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33)화 (33/112)

033. 루블리안과 과거 세계 (10)

어쩌자고 저런 놈을 좋아하게 된 건지. 마음이 감성적으로 움직인다는 게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이성적으로 움직였으면, 루블리안을 좋아하게 되는 일은 없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애를 갑자기 잠재워?”

내 말에 루블리안의 손끝이 움찔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유독 예민하다. 아까도 느낀 거지만, 조금 가라앉은 듯했던 예민함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원래 루블리안은 내가 옆에 있으면, 이렇게 막무가내로 굴지 않는다.

둥근 곡선을 부드러이 그렸던 입가가 일직선에 가까워졌다. 푸르디푸른 눈동자에는 먹구름이 끼었다. 곧장 꾹꾹 눌러놓았던 감정의 둑이 터져 범람할 것만 같았다.

낯빛이 좋지 않은 루블리안은 한동안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 행동 속에서 고뇌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는 구겨진 얼굴을 피듯 애써 입가에 미소를 욱여넣었다.

“시현, 저 계속 기다렸어요. 무지한 어린 저랑 스승님이 있어서 하고 싶은 말들을 여태 참았어요.”

“…….”

“단둘이 있어야 이야기할 수 있어서 잠들게 했는데, 그게 뭐 어때서요? 저 지금 상태 안 좋은 거 알아차렸잖아요. 그럼 절 먼저 신경 써줘야죠.”

루블리안이 날 보며 애걸했다. 애써 지은 그의 미소가 흔적 없이 사라졌다. 입꼬리가 점차 아래를 향했다. 먹구름이 낀 눈은 기어코 비가 내렸다.

그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에 누가 멈추라고 한 것도 아닌데 꼼짝할 수가 없었다. 턱에 맺힌 눈물이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순간 서글프게 떨어지는 저 눈물이 내 심장은 아닌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할 정도로 놀랐다.

“과거로 오기 직전의 상황을 잊은 것 같은데요. 당신 자칫하면 죽기 직전까지 갈 뻔했어요. 알잖아요. 알면서 그랬잖아.”

입이 딱 다물렸다. 루블리안 말대로 도박을 했던 걸 아예 잊고 있었다. 그야 그건 내게 그다지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고, 루블리안과 함께 그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루블리안은 내 표정만으로 지금 하던 생각을 꿰뚫어 본 것처럼 쓰게 웃었다. 가슴 부근이 아릿했다. 어떠한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몸을 함부로 다뤄요? 나한테 자그마한 상처라도 나면 바로 신성력으로 없애버리면서, 내 상처에는 안달 내면서 왜 본인 상처에는 무심해요?”

고운 목소리가 애처로이 떨렸다. 하얀 손에는 힘줄이 불거질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 붉어진 눈가가, 눈물에 젖은 서러운 눈동자가 변명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도저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아무런 마법도 두르지 않고 맨몸으로 뛰어드는 걸 보고, 제 심정이 어땠을지는 생각 안 해요? 그걸 제가 기뻐할 것 같아요? 절 잠들게 하고 혼자 그 미친 새끼한테 간 것도 그래요. 당신한테는 그게 최선이었단 걸 아는데, 아는데…….”

더 말을 잇지 못한 루블리안의 눈에서 눈물이 또 떨어진다. 바닥에 점차 눈물 자국이 늘어날 때마다, 내게 상처가 나는 것 같았다. 누군가 심장을 도려내는 느낌이 들었다.

루블리안이 나와 같은 짓을 했다면, 나 또한 저랬으리란 걸 알았다. 내가 화낼 자격이 있나, 그래도 되는 사이인가를 재면서 아닌 척 참다가 끝내 왜 그랬냐며 언성을 높일 터였다. 좋아하는 사람이 나 때문에 희생하는 게 기쁠 리가 있나. 외려 조소하고 자학할 테다. 왜 이렇게 무력하고, 나약하냐며 자신에게 못질할 테다.

“좋아해요.”

툭. 루블리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했다. 용사 시절에도 숱하게 받은 좋아한다는 말이었으나, 이번에는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상대방에게 부담을 지지 않기 위해 가볍게 툭 내놓은 진심과 절절한 감정을 실은 진심은 달랐다. 머릿속이 온통 새하얘졌다.

“늘 말했잖아요. 알고 있잖아요.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거. 그러니까 제발 그런 짓 좀 하지 말아요. 날 우선순위로 둬요. 어린 나한테 질투하는 거 추한 거 아는데, 그걸 감수할 정도로 거슬려요. 짜증 나요. 나만 신경 써줘요.”

루블리안이 내 소매를 잡고 속에 있는 감정들을 모조리 토해냈다. 그 말들이 귀에 박혔다. 빼내려 해도 빼지지 않을 만큼 깊숙하게. 한 번도 본 적 없는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는 루블리안에 입술을 달싹이다, 나는 아주 소량의 진심만 세상에 내보내기로 했다.

“……안 한다고는 장담 못 해.”

잠시 머뭇거리던 것과 다르게 목소리는 생각보다도 담담하고 무심했다. 떨리지도 않았다.

“그때로 되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또 똑같이 할 거야.”

잡힌 옷자락에 주름이 깊어졌다. 루블리안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간 탓이었다. 그걸 가만히 바라보다, 한 박자 늦게 말을 이었다.

“……근데 그런 짓도 너라서 하는 거야. 네가 다치지 않기를 바라니까.”

이미 ‘나’라는 존재보다 위에 있는 게 넌데. 맨 꼭대기에 있는 게 넌데. 나를 얼마나 더 내주어야 하는 건지. 물론 루블리안의 심정이, 저렇게 흔들리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나는 루블리안이 날 좋아한다는 걸 확신한다. 그는 마음을 말로 표현했고, 행동으로 나타냈다. 좋아한다는 감정을 속에 숨기지 않고 보여주는데 확신이 없는 게 더 이상하다.

반면, 루블리안은 내가 자길 좋아한다고 확신하지만, 기반이 튼튼하지 않다. 나는 말로도, 행동으로도 좋아한다는 속내를 꺼낸 적이 없었다. 늘 뭉뚱그려 모호하게 답하거나, 회피했다. 그러니 한꺼번에 이런 일들이 몰아닥친 지금, 확인받고 싶어 하는 게 당연했다.

품에 안긴 어린 루블리안에게 향하는 친절과 상냥함도 루블리안이 독점하던 것이었다. 겉으로 티는 안 나지만, 그랬다. 그러한 혼자 독점하던 것들을, 루블리안의 어린 시절이라는 이유만으로 아이에게 나눠주니 의도치 않게 루블리안을 더 자극한 꼴이 됐다.

크게 다칠 뻔한 걸 그냥 잊은 것, 아이 때문에 루블리안을 덜 신경 쓴 것 등등. 여러모로 반성하는데, 루블리안이 툭 내 어깨에 머리를 댔다.

“당신이 나보다 약은 것 같아……. 항상 회피만 했으면서, 이럴 때만 잠깐 속내를 밖으로 꺼내지.”

허탈한 숨을 내뱉으며 말한 루블리안이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두어 번 쓰다듬어주고 싶었으나, 아이의 엉덩이를 받힌 손이 아닌 쪽은 여전히 잡혀있어 움직이는 금발에 살포시 머리를 기대는 것밖에는 하지 못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 슬금슬금 루블리안이 머리를 뗐다. 드러난 얼굴에는 누가 봐도 알아챌 만큼이나 운 기색이 한가득 남아있었다. 왜 눈이 부었는데도 못나질 않지. 의아할 정도로 그는 그냥 사연 있는 미인 같았다. 박시찬이 눈물을 질질 짰을 때와는 천지 차이였다.

루블리안의 얼굴을 바라보던 나는 손짓 한 번으로 클린 마법을 써 얼룩덜룩한 눈물 자국을 지워주었다. 그러자 루블리안이 눈을 가늘게 접어 웃었다. 붉어진 눈가에, 아직 물기가 남아있는 눈. 평소에는 애교스러움이 강했지만, 지금은 묘하게 위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눈물은 손으로 닦아줘야죠, 시현.”

“……눈물은 이미 바싹 말랐었어.”

그런 사실쯤이야 이미 알고 있다는 눈빛을 보내면서, 뭘 어쩌라는 건지. 찝찝할 것 같아서 클린 마법을 써줘도 저런다. 개수작을 부릴 거면, 하기 전에 부렸어야지. 그랬다면 이번만큼은 고민 없이 넘어가 줬을 텐데. 속내를 목구멍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더욱 꼭꼭 숨겼다. 세상 빛을 보지 못할 말이었다.

“이제 가요. 이 근처에 여관이 있으니까, 거기 방 잡아서 이야기 좀 해요.”

“애는 언제 깨어나는데.”

“……하루 정도 지나면요. 신과 대면하고 받을 거 다 받으면 깨어날 거예요. 그 숲속에서.”

아이에 관해 묻자, 약간 늦게 대답이 되돌아왔다. 평소에는 거슬리는 족족 더욱 환하게 웃으며 능청스레 대응하면서, 지금은 이렇게 날 것을 드러낸다. 확실히 스트레스를 받았구나 싶었다. 동영상을 재생하듯, 기억을 더듬자 루블리안이 얼마나 예민했고, 그걸 티 냈는지 알 수 있었다. 어린 루블리안에게 주의를 너무 많이 기울인 게 문제였다.

아주 소량의 진심을 내보내느라 헐거워진 잠금은 또다시 슬그머니 풀어져 진심을 내보내려 했다. 부러 속내도 더욱 꼭꼭 숨긴 것인데, 자칫하다간 어린 루블리안을 신경 쓰는 건 너라서 그런 거지 않냐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올 것만 같았다. 위험했다.

“얼른 가자.”

한 발자국. 그림자와 빛의 뚜렷한 그 경계를 넘어서고는 루블리안을 바라보자, 그가 뺨을 발그레 붉히며 잠시 몽롱한 눈을 했다. 잡힌 소매 쪽 팔을 뒤로 당기니,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눈에 초점이 돌아온다.

“난 길 몰라.”

“괜찮아요. 제가 아니까.”

그림자에서 나온 루블리안은 눈이 부셨다. 특히나 금색 머리카락은 온 세상의 빛을 끌어모은 것만 같았다. 환각 마법을 쓰지 않았다면, 이 부근을 지나가는 모든 이의 시선을 사로잡았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기억력이 좋은 건지, 루블리안은 막힘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거리 사람 대부분의 시선이 환각 마법을 써 모습을 바꿨음에도 불구하고 루블리안을 한 번씩 스쳤다. 해서 적당히 인식이 흐려지는 마법을 썼다.

별안간 위에서 웃음소리가 들린다. 자연스럽게 소매에서 내려와 손을 맞잡은 루블리안은 아까 보였던 예민함은 어디에다 버린 건지, 즐거워 못 견디겠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웃긴 건지. 웃음 코드를 알 수 없었다.

“시현, 원래 시선 같은 거 신경 안 쓰지 않아요?”

“안 쓰지.”

용사일 적 너무나 많은 시선을 느껴 이만큼은 감흥도 없다. 그리 대답하자, 루블리안이 더욱 환하게 웃는다. 빛이란 빛은 모두 홀로 독차지하는 듯이.

“그런데 이번에는 왜 쓴 거예요?”

“…….”

“질투했어요? 다른 사람이 절 보는 게 싫어요?”

“네? 네에?”거리며 얼굴을 더욱 가까이한 루블리안이 대답을 재촉했다. 잡힌 손이 앞뒤로 흔들린다. 시원한 바람이 머리카락 사이를 스쳤다. 햇빛은 따사로웠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유독 날이 좋았다.

“아니니까. 조용히 하고 안내나 해.”

“으응. 그래요?”

‘요’자를 평소보다 좀 더 늘렸다. 괜스레 불안감이 들이닥쳤다. 뭔가 또 일을 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럼, 저 저기서 노래 하나하고 와도 시현은 신경 안 써요?”

……미쳤나. 때아닌 평화로움을 확실히 느끼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간 낭비를 해도 된다는 건 아니었다. 신전에 침입할 밤까지 몇 시간이 남긴 했지만, 누가 번화가 중심에서 노래를 부른단 말인가. 얼굴 다 팔리게.

루블리안이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 때문에 마법을 썼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걸 알았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 말을 유도한다고 해도 그렇지. 누가 과거에서, 환각 마법을 써도 집중되는 얼굴로, 몰래 신전에 침입할 놈이, 그 신전 근처 번화가 한가운데서 노래를 부른다는 되지도 않는 발언을 하지?

아주 잠깐 잊었던 미친놈의 재림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