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 루블리안과 과거 세계 (6)
저번에 협박받았다며 억울하단 투로 고자질하던 신이 동정할 정도라니. 어린 루블리안이 어지간히도 불쌍해 보인 듯했다.
아이를 끌어안던 나머지 한쪽 팔을 풀어내고 무릎을 폈다. 동등했던 눈높이가 엇갈리고, 따뜻한 체온이 사라졌다. 그렇게 오래 안고 있던 것도 아닌데 묘하게 허전하다.
“리안.”
나를 부르는 곱고 여린 음성에 시선을 내렸다. 작은 입술이 열릴락 말락 했다. 아이가 입술을 우물거리다 소리를 내었지만, 너무 작은 탓에 잘 들리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안 들릴 법했다는 걸 아는 건지, 눈을 질끈 감고는 다시 크게 소리치듯 말한다.
“나중에 나랑 결혼하자고!”
“뭐?”
“허…….”
[와…….]
순간 어린 루블리안을 제외한 이들에게서 감탄사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까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할 수 없어 말을 잃었다면 지금은 그냥 잃었다. 말문이 턱 막혔다.
지금 그러니까…… 나한테 청혼을 한 건가? 조금 전까지 자기 자신이랑 연애하지는 말라고 했으면서? 물론 큰 셀턴이 자신인지 몰랐겠지만, 뜻은 저랬다.
[이거 그거 아니에요? 연애 말고 바로 결혼이나 하자는 청혼?]
만면에 붉음이 번진 어린 루블리안을 보다 신의 말에 문득 묻어둔 기억이 떠올랐다. 루블리안은 종종 좋아한다는 말은 했지만, 연애하자는 고백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왕의 목을 벤 날, 앞으로의 계획을 묻던 데드리언에게 나를 따라다니며 청혼하겠다고 말했었다.
이게 이렇게 이어지다니. 기가 막혔다.
“너 오늘 나 처음 봤잖아.”
그것 외에도 기막힌 게 많았다. 방금 말했듯 어린 루블리안과 나는 오늘 처음 만났으며, 이름을 제외하면 그 무엇도 알지 못하는 사이였다. 나만 일방적으로 아는 게 많았다.
“그게 왜?”
도리어 그게 뭐가 문젠지 모르겠다는 눈빛이 되돌아왔다. 진심으로 그렇게 여기는 것 같았다. 대체 아이에게 뭘 가르치면, 낯선 사람에게 경계는커녕 청혼부터 하는 거지? 기가 막힌다는 눈빛으로 스칼레인을 흘기니, 그는 뒷골이 당긴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본 기간이 중요해? 네가 ……으니까!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좋’이란 단어는 거의 생략 취급이었다. 어린 루블리안은 자신의 청혼에 얼른 승낙하라는 듯 한쪽 발로 땅을 탁탁 두드려댔다. 만난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정말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게 여실히 드러났다.
“둘 다 남자라 그래? 동성혼이 가능한 지역 있어. 내가 거기 신분 얻어 놓을게.”
말을 잇지 못하는 날 보더니, 어린 루블리안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당당히 선언했다. 그와 동시에 움직이는 마력이 감지되었다. 마법의 대상은 어린 루블리안인 듯 마력이 아이를 향해 움직였다. 나는 손짓 한 번으로 마법진이 생성되기도 전에 파훼했다.
마력의 주인인 스칼레인은 뽀송한 아이를 보곤 혀를 찼다.
“물이라도 맞아야 정신을 차리는데 이쪽이 막아버렸군.”
“지금 나 진지하니까 방해 좀 하지 마!”
“제자야. 네가 머리에 든 게 있다고 했으면, 증명을 좀 하거라. 다짜고짜 청혼? 처어엉혼? 이게 진짜 맛이 갔나. 철이 드는 건, 네가 어른이 되어도 바라질 않는다! 다만 부탁이니 정신 좀 차리거라!”
진심이 가득한 호통이었다. 어린 루블리안의 입이 열리려던 순간, 살랑이던 바람이 한 곳을 중심으로 거세게 뻗어 나갔다. 둥근 원형을 그리듯 날카로운 바람이 분다. 이어 거대한 마력이 느껴졌다.
돌풍이 거두어지고 한 사람의 인영이 나타났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그리고 그 위로 한 겹 덮어진 환각 마법.
“저 왔어요, 리안.”
몸이 온통 피로 물든 루블리안이 애정을 담아 눈꼬리를 한껏 휘며 말했다. 그러나 그 웃는 모습이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다급히 그의 상처를 눈으로 훑었다. 겉보기에도 이곳저곳 다친 곳이 많았다.
루블리안에게로 다가가려는 순간, 자그마한 손이 내 옷을 붙잡는다. 이내 아래에서 뾰족한 말투의 미성이 들려온다.
“쟤야? 큰 셀턴?”
[와. 자기 자신한테 질투하네요…….]
나밖에 들리지 않을 신의 목소리에 동감했다. 루블리안을 바라보니, 그는 어릴 적, 자기 자신에게 질투한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지 않았다. 확실히 어릴 때보다 훨씬 뻔뻔해졌다.
어린 루블리안은 미래의 자신을 째려보았다. 그에 루블리안이 가소롭다는 듯 유유자적하게 내 앞까지 당도한다. 그 꼴이 평행 세계 루블리안과 루블리안의 대치를 연상시켰다. 나이를 먹을수록 과거를 같잖게 여기는 것이 루블리안들의 특징인가 싶은 수준이다.
“으응. 뭐 셀턴이란 성은 넣어두고. 이현이야.”
무릎을 구부리며 눈높이를 맞춘 루블리안이 생글거렸다. 아이의 눈이 팍 일그러진다.
“웩. 이름부터 다 이상해.”
“흐음. 그래?”
어린 본인의 말에 루블리안은 의뭉스럽게 되물었다. 마치 후회할 거라는 뉘앙스가 미미하게 풍겼다. 어린 루블리안도 그걸 알아차린 듯 미간을 더욱 좁혔다.
한쪽은 시비 걸고 한쪽은 미끼를 던지면 던지는 대로 물고. 시간의 흐름만 다를 뿐인 동일 인물의 대화가 끝나질 않을 것 같다. 나는 우선 곳곳에 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루블리안에게 말을 걸었다.
“루, 아니 이현.”
“현이라고 불러줘야죠, 리안. 그러기로 했잖아요.”
말꼬리를 애교스럽게 늘리며 살살 눈웃음을 친다. 다쳤다는 사실에 혼나지 않으려고 수를 쓰는 걸 알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나는 알면서도 그냥 넘어갔다. 그를 이길 수가 없었다. 지는 건 늘 내 역할이었다.
“……알겠으니까. 조용히 해.”
“네에.”
통각을 못 느끼게 하는 마법을 쓰고 있는 주제에 멀쩡한 척하는 루블리안의 팔을 잡았다. 이어 신성력을 퍼부었다. 이곳은 내 세계가 아니기에, 힘이 배로 강해져 치유하기가 더욱더 수월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간 곳은 살이 차오르고, 부서진 뼈가 맞붙는다. 신성력을 얇게 펼쳐 몸을 둘러보자, 남아있는 상처가 없었다. 내상은 없어 보였지만, 혹시 몰라 맞붙은 입술을 뗐다.
“내상은 없지?”
“네, 없어요.”
치료가 다 끝났다. 무릎을 굽혀 쪼그려 앉은 루블리안의 팔을 잡느라 숙였던 상체를 들어 올리려는데, 내 그림자 속에 있던 그가 날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그러고는 그의 팔 지척에 있던 내 손에 뺨을 묻으며 유순히 웃는다. 매끄럽게 휘어진 눈매 아래 햇빛에 부딪혀 잘게 반짝이는 바다 같은 눈동자가 도드라진다. 어두운 그늘 속에서도 홀로 빛이 나는 눈동자를 홀린 듯 바라보다, 루블리안의 옷에 묻은 피에 급격하게 정신을 차렸다.
“클린 마법 왜 안 썼어. 마력, 부족해?”
뭘 떠올린 건지, 내 말에 루블리안의 눈이 동그래진다.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다는 얼떨떨한 얼굴에 이내 슬금슬금 기쁨이 차오른다. 붉은 입꼬리가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고, 볼록한 애교살이 생긴다. 반달로 접히는 눈에 금빛 속눈썹은 위아래로 살랑인다.
“네에. 부족해요. 마력 주려고 하는 거죠? 그럼 클린 마법부터 써주면 안 될까요, 리안?”
속이 훤히 보이는 물음이다. 옷 때문에 끌어안지를 못하니, 깨끗해지면 바로 잡힌 손을 당기려는 속셈일 테다. 수작을 하도 많이 당한 탓에 모를 수가 없었다.
대답하면 말려들 가능성이 컸다. 클린 마법부터 써달라는 말을 못 들은 체하고 루블리안의 뺨과 닿아있는 손을 통로로 한꺼번에 마력을 전달했다.
전달이 끝나면 잡히리란 걸 알아 바로 손을 내빼려는데, 저쪽도 내 행동을 예상했는지 내 손을 감싼 커다란 손에 힘을 주어 자신의 쪽으로 당겼다. 순수한 힘으로는 루블리안을 이길 수 없기에, 당연한 수순으로 그에게 안기게 되었다.
예상과 다르게 비릿한 혈향이 나지 않았다. 도리어 익숙한 체향이 맡아졌다. 언제 마법을 쓴 건지, 루블리안의 옷은 새하얗기만 했다. 핏자국 하나 남지 않았다. 그간 봐온 마법 시전 중 가장 빠른 속도였다.
루블리안의 팔이 노련하게 내 허리를 감쌌다. 얼굴이 가까워 몸을 뒤로 빼내려는데, 그가 나를 조금 더 당겨 안고는 어깨에 머리를 비벼댔다. 살갗과 머리카락이 피부를 간지럽힌다. 간간이 말랑한 감촉과 뜨거운 숨결이 닿았다. 작은 웃음소리 또한 귓가로 흘러들어온다. 놔줄 생각이라고는 전혀 없는 게 드러나는 애교스러운 몸짓이었다.
고민 끝에 평행 세계 루블리안과 싸우느라 지쳤을 테니, 떼어 내는 건 미루기로 했다. 사적인 감정이 들어가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는 결론이었다.
안긴 채 가만히 자기가 갯과 동물인 것처럼 비비적거리는 루블리안을 바라보는데, 신이 나를 불렀다.
[시현.]
‘응.’
[저기, 저기를 봐 봐요.]
신은 형체 없이 목소리만 전달한다. 그 때문에 저기가 어딘지 방향을 알 수 없었으나, 고개를 돌리자마자 보이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진 어린 루블리안의 낯에 신이 말한 게 아이가 있는 쪽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눈 한번 깜빡 안 하고 있던 건지, 충혈된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내가 봐줄 때까지 기다렸다는 듯 그제야 눈을 감는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 광경을 본 내 심정을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었다.
미치겠다. 정말 미치겠다.
루블리안 때문에 존재를 잊고 있긴 했다. 그런데 봐줄 때까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을 줄이야. 신이 내게 말을 걸지 않았더라면, 언제까지 저러고 있었을지 예측이 안 됐다.
어릴 때부터 새싹이 남달랐다. 루블리안도, 어린 루블리안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일 미친 건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긴 하지만, 이들도 만만치는 않았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나이쯤 되면 더 미쳐있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