓을 해서 정신이 한번 팔리고,”

살살 다뤄지던 볼이 양옆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힘이 그다지 들어가지 않아 아프지 않았다. 여름날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바다 같은 눈동자에 괘씸하고 속상하단 감정이 어렸다. 이내 빠르게 애정으로 승화되긴 했지만.

“제가 열다섯 개 넘게 여러 세계를 뛰어넘고 다녀서 완전히 잊고 있었어요.”

오로지 진심만을 담은 목소리였다. 듣고 보니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그때는 루블리안도 정신이 없었을 테니까.

게다가 살리려는, 좋은 의도로 그랬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물론 용사의 동료였다가 마왕으로 전락하는 건, 평행 세계 루블리안에게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다. 적어도 그건 동료를 위해 싸운 명예로운 죽음이니까. 그러나 물은 엎질러졌다.

그러한 생각 중인데, 루블리안이 다시 내 뺨을 둥글게 어루만지며 떠보듯 묻는다.

“역시 신경 쓰여요?”

“그다지.”

진심이었다. 그들을 신경 쓸 거라는 루블리안의 생각과 다르게 나는 별로 이렇다 할 관심이 없었다. 마왕이 되더라도 내가 불려가지만 않는다면 괜찮았다. 사라진 기억 속에서 내가 그들과 얼마나 친했었는지 모르겠으나, 나처럼 기억이 없는 평행 세계 데드리언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 그때의 감정이 생기지는 않는다고 말했듯 나 또한 똑같았다.

나는 그들에게 별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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