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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26)화 (26/112)

026. 루블리안과 과거 세계 (3)

점차 첨예하게 변하기까지 하는 눈초리에 나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니면 말고.”

“당연히 아니지! 저런 괴팍한 노인네를 내가 왜 좋아해!”

그러자 어린 루블리안이 광분했다. 스승을 보고 괴팍한 노인네라고 하다니. 다신 없을, 독보적으로 불타는 인성이다.

“안 내려가면 안 돼?”

“왜?”

“노인네가 자꾸 귀찮게 군단 말이야.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면서 쓸데없이 힘만 넘치고.”

작은 입술이 오리처럼 튀어나왔다. 맘에 안 든다는 뚱한 얼굴이다.

감정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게 몇 번을 봐도 신기하다. 생소한 감상에 휩싸인 나는 아이를 면밀히 살피다, 시선을 내렸다. 자기를 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듯, 햇볕에 거멓게 그을린 거칠어 보이는 손이 후드를 올렸다. 길게 늘어뜨린 고동색 머리칼에 이 숲을 전부 담은 듯한 녹색 눈이 드러났다. 풍기는 분위기는 노인에 가까웠으나, 외향은 20대 못지않았다. 등 뒤로 안정된 바다와 같은 거대한 마력이 넘실거렸다. 아마 이 때문에 노화가 느린 듯했다.

“허허. 큰 셀턴이 예고했던 손님이 왔구나.”

큰 셀턴이 예고한 손님. 손님이 나라면 큰 셀턴은 루블리안일 테다. 예고를 했다는 걸 보니, 여러 세계를 넘나들면서 여길 왔다 간 듯했다. 일주일 조금 넘은 그 며칠 사이에 얼마나 돌아다닌 건지. 몸에 무리가 안 왔을지가 걱정이다.

세계를 넘어봤어도 다 내가 마법을 시전한 게 아니라서 얼마나 마력이 깎이는지 난 모른다. 적지 않은 마력이 소모될 건 분명했으나, 달리 정확한 수치를 알 방도가 없었다. 그리 생각하고 있는데 별안간 목이 졸려왔다.

“나랑 있으면서 딴생각하지.”

작은 얼굴엔 스승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했을 적보다 불만이 가득했다. 어릴 때랑 지금이랑 성격이 이렇게까지 판박일 이유가 있을까. 묘한 기분에 휩싸이며, 입을 다물었다. 달래주길 원하는 것 같았으나, 나에게 어린아이를 달래는 솜씨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아이는 더 삐쳤다. 내 머리카락 한 줌을 잡아당기면서 마음이 상했다는 걸 표출했다. 아이가 당기는 방향대로 머리를 기울이며,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고민하던 찰나, 다른 목소리가 시선을 앗아갔다.

“아이는 무시하고 내려오지 그러나.”

루블리안의 스승이라는 작자는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 괴팍하다는 말과 어울리지 않는 미소였으나, ‘아이는 무시하고.’라는 대목에서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답하기 전, 어린 루블리안이 먼저 선수를 쳤다.

“웩. 싫어.”

“제자야, 나는 누구한테 말한 건지 대상을 못 알아먹을 만큼 너를 멍청하게 키우지 않았다.”

한마디로 지금 한 짓이 멍청했다는 거였다. 어린 루블리안도 그 뜻을 알아들은 모양인지, 올라간 눈꼬리를 더욱 바짝 치켜올렸다.

“이거 다 당신한테서 배운 거거든?”

“어디서 거짓말까지 하느냐. 이 스승은 부끄러워 낯을 들 수 없다, 없어.”

“거짓말은 무슨 거짓말! 당신이 나 키웠잖아! 그리고 나는 당신 안 부끄러운 줄 알아? 나도 늙었으면서 젊은 척, 마법까지 써서 늙은 거 감추는 괴팍한 노인네가 내 스승이란 거 맘에 안 들어! 맨날 재미없는 개그나 치고 있고, 늙은 거 다 티나!”

……익숙한 느낌을 어디서 받았는지 알겠다. 루블리안의 성격이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대하는 루블리안의 성격을 빼다 박았다. 벨리텐트의 핏줄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이들이 부자지간 같아 보일 정도였다.

교차하는 시선들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어린 루블리안도, 안 늙은 척한다는 아이의 스승도 한 치의 물러섬이 없다. 졸지에 사제의 대치에 낀 나는 허탈한 마음에 사뿐히 아래로 내려갔다. 풀이 무성한 땅이 발에 닿았다.

“왜 내려가!”

주술이 아직 걸려 있으니까.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어린 루블리안을 스승에게 안겼다. 그러자 어린 루블리안이며, 스승이며 똑같이 진저리를 치고는 서로에게서 벗어났다. 둘 다 끔찍이도 싫다는 티를 풀풀 풍겨댔다. 나에게 원망 서린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판박이다.

이대로 대충 좌표를 설정하여 순간 이동을 할까 하던 순간, 얕게 퍼지는 마력을 알아차린 스승이 시전을 방해했다. 어린 루블리안도 마력의 흐름에 예민한 건지, 눈썹을 찌푸리며 내게 다가왔다. 다리 길이 차이 때문인지 내가 한 발자국 뒤로 갈 때, 두 발자국 앞으로 왔다. ……하찮다.

“그렇게 아이의 장단에 맞춰줄 필요 없네. 주술을 풀어줄 테니 이리 오기나 하세.”

그 소리에 발걸음을 뚝 멈췄다. 입도 벙끗하지 않은 주술에 관한 내용을 그는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신을 통해 아는 사람에게서 주술을 걸어왔다고 하더니, 이 사람이었나.

“주술? 너 주술 걸렸어?”

“응.”

“무슨 나쁜 짓이라도 저질렀어, 너?”

신이 모든 노력을 쏟아부어 조각한 듯한 낯이 일그러진다. 힐끔 보는 것도 아니고 대놓고 빤히 날 응시하는, 현재와 똑같은 색을 품은 눈동자가 맑았다. 이내 “아닌데……. 저 얼굴로 나쁜 짓을 굳이 할 리가 없는데.” 하는 중얼거림이 들린다.

입술 새로 작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헛웃음이 아닌 웃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날 보고 있던 아이의 동공이 더욱 커졌다. 짧은 새에 양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지금의 루블리안이랑 다를 게 없다.

“안 저질렀어.”

그 한마디를 하고는 아이를 지나쳐 아이의 스승에게 다가갔다. 다가오는 발걸음에 스승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묻네만, 주술을 풀지 않을 생각은 없나?”

“……?”

“말도 안 듣고 어여쁘지도 않은 제자한테 좋은 일을 해줘야 하나 싶고, 저 아인 이미 생명력이 넘쳐나서 빼앗겨도 별반 다르지 않네.”

이쪽도 어린 루블리안 못지않게 불타는 인성이었다. 이쪽이 원조지만, 이렇게나 똑 닮을 필요가 있나. 나는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이 노인네가, 진짜! 게다가 내 생명력을 빼앗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알 필요 없는 어른의 이야기다. 더 커서나 와라, 제자야. 키가 땅콩만 해서 누가 땅이라 착각하여 밟고 지나갈까 두렵구나.”

어린 루블리안의 스승이 자연스럽게 극딜로 아이의 주의를 돌렸다. 분개하느라 바쁜 어린 루블리안은 그 사실을 눈치챌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작은 머리통에 한 손을 올리고는 바람을 가르며 내지르는 주먹을 막은 아이의 스승이 그 자세 그대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풀 게냐?”

“네.”

고민 없이 단칼에 나온 대답이었다.

아이의 스승은 손짓 한 번으로 아이를 마법 함정이 가득한 곳에 날려 보내고는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스멀스멀. 무형의 기운이 머리를 파고들었다. 중요한 부위를 한마디 언질 없이 파고드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눈이 질끈 감기고 몸이 움츠러들었다. 기운이 점점 아래로 내려간다. 끝내 발가락 끝까지 다다르고 나서야 몸속을 유영하던 기운이 사그라들었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나자, 왠지 모르게 만족스러운 낯이 보인다. 어린 루블리안의 스승은 새 장난감을 얻은 아이처럼 즐겁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마력이 아주 강대하구나. 게다가 신성력도 뛰어나! 마력과 신성력을 함께 담을 수 있는 그릇을 가진 이는, 다른 세계에서 온 용사밖에 없는데 자넨 용사의 운명을 타고났군 그래!”

단번에 간파한 아이의 스승은 한번 다 뜯어내고 연구해보고 싶다는 눈이었다. 초롱초롱해진 눈을 보며 이 스승 또한 마법사라는 게 떠올랐다. 마탑에 있는 이들과 다르질 않았다. 어디 한구석의 나사가 빠져있었다.

“말없이 상대의 머릿속을 파고들고, 주술만 푸는 게 아니라 상대의 허락 없이 체내의 마력과 신성력까지 둘러보더니. 이젠 실험해보고 싶단 눈까지. 제가 가진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아셨으면서 뭘 믿고 그렇게 구는지 모르겠네요.”

그 거대하단 기운으로 압박을 가하며, 높낮이의 변화 없이 평이한 목소리를 내었다. 지긋하게 나이를 먹어서인지, 해도 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가 허리를 숙였다. 달달 떨리는, 햇볕에 그을린 손이 허벅지를 짚으며 몸을 지탱했다.

그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며 언제쯤 주저앉을지 기다렸다.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애당초 내가 언급한 세 가지는 허락 없이 해서는 안 됐다. 특히 머릿속을 파고들고, 체내의 기운들을 살피는 건 아무리 친밀한 사이여도 꺼리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그걸 오늘 처음 본 사람이 한 것이었다. 루블리안의 스승이었다는 사실 하나로 봐줄 만한 짓이 아니었다.

몇 분 버티지도 못하고 어린 루블리안의 스승은 무릎이 땅바닥에 닿았다. 헐떡거리며 숨을 토해내는 모습을 바라보다, 이쪽으로 오는 작은 인기척에 기운을 거뒀다.

“허억. 허억…….”

그제야 호흡을 제대로 고르는 모습을 응시하는데, 문득 불안한 예감이 치솟았다. 왜인지 내 힘을 체감해서 더욱 학구열에 불탈 것만 같았다. 마법사들은 대부분 그런 족속들이라, 가능성 없는 얘기가 아니었다.

설마 싶었다. 자신의 숨을 턱 막히게 하고, 자신을 해칠 수 있는 사람한테 겁도 없이 그럴까 싶었다.

“놀라워!”

그리고 언제나처럼 그 설마는 맞아떨어졌다. 아이의 스승이 머리카락이 붕 떴다가 가라앉을 정도로 거세게 고개를 들자, 드러나는 녹빛 눈이 아까보다 훨씬 반짝였다. 루블리안도 아닌 사람의 눈이 반짝이는 광경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다. 자리를 뜨려는데 엎어진 그가 내 바짓자락을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허락 없이 그런 것은 미안하네. 내가 사죄하지. 혹시 피랑 머리카락 몇 가닥 그리고 살점만 좀 떼어줄 수 없나?”

“이 노친네가 지금 뭐 하는 거야!”

대답하면 더욱 귀찮게 달라붙을 것이 눈에 선하여 마법으로 떼어 내려 했으나, 헐레벌떡 뛰어온 어린 루블리안이 본인 스승을 후려쳤다. 무방비하게 있던 아이의 스승은 얻어맞고 떨어질 수밖에는 없었고, 결과적으로 아이는 자길 날려버린 것에 대한 복수를 한 게 되었다.

이래도 되나 싶었다. 어린 루블리안을 돌아보니, 작은 입술의 입꼬리가 하늘을 향해 있었고 눈매는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어떻게 보아도 공격에 성공하여 뿌듯한 낯이다.

불타는 효자…… 아니 제자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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