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 루블리안과 과거 세계 (5)
마법을 풀어준 게 고맙다는 줄 알았는데, 어려도 루블리안은 루블리안이었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몇 번째 불타는 인성을 실감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뭐, 마, 마법 풀어준 것도…….”
말끝으로 갈수록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내게서 눈을 떼지 않던 어린 루블리안이 땅바닥을 보았다가 다시 나를 본다.
“고마워.”
그러고는 입안에서 얼마나 굴린 건지, 뭉개진 듯한 말을 내뱉었다. 눈치채기도 어렵게, 귓가에 정말 얕은 바람이 스치는 격이었다.
얼굴과 귀만 불을 쬔 것처럼 타오르더니, 이제는 목까지 붉어졌다. 루블리안하면 뻔뻔함이 자연스레 따라붙었는데, 이리 구는 게 생소하다. 머뭇거리는 게 평소에 이런 말을 잘 하지 않은 티가 났다. 이렇게 끝없이 광활한 숲에 오두막 하나. 아마도 한 명 있을 스승이란 작자는 성격이 글러 먹었으니, 고맙다는 말이 어색하고 낯간지러울 만했다.
나는 대답 대신 아이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투박했던 아까보다 조심히, 톡 건드리면 금이 갈 듯한 유리잔을 대하듯 살살 손을 움직였다.
동그랗게 떠진 푸른 눈. 약간 벌어진 작은 입술.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붉은 뺨. 우리 사이로 살랑이는 바람. 내리쬐는 따사로운 햇볕. 나는 이 광경을 망막에 새길 듯이 세밀하게 응시했다.
“그, 그래도 주술을 풀어줬는데, 피 한 방울 정도는 줄 수 있지 않나?”
그 평화로움이 감도는 공기를 깬 건, 나간 넋이 돌아온 아이의 스승, 스칼레인이었다. 어린 루블리안의 미간이 좁아지고 순하던 눈매가 치켜 올라갔다. 누가 봐도 짜증이 난 얼굴이었다.
“그만 좀 하라고, 이 고집쟁이 노인네야!”
“쯧쯧. 제자야. 네가 그러니 어리다는 거다! 저, 저 단아한 얼굴에 현혹되어선 멍청하게 저 몸을 이루는 것들의 가치를 못 알아보고 있지 않으냐! 머리에 뇌가 아니라 파스타 면이 든 게 아니라면, 당연히 그 가치를 알아봐야 하는 게다!”
침을 튀기면서 말하는 스칼레인에 화가 일었다. 아까 했던 사과도 내게 얻고 싶은 게 있어서 한 걸 알면서 넘어갔다. 영혼이 하나도 담겨 있지 않다는 건,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기어코 선을 넘는다. 내게 하는 말이 아니었지만, 어린 루블리안은, 루블리안은 내가 내게 유일한 그 감정을 주는 대상이었다. 원체 성격이 더러운 건 알겠지만, 이리 대하는 걸 보고 화가 안 날 수가 없었다.
“이 미친 노인네가! 그러는 당신도 리안한테 처음부터 유하게 굴었잖아! 만나자마자 머리도 안 깨고 협박도 안 했으면서 왜 나한테만 그래! 거기다 나한테 무례하다고 알려준 행동도 했잖아! 당신이야말로 대가리를 딴 거로 채우곤 장식용으로 달고 다니는 거겠지!”
무력행사를 하려던 차에 어린 루블리안이 핏대까지 세우며 소리를 내질렀다. 목소리는 귀청이 아플 정도로 크고 높게 올라갔다.
어린 루블리안은 자신의 스승인, 스칼레인에게 밀리지 않았다. 하나하나 따지며 반박하는 모습이 자기보다 강한 사람 지키겠다고 앙앙 짖어대는 강아지 같았다.
“그거야 큰 셀턴의 애인이니 당연한 대우였다. 어리디어린 네가 알지 못하는 어른의 일이 있는 게다!”
“애인?”
어린 루블리안이 빠른 속도로 고개를 돌렸다. 뚜렷이 나를 담는 맑고 청명한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다른 말도 아닌 애인이라는 단어에 큰 충격을 받은 모양새였다. 왜인지 모르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줘야 할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나는 입을 움직여 완성된 문장을 토해냈다.
“애인 아니야. ……사귈 일 없어.”
정말로, 사귈 일 같은 건 없었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일만 해결되면, 루블리안을 그의 원래 세계로 되돌려보낼 예정이니까.
신이 루블리안의 존재를 알면서도 입을 닫았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았으나 신의 축복 및 가호도 받지 않은 이가 다른 세계에서 살 수는 없는 일이다. 설령 받는다 해도 세계의 균형이 흔들리면 안 되니 ‘같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허용되지 않았다.
내 말에 반색하던 어린 루블리안이 금세 표정을 바꾸었다. 조금 퉁명스러운 어조로 아이가 묻는다.
“좋아해?”
“……누굴?”
“그 사람. 큰 셀턴? 이름도 이상한 그 사람 좋아하냐고.”
심통 난 어린 루블리안의 얼굴에서 다 큰 루블리안의 흔적을 찾아내며 생각했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한테 루블리안은 또라이이기 이전에 그런 사람이었다. 유일무이한 이 감정을 줄 수 있는 사람.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 감정을 밖으로 꺼낸 적은 없었다. 뱉으면 무언가 변할 것만 같은 기분이어서 그랬다. 사실 변하는 건 없을 텐데도.
“글쎄.”
이번에도 불확실한 어중간한 대답을 했다. 어린 루블리안의 질문에 루블리안에게 가진 내 감정을 곱씹느라 일던 화가 가라앉았다. 스칼레인의 면상을 보면 불쾌한 감정이 일렁이긴 하지만 말이다.
내게 닿은, 내가 사랑하는 색의 눈동자가 나를 샅샅이 살핀다. 감춘다고 감췄으나, 새어 나오는 감정의 흔적을 찾듯이. 이내 굳게 닫혔던 입술이 열린다.
“……거짓말하네. 좋아하면서.”
“그래 보여?”
어린 루블리안이 알아차릴 정도라면 루블리안은 옛날 옛적부터 알고 있었을 테다. 모르리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안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확인받은 기분이다. 밀어내는 걸 알면서도 더 가까이 다가오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어떻게 몰라? 너 진짜 짜증 나.”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나를 노려본다. 독기 서린 두 눈에 조금 물기가 차올랐다.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상관도 없는 아이라면 애초에 내 안중에 있지도 않았을 테지만, 루블리안이었다. 어린 루블리안이 눈물을 흘리게 생겼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무심코 앞으로 나간 손만 공중에 얼어있었다.
그걸 보더니, 덩달아 속눈썹도 촉촉해진 아이가 날카롭게 묻는다.
“애도 안 달래 봤어?”
“너도 달램을 받은 적이 없으면서 큰소리를 치는구나, 제자야.”
“맨날 나 굴리기만 하는 노인네는 조용히 해!”
잠시 고개를 돌리곤 끼어든 스칼레인을 타박한 어린 루블리안이 다시 나를 보았다. 이어 내게 명령을 빙자한 바람을 이야기한다.
“나 안아 줘.”
토를 달지 않고 어정쩡하게 허공에 떠 있던 팔을 쭉 뻗어 아이를 품에 넣었다. 아이의 따끈한 체온이 느껴졌다. 숲의 향과 포근한 향이 어지러이 섞여 코끝을 톡톡 건드렸다. 미성의 목소리는 다음 단계라는 듯 또 하나를 말한다.
“등 토닥여 줘.”
서툰 손짓으로 나를 가리던 등과는 다른, 작은 등을 토닥였다. 아주 소중한 것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일정한 박자로 등에 손을 떼었다가 붙이기를 반복했다.
작은 두 손이 내 옷자락을 힘껏 부여잡는 게 느껴졌다. 어깨와 목 부근에서는 아이가 도리질을 치는지 머리카락이 비벼졌다. 작은 콧방울과 눈썹의 감촉도 얕게 느껴진다.
어린 루블리안은 경계심이 없는 건지. 오늘 처음 만난 나에게 이리 애정을 갈구한다. 내 어릴 적과 닮아 있어 모를 수가 없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미묘한 눈길이 닿는다. 아이의 스승, 스칼레인이 나와 어린 루블리안을 빤히 바라보다 입술을 떼었다.
“애인이 아니란 말이냐?”
믿을 수 없다는 투였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던 눈동자에 안쓰러움이 스쳤다. 이어 작게 “불쌍한 자식.” 하며 혼잣말을 내뱉는다. 눈동자에서 숨기지 못한 애정이 엿보였다.
말은 험하고 툭 하면 상처받게 하면서도 제자를, 그러니까 루블리안을 아끼긴 아끼는 듯했다. 정이 들었으면 말버릇을 조금이라도 고쳐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가도, 이게 고친 걸 수도 있단 생각에 미쳤다.
마탑에서 보았던 몇몇 마법사들의 말버릇을 상기하던 때에 불쑥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바싹 마른 눈이 나를 직시한다.
“하지 마.”
“뭘?”
어린 루블리안이 입술을 툭 내밀었다. 하얀 귀가 점점 붉게 덧칠해진다. 이걸 모르겠냐는 듯, 이걸 자신의 입으로 말해야겠냐는 듯한 눈빛을 쏘아댄다. 종내에 입이 열린다.
“……네가 좋아하는 그 자식이랑 연애하지 말라고.”
……그거 미래의 너야. 밖으로 나오려고 하는 말을 혀 아래로 욱여넣었다. 미래의 일을 언급하면 혹시 미래가 틀어질지 몰라, 하고 싶은 말들을 다 삼켜버리니 할 말이 없었다.
“허허. 자기 무덤을 스스로 파는군.”
어이없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스칼레인이 고개를 젓고 있었다. 제 발로 다 온 복을 찬다는 얼굴이었다. 지금만큼은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있었다.
이래 놓고 용사로서 마주했을 때, 그렇게 굴다니. 대체 얼굴에 철판을 몇 장 깐 건지 의아해질 정도였다.
물론 처음에야 큰 셀턴이 본인을 뜻한다는 걸 모를 수 있었다. 그러나 머리가 잘 돌아가는 그가, 용사로서 온 나를 보고 큰 셀턴이 자신이었다는 걸 못 알아챌 리가 없었다. 며칠도 안 되는 사이 바로 알아차릴 게 분명했다.
“왜 대답 안 해?”
나와 스승을 번갈아 보던 아이의 눈이 세모꼴로 변한다. 확실한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옷을 놓아 주지 않겠다는 듯 손에 더욱 힘이 실렸다.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자신이랑 연애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가놓고 먼저 살랑댄 거야? 희극이 따로 없다.
“안 할게.”
“진짜지?”
재차 확인하기까지 하는 치밀함에 후일 이 어린 루블리안이 자라, 진실을 깨달았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자기 자신이 걸림돌이 된 기분은 어떨지, 나중에 루블리안에게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응.”
답을 내어주고는 내 옷자락을 잡은 손 중 한 손을 떼어 냈다. 이어 작고 짧은 새끼손가락에 손가락까지 걸었더니, 신이 난 아이는 한술 더 뜨듯 엄지와 엄지를 맞대어 꾹 도장을 찍었다. 기쁜 기색이 완연하여, 조금 양심에 찔렸다.
그러나 그 양심통은 금세 사라졌다. 용사가 되고 얼마 안 됐을 무렵, 루블리안이 나에게 한없이 유하게 굴고 애교부리던 모습이 생각난 덕이었다. 자기의 업보를 청산하는 게 적성에 맞아 보였으니, 괜한 걱정일 테다.
[자기 인생 자기가 제대로 꼬네요…….]
조용히 구경만 하는 듯하던 신이 슬그머니 말을 보탰다. 반론할 여지가 없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