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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27)화 (27/112)

027. 루블리안과 과거 세계 (4)

옆으로 빠지게 된 어린 루블리안의 스승은 곧 옷을 털며 일어났다. 태연하기 그지없는 게, 흔한 일인 듯했다. 스승이라 했으니, 훈련을 이쪽이 봐줄 테다. 그러니 덤비는 게 흔하긴 할 터였다. 맞는 건 그렇지 않겠지만.

“제자야. 어디서 하늘과 같은 스승을 발로 차는 야만적인 짓을 배워온 건지 모르겠구나. 거기다 발에 영 힘이 부실한 게 훈련 시간을 더 늘려야겠다.”

부실과 훈련이라는 말에 발끈한 아이가 길길이 날뛰었다. 어리다 보니 상대적으로 다리가 가늘긴 했으나, 적당한 근육이 붙어있어 부실하다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일부러 성질을 돋우는 거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어린 루블리안에게 선비처럼 말하던 것과는 다르게 나를 눈에 담자마자, 아이의 스승은 눈을 번뜩였다.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게, 마법사다웠다. 끈질기게 달라붙으리란 걸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이래서 루블리안을 제외한 마법사와는 연을 맺고 싶지 않았던 건데.

“신기하게도 찌꺼기도 몸에 달라붙어 있던데…….”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다. 찌꺼기라니.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최근에 머리가 터질 듯한 소리를 들어본 적 있나?”

……있다. 있었다. 평행 세계에서 누구의 방인지 알 수 없는 곳을 들어갔을 때, 소리를 듣고 결국에는 기절에까지 이르렀다. 나는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으나, 어린 루블리안의 스승은 입꼬리를 비죽 올리기만 했다. 순식간에 자애로운 낯이 비열해졌다.

“피를 준다고 약조하면, 알려주지.”

일부러 말을 꺼내, 내 호기심을 자극하여 피를 얻어내려고 한 것이었다. 절대 손해는 안 보는 루블리안의 성격도 여기서 온 게 틀림없었다.

어린 루블리안의 스승을 응시하니, 당연히 내가 수락하리라 여기는 눈치였다. 거절은 아예 예상에 없는 듯했다. 옆에서 어린 루블리안이 나를 말리려 들었지만, 스승의 마법에 소리는 못 내고 입만 뻐끔거리는 붕어 신세가 되었다.

진귀한 모습의 어린 루블리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러자 갈색으로 그을린 낯이 확 밝아지고, 녹빛 눈동자가 더욱 생기있게 변했다. 저 얼굴이 흙빛으로 변할 게 기대가 됐다.

흔치 않은 걸 연구할 생각에 흥분한 아이의 스승이 눈치채지 못하게 감정 고조 마법을 걸었다. 열기가 감도는 낯이 더욱 흥분으로 타올랐다. 이어 나는 마법진을 펼쳤다. 이것은 마법사의 서약으로, 지키지 않는다면 죽음에 이르는 마법이었다.

“나, 리안은 루블리안의 스승이 하는 찌꺼기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은 뒤 피를 줄 것을 약조한다.”

허공에 떠오른 마법진에 손을 집어넣었다. 쭉 팔목까지 마법진에 들어차자, 피부에 흡수되듯 마법진이 사라졌다. 팔목에 팔찌처럼 둥글게 고대 언어가 새겨졌다.

서약하는 문장에 빈틈이 여러 군데였지만, 저쪽은 받는다는 것에 흥분한 나머지 내가 말한 문장을 자세히 살필 여력이 없는 듯했다. 머릿속이 온통 피로 가득 찼을 게 뻔했다. 마법사 대부분이 원래 한 가지에 꽂히면 다른 것을 소홀히 하곤 했으니, 그도 서약에는 신경을 기울이질 않았다. 이럴 줄 알고 감정 고조 마법까지 건 거였으나, 너무 쉬워 도리어 의심이 생길 수준이다.

“당신도 하시죠. 제게 진실만을 이야기하겠다는 서약을.”

“크흠. 그러지.”

허공에 내가 시전했던 마법진과 똑같은 형태의 마법진이 떠올랐다. 어린 루블리안의 스승은 마법진에 대고 “나, 스칼레인은 리안에게 찌꺼기에 대한 진실만을 말하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내가 그랬듯 마법진에 팔목까지 밀어 넣었다. 그러자 마법진이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고, 그의 팔목에도 고대 언어가 새겨졌다.

여태 통성명을 안 했다가, 이름을 알게 되었다. 스칼레인. 어디서 한 번쯤 들어본 이름 같았으나, 무언가 떠오르지는 않았다. 쓸데없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고 나는 고갯짓을 한번 했다. 이제 말하라는 의미를 알아들은 듯 스칼레인이 입술을 벌렸다.

“흠. 찌꺼기는 편의적으로 부르는 말이고, 정확한 명칭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본디 살아있던 이의 미련이니.”

즉, 고인의 미련이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목소리의 주인은 평행 세계의 루블리안을 못 죽인 게 미련이라는 건가. 기절까지 시키던 강렬하고 깊은 원망이 잊히질 않는다. 어떠한 짓을 저질러야 저런 원망을 듣는 건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나는 이어지는 말을 경청했다.

“보통 미련으로는 안 되고, 이대로는 죽지 못하겠다고 자신을 불사르더라도 그 미련을 이루고 싶단 마음에서 나오네. 그렇다고 해서 영혼이 남느냐 하면, 그것은 세상의 순리가 어긋나는 것이라 불가능하고. 하여 감정만이 지상에 남아 떠도는 것이지. 알맹이 없이, 껍데기만 둥둥.”

“목소리는 보통 누구에게만 들리죠?”

“그 미련을 이뤄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그런 사람한테만 들려온다더구나. 또, 일반적으로 살아생전에 오래 머물렀던 곳에 존재한다고도 하지.”

미련을 이뤄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인 나. 살아생전 오래 머물렀던, 벨리텐트의 저택에 있던 방.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죽여달라고 하던 목소리. 이미 죽은 사람.

조각난 것들을 한데 모으니 목소리의 주인이, 그 비명과도 같던 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저기에 부합하는 인물은 한 명이었다.

평행 세계 백시현. 그였다.

“근데 이제 몸에 스미는 게 문제인데…… 자네는 이미 흡수되었군.”

“흡수되면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조금씩 감정이 동화될 여지가 있지. 물론 찌꺼기를 아예 없애는 방법 또한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네.”

그리 말한 스칼레인이 내 얼굴에 구멍을 뚫릴 기세로 열렬한 시선을 보냈다. 그 방법을 쉽게는 안 알려주겠다는 의지가 드러났다.

내 다리에 딱 달라붙은 어린 루블리안은 나를 보며 크게 도리질 쳤다. 거래하지 말라는 듯이. 나는 묘하게 걱정스러운 눈빛을 띠는 맑은 눈동자를 응시하다, 햇빛을 그대로 머금은 듯한 금발을 두어 번 투박하게 쓰다듬었다. 이어 치트키와 같은 신을 찾았다.

‘신. 당신 있어?’

[네…. 드디어 관할 세계로 오긴 왔네요.]

힘들었다는 투였다.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묻어나기도 했다. 그런 신에게 나는 확실한 대답이 돌아오리라 생각하며 물었다.

‘몸에 흡수된 찌꺼기 없애는 법, 알아?’

[찌꺼기요? 고인분의 미련을 말하는 거라면 네. 그건 간단해요. 그냥 신성력으로 온몸 구석구석을 씻으면 돼요. 체내도 겉도 다요. 말 그대로 정말 몸 전체를 신성력으로 뒤덮으면 끝나요.]

생각보다 몹시 간단했다. 대화는 신과 나누고 있지만, 시선은 앞에 있는 스칼레인에게 고정된 채였다. 그는 내가 방법을 알아냈다는 것도 모른 채, 피 혹은 머리카락을 더 받는 상상이라도 한 건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안 알려줘도 됩니다.”

“뭐, 뭐라는 건가. 감정에 동화될 수 있는데 없애지 않겠다는 건가?”

“글쎄요. 그걸 제가 말해줘야 할 의무는 없으니, 궁금증을 그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만. 아, 피는 여깄습니다.”

마력으로 검지의 첫마디에 작은 상처를 낸 뒤 핏방울을 바닥에 떨궜다. 신성력으로 작은 상처를 치유하고 피가 떨궈진 땅을 발로 밟아 짓이겼다.

내 팔목에 새겨졌던 고대 언어가 스르륵 자취를 감췄다. 계약을 착실히 이행했다는 의미였다.

“이, 이게 무슨!”

스칼레인의 눈이 커다랗게 뜨이고, 동공이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여간 당황한 게 아닌 듯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지?”

“피를 준다고 하지 않았느냐!”

“준다고야 했죠. 누구라고는 하지 않았지만요.”

그제야 서약하는 문장의 허점을 깨달은 듯 스칼레인이 입을 떡 벌렸다. 검지로 삿대질까지 하며, 어버버 하는 게 충격이 큰 모양이다.

“허락 없이 예의 없는 짓을 하지 않았다면, 머리카락과 피 정도는 그냥 드렸을 텐데. 본인 인성을 좀 되돌아보시는 게 좋겠네요.”

고저 없는 목소리는 공허할 만큼이나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냥 사실을 말한다는 듯했지만, 스칼레인은 그게 더 섬뜩했는지 딸꾹질을 했다.

여전히 뻐끔거리는 붕어 입을 가진 어린 루블리안은 그런 스승을 처음 보는 듯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물빛 눈동자가 햇빛을 빨아들이는 것만 같았다. 실로 재밌어하는 모습이어서 기분이 묘했다. 스승이 사기당하는 꼴을 이렇게나 좋아하다니. 이미 구제할 수 없는 인성이었다.

몬트리오가 주장했던 ‘루블리안 셀턴은 어렸을 때부터 인성이 글러 먹었다.’ 설은 이렇게 사실로 판명 났다. 다시는 만나지 못하지만, 이 사실을 전달해준다면 그것 보라며 루블리안과 싸울 게 그려졌다. 그 옆에서 데드리언은 허허 웃고 있고, 알리는 이기는 편이 우리 편이라며 외치고 있을 테다.

주욱. 잠시 오지 않을 미래를 상상하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옷자락이 잡혔다. 심지어 당겨지는 힘에 늘어나기까지 했다. 어린 루블리안은 즐겁게 웃던 낯을 어디다 갖다버린 건지, 불만스러운 얼굴로 나를 뚜렷이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입을 뻐끔거렸다. 내게 무언가를 전하려는 모양새라 나는 그 작은 입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물…… 어줘? 완전히 읽기가 어려웠다. 나는 그냥 어린 루블리안에게 걸려 있는 마법을 파훼했다.

“뭐라고 한 거야?”

“‘풀어줘.’라고 했어.”

내게 대답해주고는 연신 소리를 내며 목소리가 나오는지 확인한 아이가 나를 돌아보았다. 자그마한 손은 여전히 내 옷을 놓칠세라 꽉 쥐고 있었다.

“그…….”

아이가 말꼬리를 늘였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듣지도 않고 지나쳤겠지만 내 앞에 있는 건 루블리안이었다. 그것도 어릴 적 루블리안.

기다림 끝에 이윽고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소리가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다. 끝내 말을 듣기 위해 나는 무릎을 구부리며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뭐라고 했어? 안 들렸어.”

“고, 고맙다고!”

이번엔 빼액 소리를 내지른다. 부끄러운지 서서히 뺨부터 귀 끝까지 붉게 물드는 게 보였다. 아이는 내 옷자락을 놓은 손을 꼼지락거리다 내 귓가에 속삭였다.

“괴팍한 노인네 골려 준 거 고마워.”

아. 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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