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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31)화 (31/112)

031. 루블리안과 과거 세계 (8)

어린 루블리안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짜증이 가득한 눈빛으로 루블리안을 쏘아봤다. 본인이 본인을 싫어하다니. 왠지 기분이 묘했다.

그런데 어린 루블리안은 왜 데려가는 거지? 불현듯 의문이 들었다. 루블리안은 아이가 여기에 남자며 졸랐다는 이유로 신전에 함께 갈 사람이 아니었다. 아이를 신전에 데려가는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과거로 온 건, 순전히 주술을 풀기 위함이 아니리란 예감이 들었다. 그게 끝이었다면 이대로 돌아가지, 신전에 가자는 말을 꺼낼 리가 없었다.

과거, 어린 루블리안, 신전. 이음새 없이 동떨어진 단어들을 이리저리 묶어보며, 생각에 잠겼다.

신전에 가면 보통 기도실에서 기도를 드리거나, 기부금을 내거나, 신성력으로 치유를 받는다. 갓 태어난 신생아들은 세례를 받기도 하는데, 어린 루블리안은 이미 여덟, 아홉 살은 되어 보였다. 세례는 이미 받고도 남을 나이였다.

저런 평범한 이유로 가는 게 아닐 테다. 좀 더 다른, 특별한……. 그 순간 머릿속에 원래 있던 한 가지 의문이 재조명되었다. 설마 싶었으나, 이게 진실이라면 신이 다른 세계로 넘어온 루블리안을 묵인한 것이 설명된다.

“이현.”

“현아, 라고 불러달라니까요. 왜 그래요, 리안?”

“너 신하고 만난 적 있어?”

머리를 쥐어뜯으려는 아이의 손을 피하던 루블리안이 빙그레 웃었다. 내 추측에 확신을 더해주는 미소였다.

루블리안은 어릴 때 신의 축복과 가호를 받은 거였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랬기에 다른 세계로 넘어온 걸 신이 묵인한 거였다. 나는 그 사실도 모르고 가슴을 졸였던 거고.

강대해진 힘은 내가 반절을 얻어갔으니, 세계의 균형이 무너지지 않아 더 지켜보기로 한 게 아닐까 싶다. 추측하다 보니 괘씸하기 그지없다. 누구는 누가 죽을까 봐 피가 말리는 기분이었는데. 루블리안은 그 상황을 즐기고 있었을 게 뻔했다.

나는 아이를 한쪽 팔로 안은 채, 다른 쪽 팔의 팔꿈치로 루블리안의 복부를 내리찍었다. 마력을 담아 배를 보호한 그는 아직도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에 응하듯 신성력을 두르고 다시 한번 팔을 움직이자, 허리에 둘러있던 팔 중 하나가 내 팔을 잡았다. 그걸 노렸던 나는 다리를 재빠르게 움직였다. 뒤로 구르듯 차자, 루블리안이 두 팔을 거두고 물러나는 게 느껴졌다.

드디어 벗어났다. 나는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아까 탐지 마법으로 감지한 오두막이다. 이미 자리를 뜬 지 오래인 아이의 스승, 스칼레인은 아마 그곳에 있을 터였다.

“으음. 화났어요?”

내 옆으로 온 루블리안이 눈치를 봤다. 화려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낑낑 앓는 소리를 내는 강아지처럼 변모한다. 얼굴에 약하고, 자신한테는 더 약하다는 걸 알고 써먹는다. 여간 약은 게 아니었다.

“안 났어.”

한숨처럼 나온 대답이었으나, 루블리안은 수긍하지 않았다. 되레 내가 화가 났다는 걸 확신한 사람처럼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에 따라 신이 한올 한올 정성스레 만졌을 것만 같은 금색 속눈썹이 팔랑인다. 부서지는 햇빛에 더욱 색이 옅어졌다.

홀린 듯 루블리안을 응시하던 나는 시선을 돌렸다. 연기인 걸 인지하고 있음에도 마음에 있던 가증스러움이 단번에 녹아버렸다. 그러다 루블리안에게 혀를 내밀며 꼴 좋단 얼굴을 하던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두어 번 내 옆에서 시무룩한 척하는 놈과 같은 색의 속눈썹을 깜빡이더니, 이내 혀를 작은 입술 사이로 슬그머니 집어넣는다.

“뭐.”

그러고는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말해놓고선 아닌 척 눈치를 살피는 게 옆에 있는 루블리안이랑 똑같다. 다른 점이라고는 내 기분을 풀려는 요령의 차이였다.

“내릴래?”

무슨 말이라도 해주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빤히 나를 직시하는 눈동자에 별 뜻 없이 물었다.

“아니! ……내가 쟤 약 올려서 그래?”

그러자 생각보다 격렬한 반응이 되돌아온다. 서럽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대체 얘는 처음 만난 나에게서 뭘 봤길래 이러는 건지. 어리다고 해도 루블리안이다. 경계가 없을 리가 만무했다.

“아니니까, 또 울지 말고.”

또다시 드는 미묘하고 낯선 기분에 오해를 정정해주었다. 루블리안 때문에 내리라고 한다니. 어린 루블리안은 내가 루블리안을 좋아하는 사실을 간파한 뒤로는 생각이 이쪽으로 흐르는 모양이었다.

“그럼 왜?”

여전히 의심이 가득한 아이를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어 위로 올렸다. 조금 차이가 나던 눈높이가 얼추 맞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의 눈동자를 똑똑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걷고 싶을까 봐. 별 의미 없었어.”

정말 이게 다라는 듯이. 거짓은 한 점도 뱉지 않았다는 듯이.

어린 루블리안의 눈에 서린 의심이 서서히 사라져간다. 이윽고 아이는 퉁명스러운 어조로 알겠다며 말한다. 귀 끝이 붉단 사실을 모른 채로.

“리안, 저도 봐주세요.”

평소라면 손을 잡았을 루블리안이 내 옷자락을 잡고 살살 흔들어댔다. 시선을 받은 루블리안이 처연한 낯을 버리고 해사하게 웃는다. 그러나 그의 미소를 많이 본 나는 미묘한 어긋남을 발견했다.

얘, 지금 예민하다. 그것도 무척이나.

상대방을 긁는 것 자체는 평소랑 다를 바가 없었다. 그게 어린 자신이라도 똑같이 구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나 보다. 묘하게 날 서고 예민한 게, 어린 루블리안을 신경 쓰다 보니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왜 그런 것인지 이유를 찾기 위해 루블리안이 이곳에 나타났을 시점부터 기억을 더듬었다. 특히 어린 루블리안을 대할 때 더 예민했던 걸 보니 짐작이 갔다. 내가 자의로 평행 세계 루블리안에게 갔으니, 본인 어린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루블리안’이라는 사실 하나로 의식하고 있는 듯했다.

너라서, 네 어린 시절이라서 잘해주는 걸 몰라? 내가 감추는 마음은 귀신같이 알아차리더니. 어이가 없었다. 얼마나 여유가 없으면 이럴까 싶기도 했다.

“현아.”

루블리안을 잠들게 했던 때처럼 최대한 다정하게 이름을 굴렸다. 놀란 듯 루블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이의 몸이 움찔하는 것도 느껴졌으나, 내 우선순위는 명확했다.

“옷 늘어나.”

“그럼요?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동그랗게 완전히 드러났던 눈동자가 눈꺼풀에 반쯤 가려졌다. 기분 좋게 휜 눈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타지 않은 하얀 뺨에 홍조가 올랐다.

알면서도 대답해달라고 한다. 기어이 내 입으로 듣고 싶다는 뜻이 명확했다. 한번 한숨을 내쉰 나는 옷자락을 잡은 굵고 곧은 손가락을 건드렸다.

“……옷 말고 손잡으라고.”

“네에.”

말끝이 질질 샌다. 곧이어 손가락 사이사이에 뜨거운 열감이 들어찼다. 서늘한 내 손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염병. 꼴값 떠는구나.”

어느새 도착한 오두막 앞에는 스칼레인이 서 있었다. 오두막은 가까이 가보니, 탐색 마법으로 어림잡았던 것보다도 작았다. 그러나 확장 마법부터 오두막에 들어가면 사람이 탐지되지 않는 혼란 마법까지 여러 마법이 중첩되어 있었다.

“확장 마법, 불법 아닌가.”

마법을 살펴보다 보니 중얼거림이 절로 나왔다. 이에 스칼레인은 자부심 넘치는 얼굴로 말한다.

“마탑주 권한이면 뭐든 된다네.”

아. 스칼레인을 어디서 봤나 했더니 역대 마탑주의 이름이 새겨진 족보에서 봤었다. 이름 밑으로 설명도 적혀 있었다.

기억상으로 스칼레인 셀턴이라는 이름 밑에는 마법사 중 건강을 우선시하며, 유일하게 비실거리지 않는, 우선 스태프로 처리하고 보는 괴짜 마탑주라고 적혀 있었다. 다른 마탑주들과는 달리 특이한 설명이기도 했고, 기억력이 유난히 좋은 탓에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뭐 하러 온 거냐, 셀턴.”

“주술이 걸려 있다는 표식이 아직 안 없어져서. 나한테 건 주술 풀고, 애 좀 빌리려고?”

“이놈 자식아! 어째 넌 그 나일 먹고도 변하질 않는 것이냐! 내 속이 터진다, 터져. 주술은 네가 염병을 떨고 있어 내버려 둔 거다! 그리고 밑도 끝도 없이 남의 제자를 데려간다니. 이유는 어따 팔아먹었는지 모르겠구나!”

엄지와 중지를 튕긴 스칼레인이 아공간에서 꺼낸 듯 스태프를 잡고, 그대로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었다. 챙. 금세 스태프를 꺼낸 루블리안이 대를 가로로 잡으며 자연스럽게 공격을 막아냈다. 이어 팔에 힘을 주어 스칼레인의 스태프를 밀어낸다.

뒤로 밀려난 스칼레인이 다시 한번 도약하려는 순간, 그들을 멈춘 건 나였다. 몸이 굳는 석고 마법으로 움직임을 제어했다. 마법보다는 검을 주로 쓰는 내가, 스태프로 싸우는 마법사들을 막다니. 기묘한 그림이 아닐 수 없다.

“자네, 이게 뭐 하는 건가!”

얼굴만 굳지 않은 스칼레인이 소리쳤다. 미친 듯이 튀기는 침을 피해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마법 또한 걸었다. 그보다 내가 상위 마법사이기에 파훼는 어려울 터였다. 바로 마법을 풀고 손을 잡아 오는 루블리안과 달리.

“주술, 푼 거야?”

손을 튕기고 바로 달려든 것밖에 보지 못해 알 수가 없었다. 마법도 보통 손을 튕기거나, 발을 구르며 시전하기에 주술을 푼 건가 싶긴 했다. 그러나 확실하지 않아 걱정되었다. 혹여나 내가 루블리안에게 짐이 될까 봐.

“네,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겉모습은 저래도 주술로는 따라올 사람이 없거든요. 마법만큼이나 주술을 연구하시고 단련하셨으니까요.”

가질 의문이 없는 확답이었다. 이내 주술에 관한 생각은 버리고, 다음 건을 해결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햇빛에 반짝이는 금발이 물결치듯 바람에 떠밀린다. 청명한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입을 움직였다.

“같이 갈래?”

함부로 데려갈 수는 없었다. 당사자의 의견이 확실해야 했다. 물론 지금의 루블리안이 신의 축복 및 가호를 받았기에, 당연히 함께하리라는 확신도 있었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언제 나를 찾아낼지 몰랐기에, 최대한 빨리 일을 마치고 여길 떠나는 게 옳았다. 아직 그를 어떻게 해야 할지 제대로 된 갈피조차 못 잡은 상황이니 말이다.

“응!”

어린 루블리안의 등 뒤로 화사한 꽃이 피어나는 착시 현상이 일었다. 그만큼 아이의 미소가 미려했다. 내가 제안해준 게 기쁘다는 티가 났다. 신전에 다녀오고 나면 이별이라는 걸, 모르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미안하지 않다면 그건 거짓이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여기 시간선의 사람이 아니었고, 적당히 있다가 내 시간선으로 돌아가 일을 끝마쳐야 했다.

“그렇다는데, 허락하시죠.”

그러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마법을 걸었으니, 당연했다. 입만 벙긋거리던 스칼레인을 보다 내 멋대로 답을 내렸다.

“침묵은 긍정이라던데. 그럼 허락하신 걸로 알겠습니다.”

사기였으나, 마법이 걸린 스칼레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신전행이 결정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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