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 루블리안과 과거 세계 (9)
“바로 가?”
마법에 걸린 자기 스승은 걱정도 하지 않는 어린 루블리안이 물었다. 유리알 같이 맑은 눈동자에 생기가 가득했다. 광이 난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점점 활기를 띠는 것이 마치 이 숲을 처음 나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여덟, 아홉 살은 되어 보이는데 단 한 번도 나간 적이 없을까 싶긴 했으나, 설마 하여 물었다.
“처음 나가?”
내 물음에 어린 루블리안이 움찔했다. 언제 신이 났냐는 양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러고는 맞물린 작은 입술을 떼어 소리를 뱉는다.
“응.”
“여기서만 지냈어?”
“……왜. 이상해?”
불안감을 감추듯 아이가 부러 뚱한 낯을 유지했다.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간다. 무섭기는커녕 조막만 해서 하찮기만 했다.
‘루블리안’이 얼굴에 감정이 다 드러나는 게 역시 신기하여 부러 가만히 얼굴을 바라보는데, 대답이 늦어지자 차츰 낯이 어두워진다. 더 그림자가 드리우기 전에, 입을 열었다.
“안 이상해. 안 나갔을 수도 있지.”
“진짜지?”
“내가 굳이 거짓말을 왜 해.”
단조로운 목소리에 그건 그런지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한다. 아이의 얼굴이 안심한 듯 부드럽게 풀렸다.
“지금 출발할 거지.”
“네. 그럴 생각이에요.”
내 손바닥을 둥글게 뭉근히 문지르며 루블리안이 샐샐 눈웃음을 쳤다. 요사스럽기 짝이 없었다. 예민함이 가라앉은 것 같아 손을 빼내려는데, 깍지가 끼워졌다. 얽힌 곧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다. 이어 뻔뻔스럽게 제 것을 요구하듯이 묻는다.
“더 잡고 있을래요. 허락해줄 거죠?”
허락 안 하면 놓기는 할 건가. 애초에 거절해도 잡고 있을 생각이면서 굳이 뭘 묻는 건지 모르겠다. 기가 막혔으나, 루블리안이 평소보다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에 내 지분이 있어 선뜻 손을 내어주기로 했다.
내 침묵에서 속뜻을 알아차린 루블리안이 잡은 손을 가지고 놀았다. 조물조물하고, 뭉근히 문지르고, 꾹꾹 눌러보기도 하면서. 전에 이미 몇 번이나 당했던 것이라 별 감흥은 없었다.
“짐 챙길 필요는 없나.”
“그렇죠? 설령 오래 걸린다고 해도 이틀이니까요. 필요한 게 있으면 근처 번화가에서 사면 될 테고요.”
10년 좀 넘은 정도의 과거이니, 신전 근처가 크게 변하지 않았을 테다. 이미 겪어봤을 루블리안이 저렇게 말하기도 하니, 어린 루블리안의 짐은 챙기지 않기로 했다.
“이틀? 신전이 그렇게 가까워?”
“순간 이동을 하면 한순간에 신전 앞이니까.”
아쉽다는 걸 감추지 못한 아이에게 답했다. 여행 같은 느낌을 생각한 것 같은데, 우리가 이곳에 오래 머무르기에는 평행 세계 건이 해결되지 않았다. 아마 루블리안도 순간 이동을 염두에 두고 길게 잡아봤자 이틀이라고 한 것일 테다.
“그래도 빨리 가면 번화가는 구경할 수 있어. 우리가 신전에 들어가는 건 밤이니까.”
신전은 밤에 열지 않는다. 오전 일곱 시에 열고 오후 여덟 시면 문을 닫았다. 손님으로 하룻밤을 머무르는 일도 있으나, 교황의 초대일 경우에만 포함된다.
즉, 루블리안은 지금 몰래 잠입하겠단 말을 하는 거였다.
“몰래 들어가게?”
“그럼요. 리안, 생각해봐요. 지금 하려는 짓을 해가 밝을 때 하면 난리 날 걸요?”
확실히 그랬다. 신을 대면하여 축복 및 가호를 받는 것인데, 그걸 사람이 많을 낮 시간에 하는 건 무리였다.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여 신을 불러올지는 미지수였으나, 범상치 않으리란 건 알 수 있었다.
대화가 필요했다. 루블리안에게 내가 사라진 후, 평행 세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와 신을 어떻게 불러낼 작정인지에 대해 들어야만 했다. 또한, 평행 세계에서 알게 된 이야기도 해야 했다. 가령 평행 세계의 그 미친 새끼가 시간을 되돌렸다든가 하는.
그런데 대화할 틈이 있을까 싶다. 우리 둘만 있는 게 아니라 전체적인 상황을 알지 못하는 어린 루블리안까지 껴있으니.
루블리안이 말하는 걸 곱씹으면, 신전 근처로 이동 후 그답지 않게 아이에게 번화가를 구경시켜줄 모양인데, 그러고 있으면 금방 해가 떨어지고 어둑한 밤이 올 테다. 밤에는 신전 내부로 들어간다고 했으니, 도통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다.
잠시만. 이래서 일부러 길어도 이틀이라고 한 건가. 내가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란 걸 알아서? 과한 해석일 수 있으나, 상대는 루블리안이었다.
“근데 노인네는 풀어주고 갈 거야? 아니면 돌아와서 풀어줘?”
골똘히 생각하던 차에 어린 루블리안이 여전히 굳어선 뻐끔거리고 있는 스칼레인을 가리켰다. 많이 해본 듯 자연스러운 삿대질이었다.
나는 손짓 한 번으로 걸었던 마법을 풀었다. 당연히 함께 돌아오리라는 천진한 믿음이 하루나 이틀이면 깨질 텐데. 미안했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 남을 건 아니지만.
“예상보다도 훨씬 뛰어나!”
스칼레인의 눈이 반짝였다. 아까도 힘의 차이를 실감하고 나서 흥분하더니, 또 그랬다. 당하면 당할수록 연구할 생각에 미쳐 흥분하는 게, 이쪽도 필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마법사 중에 제정신인 이가 있을 확률이 거의 없긴 했다.
조금 더 있다간 아까처럼 피와 살점을 내어달라고 할 것만 같았다. 나는 인정이 많지도 않았고, 하물며 저쪽은 내게 중요한 사람도 아니었다. 내 몸의 일부를 줄 이유가 없었다.
눈치 있게 루블리안이 다시 스칼레인에게 마법을 걸었다. 그의 움직임이 멎었다. 이번에는 얼굴까지 굳어진 덕에 광기 서린 음성이 귀를 파고들지 않았다. 다행인 일이다.
“그럼 갈까요?”
“잠깐 얘랑 자리 좀 피해줘.”
“물어보고 싶은 거라도 있어요?”
가벼이 고개를 흔들자, 루블리안이 내 품에서 어린 루블리안을 데려가려 했다. 그러자 아이가 소리치며 버둥거렸다. 절대로 루블리안에게는 안기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드러나는 격렬한 반항이었다.
“루블리안.”
‘야’나 ‘너’가 아니라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루블리안과 아이의 시선이 모조리 내게 향했다.
“왜?”
“잠시만 현이랑 있어.”
“……금방 올 거야?”
응석을 부리는 게 부끄러운 듯 아이의 얼굴과 귓바퀴에 붉은 물이 들었다. 이런 순수한 아이가 어쩌다 저렇게 커버린 걸까. 루블리안에게 돌아가려는 시선을 거두고 입을 뗐다.
“응. 5분이면 돼.”
“알겠어.”
아이는 루블리안은 본 체도 하지 않고 멀어져갔다. 루블리안은 아직 내 옆에 있었다. 너는 왜 안 가냐는 듯 바라보자, 그가 손을 튕겼다.
하필 헤벌쭉하고 웃는 낯으로 굳었던 스칼레인의 안면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몸은 변함없이 굳어있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심술부리지 말고 있어.”
내 말에 어쩐지 삐뚜름한 것 같은 오묘한 미소를 지은 루블리안이 거리를 좁혔다. 머리에 가벼운 게 잠시 닿았다가 떨어졌다. 입술을 맞췄다는 걸 그간의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뭐라 하기도 전에 루블리안이 등을 돌려, 아이가 갔던 방향으로 사라지고, 스칼레인과 둘만 남았다.
루블리안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던 나는 방음 마법을 사용하여, 저들의 귀에 이야기가 들어가지 않게 했다. 스칼레인은 가기 전 루블리안이 한번 쏘아본 덕분인지, 눈동자의 생기가 줄었다. 흥분으로 가득 차 있지 않았다.
“나한테 볼 일이 있나 보지?”
“루블리안을 언제, 어디서 만나게 되었는지 말해주시죠.”
말을 끝맺자, 녹빛 눈동자가 날카롭게 바뀌었다. 스칼레인은 무언갈 재는 눈으로 나를 샅샅이 훑었다.
“……자네는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군. 여긴 벨루아 산이네.”
당연히 알 거라는 듯한 눈치였으나, 벨루아 산을 나는 몰랐다. 명성이 자자한데, 내가 모른다면 경우는 하나였다. 내가 이 세계로 넘어오기 전, 마왕에 의해 오염되거나, 파괴된 것이다.
“미래에는 여기가 없나 보구나.”
“네.”
“여기는 세간에서 온갖 소문이 다 돌아다니는 곳이지. 이 숲에 들어와서 실종된 사람이 있다거나, 이 숲에 발을 들이면 나가지 못한다든가, 나와도 정신이 이상해진다든가. 그런 류의 좋지 않은 소문뿐이라 모두 여길 피하네.”
서론이 끝나고 본론이 나올 차례였다.
이제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성은 벨리텐트이나, 루블리안은 왜 그렇지 않은지. 혹시 누군가 그를 노리는 게 아닌지. 그 여부에 대해서 알 수 있을 테다. 루블리안이야 환각 마법으로 나를 제외한 모든 이의 시선에 모습이 달라 보이겠지만, 어린 루블리안은 아니었다. 혹시 위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숲에 아기 울음소리가 퍼졌고, 마법에 재능이 있어 보여 길렀네. 그게 다일세.”
그러나 길게 숨을 들이켜고 내쉰 스칼레인은 본론을 뛰어넘고, 결론을 지어버렸다. 중간 과정이 통으로 생략되었다.
그래도 추측은 할 수 있었다. 좋지 못한 숲에 아이가 들어올 일이 뭐가 더 있겠는가. 마법을 쓰든, 로브로 가리든 아이의 얼굴을 드러내지 말아야겠다.
“뭘 노리는 건지 모르겠으나, 제자 얼굴은 제대로 가려주길 바라네.”
덧붙이는 말에 하던 생각을 멈추고 자애로운 낯을 한 스칼레인을 응시했다. 이 자는 루블리안이 본래 벨리텐트 가문이라는 걸 아는 것 같은데. 안다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그렇게 보지 말게나. 어느 귀족인지 확실한 건 나는 모르네. 자네처럼 상황을 추측했을 뿐이지.”
“……말장난하지 마시죠.”
‘확실한’ 건 모른다고 했으니, 벨리텐트라는 건 ‘예상’은 했을 테다. 굳이 평민이 여기에 아이를 버리고 갈 리가 없으니, 그 당시 귀족가의 실종 사건만 조사하면 얼추 윤각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흔한 일도 아닌 데다, 부모의 얼굴을 물려받았을 테니.
더불어 평행 세계 루블리안과 이름이 똑같았다. 그쪽은 분명 벨리텐트 공작 부부가 이름을 지어줬을 텐데 똑같은 걸 보면, 스칼레인 또한 아이가 벨리텐트의 첫째라는 걸 추측하여 이름을 ‘루블리안’이라고 지은 게 아닐까 싶다. 그런 내 예상에 확신을 주듯 스칼레인은 그저 웃었다. 더 캐내 보려 해도 말하지 않으리라. 나는 루블리안이 건 석고 마법을 파괴하고, 방음 마법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루블리안과 아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왔어요?”
“어. 가자.”
루블리안에게 덤비던 아이를 안아 들자, 마력이 꿀렁이는 게 느껴졌다. 익숙한 감각이 나를 뒤덮는다. 눈을 한번 감았다가 뜨니 시야에 비치는 광경이 달라졌다. 조금 어두운 골목 끝에서 빛이 흘러들어왔다.
“루블리안.”
“응.”
“너한테 마법 좀 걸게. 모습을 바꿔주는 마법이야.”
“그러든지.”
내가 사랑하는 색들을 흔하디흔한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로 바꾸고, 안면 인식을 방해하는 마법을 추가로 걸었다. 아이는 빛이 흘러들어오는 통로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골목을 벗어나면 바로 번화가이니 기대가 되는 듯했다.
걸음을 옮겼다. 차츰 빛이 들어오는 골목 입구에 다다르자, 아이의 고개가 요리조리 움직였다. 반짝거리는 눈동자는 생동감이 넘쳤다. 헤벌어진 작은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 순간이었다. 거리를 눈에 담던 맑고 빛나던 눈동자가 내려간 눈꺼풀 안으로 사라지고, 아이가 축 늘어졌다.
슬립 마법이었다. 마력의 움직임이 느껴지긴 했으나, 환각 마법을 고치려는 줄 알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애를 잠재울 줄이야.
“뭐 하는 거야.”
루블리안을 바라보자, 그는 멋대로 한 행동을 무마하려는 듯 사르르 눈을 접었다. 매끄럽게 호선을 그린 입이 열린다.
“그야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요? 얼른 가면 구경할 수 있다고야 했지만, 그게 몇 분인지는 말 안 했잖아요.”
이어지는 말은 가관이었다. 시간이 없다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저 빛무리를 머금은 듯한 미소로 저딴 말을 지껄이고 있다니.
진짜 제정신 아닌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