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 루블리안과 과거 세계 (7)
아직 마탑주가 아니기에 셀턴이라는 성을 달지 못한, 자신이 평민인 줄 아는 어린 루블리안은 리안과 만나기 전에도 느꼈던 심상치 않은 마력 파동 이후 나타난 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그 표현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싫었다. 끔찍했다.
몸 전체에 마력을 두른 게 싫었고, 리안과 똑같은 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싫었고, 리안과 똑같이 단아하게 생긴 얼굴이 싫었다. 또, 리안이 저 머리를 비비는 행동을 익숙하다는 듯이 받아주는 게 싫었다. 피비린내를 풍기며 온 것도 싫었다.
‘분명 건실한 직업을 가지지 못한 범죄자일 거야.’
그리 생각한 어린 루블리안은 될 수 있는 한, 갑자기 나타난 남자에 대해 잡을 수 있는 꼬투리란 꼬투리는 다 잡았다. 범죄자라고 치부한 이가 본인의 미래라고는 추호도 상상하지 못했다.
어린 루블리안은 부러 눈을 감지 않고, 자신을 잊은 듯한 리안이 고개를 돌릴 때까지 기다렸다. 생리적인 현상으로 눈가가 촉촉해졌다.
남자와 똑같이 나타났지만, 리안은 달랐다. 한곳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마력과 바람이 거둬지고 나타난 그는 깨끗하고 맑았다. 칠흑같이 검은 흑발은 나뭇잎 사이로 간간이 들어오는 빛을 받으면 오묘한 갈색빛을 띠었고, 가지런한 속눈썹 아래 연갈색 동공은 그림자 아래 있음에도 따뜻한 빛깔을 띠었다. 따사로움과 어울리는 이였다.
얼굴에 마음이 일렁이고, 더 마음이 요동친 건 무심한 눈동자 속 자신을 향한 애정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노인네와는 달랐다. 더 간지럽고 따뜻하고 놓치기 싫은 느낌이었다.
오늘 처음 본 사람이 분명한데 자신에게 애정을 가진 모습이 신기했다. 들떴다. 무심함으로 가려져 있지만, 자신을 향한 선명한 애정이었다. 경계해야 하는 걸 인지했으나, 따뜻한 애정에 경계심은 자연스럽게 허물어졌다.
어린 루블리안은 처음 맛본, 스칼레인이 주는 어딘가 모난 애정과는 다른 저 애정을 가지고 싶었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였다. 아무런 표정 없는 얼굴에 감추지 못한 애정이 흐릿하게 스몄을 때, ‘큰 셀턴’이라는 이와 연애하지 말라고 약속을 얻어낸 것도. 다짜고짜 청혼한 것도.
‘그런데, 그런데……!’
커다란 품에 파묻혀선 리안은 가만히 큰 셀턴으로 추측되는 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열불이 났다. 가슴이 꽉 쪼였다. 그가 나타나자, 얼굴에 떠오른 감정을 엿본 탓에 남자를 시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린 루블리안의 뺨이 축축하게 젖어갔다. 눈은 충혈되었고, 잘근잘근 깨문 아랫입술은 이미 붉어진 지 오래였다. 꽉 말아쥔 작은 손에는 이미 힘이란 힘이 다 들어가 있었다.
기다리고 기다렸다. 몇 분이 몇 시간 같았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 중 어린 루블리안만이 그렇게 느꼈다.
그리고 그 끝에 리안이 고개를 돌렸을 때, 눈이 마주쳤을 때, 어린 루블리안은 그제야 눈을 감았다. 방울 지어 떨어지는 눈물이 바닥을 적셨다.
_oOo_
“현.”
“뒤에 붙은 ‘아’와 다정한 목소리는 어디 갔어요?”
‘아’는 몰라도, 다정한 목소리는 있던 적도 없다. 박시찬이 흔히 말하던 존기―존재하지 않는 기억―라도 있는 건지, 루블리안은 오늘도 어김없이 헛소리를 해댔다.
어린 루블리안이 울고 있으니, 내가 뭐라고 말할지 모를 리가 없으면서 그런 척을 한다. 루블리안은 살살 머리카락을 문지르던 손길을 멈추더니, 시선을 맞추며 가녀린 소동물처럼 눈꼬리를 휜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놔.”
“달래 주려고요?”
“알잖아.”
“으응. 알죠……. 있죠, 리안. 질투 나는데. 놓아주면 제게도 보상을 주나요?”
어이가 없었다. 어린 본인을 어르기 위한 건데, 보상을 달라니. 순 도둑놈 심보 아닌가, 이거. 그런 내 시선에도 루블리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순한 양처럼 해사하게 웃을 뿐이었다.
“없어.”
“진짜로 없어요?”
“……없다고.”
애처롭게 내리깔리는 속눈썹에 잠깐 흔들렸으나, 완고하게 말했다. 루블리안은 어쩔 수 없단 얼굴로 내 허리에 두르던 팔에서 힘을 빼내었다.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는 정도였기에, 나는 루블리안의 품에서 벗어나 그와 대화하느라 다시 등졌던 아이에게 향했다. 다가가 무릎을 접으니, 아이가 내 옷자락을 꽉 쥐었다.
“싫어.”
“응.”
“……진짜 싫어.”
눈물이 더 떨어진다. 찹쌀떡을 연상케 하는 뽀얀 뺨이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뭐가 싫은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갑자기 등장한 루블리안밖에 더 있나.
“나 달래줘.”
울음이 섞인 목소리가 떨렸다. 내 옷자락을 잡지 않은 손을 내게 내밀었다. 상대적으로 짧은 팔이 쭉 펴진다.
나는 아이를 품에 안고는, 아까 아이가 말한 것을 차례대로 이행했다. 좀 더 품에 안기게끔 하고, 작은 등을 일정한 박자대로 토닥거렸다.
그러자 신이 놀랐음이 확연한 목소리를 낸다.
[시현은 정말 동료인 루블리안한테는 약해지네요. 보통 인간들은 저런 애들을 뭐랄까, 질렸다는 눈으로 보지 않나요? 미쳤다는 식이거나?]
나 또한 독기 서린 아이 때문에, 기어코 돌아볼 때까지 눈을 감지 않는 아이 때문에, 미치겠다는 감정이 든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 아이는 루블리안이었다. 내가 좋아하게 된, 내 유일이 되어버린 루블리안의 어린 시절이었다.
애초에 루블리안이 제정신이 아닌 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좋아하게 되어버린 이상,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었다. 물론 사귈 일은 없고. 결혼할 일은 더더욱 없지만 말이다.
“여기까지.”
내게 다가오던 인기척이 우뚝 서더니, 내 허리를 잡곤 나를 들어 올렸다. 굽혔던 무릎이 펴지고 시야가 높아졌다. 다행히 아이는 여전히 품에 안긴 채였다.
“뭐 하는 거야.”
“당신이 그렇게 웃으니까 질투 나서? 어릴 땐 원망했는데, 지금 돼보니까 알겠어요. 보고만 있을 수가 없네.”
나긋하면서도 허탈한 소리가 허공으로 퍼져나간다. 정말 질투가 났다는 얼굴에 새어 나오는 헛웃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심장이 기분 좋게 뛰었다. 루블리안도 내 심장 소리를 듣고 있을 테다. 이 거리에서 안 들릴 리가 없었다.
나는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아이를 한쪽 팔로 안고, 다른 팔로 허리를 껴안은 손을 떼어 내려 했다. 그러자 아프지 않게 좀 더 힘이 들어가는 팔에 포기했다. 놓을 마음이 하나도 없다는 의지가 드러났다. 지금은 어떻게 해도 이 팔이 풀리지 않을 게 분명했다.
“손 놔!”
그런 나를 대신하듯 어린 루블리안이 앙칼지게 소리쳤다. 고사리만 한 손으로 커다란 루블리안의 손을 떼려 애쓴다. 마음은 고마우나, 하찮기 그지없다.
“으음. 싫은데?”
“놓으라고!”
“왜?”
반문한 루블리안이 조금 더 깊게 나를 끌어안았다. 스물한 살이나 돼서 어린아이랑 싸운다. 그것도 본인 어릴 적인 애랑.
“둘 다 그만해.”
투닥거림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아 중재했다. 이러다간 날 새겠다.
“쟤가 먼저 그랬는데!”
“당한 건 누가 봐도 전데요. 아파요, 리안.”
일부러 아이의 얼굴이 없는 쪽으로 얼굴을 내밀고는 처연하게 속눈썹을 파르르 떤 루블리안이 아이에게 당한 손을 내게 보였다. 곧고 하얀 손가락에 손톱자국이 나 있었다. 원래부터 상처가 나면 대부분 빠르게 치료하는 덕에 흉 하나 없던 손이었다. 상처라고 할 수준도 아니었지만,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신성력을 써서 손톱자국을 지워냈다.
“고마워요.”
루블리안이 사르르 녹을 듯이 눈을 접었다. 숨기지 않는 그의 애정이 눈에서 흘러내렸다. 늘 겪는 일이었지만, 이것만큼은 익숙해지기가 어려웠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아이를 고쳐 안았다.
“그리고 질투 나는 게 가장 크지만, 리안을 일으킨 이유가 하나 더 있어요.”
그게 무엇인지 다음으로 나올 말을 기다리던 찰나였다. 어린 루블리안이 내 목을 팔을 걸어 꼭 끌어안고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말한다.
“‘리안’은 이름이 없다고 해서 내가 지어준 거야. 근데 넌 오자마자 리안을 리안이라고 불렀어. 어떻게 안 거야?”
“우연이네. 원래 이름이 리안이거든.”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은 한 루블리안은 태연했다. 놀랐다는 듯 조금 눈을 크게 뜨고, 작게 입을 벌리기까지 한다. ……현대에 살았다면, 배우나 사이비를 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만큼 거짓말이 숨 쉬듯 자연스러웠다.
“그보다 이름을 지어줬다고? 이렇게 통찰력 좋은 네가 10대 후반은 되어 보이는 사람이 이름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하다니. 애는 애구나?”
조금 더 부드럽고 어른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걸치고, 한껏 나긋한 목소리를 낸다. ‘애’와 ‘어른’의 차이를 몸소 체감하게 하려는 속셈이 보였다. 어린 자신에게도 이렇게 굴다니. 이 파탄 난 인성을 이길 사람은 없을 듯했다. 그에 비하면 어린 루블리안의 불타는 인성이 천사 같았다.
안고 있어서 아이가 부들부들 떠는 게 느껴졌다. 누가 봐도 화를 참는 모양새였다.
“그만하고. 한 가지 이유 더 있다며.”
화제를 돌리자, 루블리안은 조금 전까지 아이의 속을 살살 긁던 사람답지 않게 웃었다.
“저희 신전에 가야 해요. 되도록 빨리요.”
“……신전?”
느닷없는 신전행에 무심코 되물었다. 설명 하나 곁들이지 않은 루블리안은 그런 날 이해한다는 표정이었다. 까닭을 물어보려는데, 어린 루블리안이 다급하게 목에 감았던 팔을 풀어 내 어깨를 짚고 상체를 뒤로 뺐다.
보이는 낯에는 불안감이 가득 서려 있었다. 작은 입술이 열리고, 변성기가 오지 않아 높고 맑은 미성이 흘러나온다.
“가? 나랑 여기 있자. 거긴 비실비실한 샌님만 있는 곳이라며. 재미없다고 노인네가 그랬어.”
신이 안쓰러움을 느낄 정도로 어린 루블리안은 여기에 있으면 좋은 점을 하나씩 나열했다. 이어 더 나올 것이 없다고 여긴 건지, 애가 타는 눈빛으로 대답을 촉구한다.
나야 상관없었다. 루블리안을 바라보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연다.
“이 애도 같이요.”
일부러 뒤늦게 말했다는 걸 감추지 않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