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25)화 (25/112)

025. 루블리안과 과거 세계 (2)

산뜻한 바람이 살랑살랑 나부꼈다. 내가 사랑하는 색을 빼닮은 금발이 흔들리고, 군데군데 틈이 나 있는 나뭇잎 아래의 남자아이에게 그림자와 빛이 섞여든다.

심장박동이 거세졌다. 본능이 속삭이는 것만 같다.

이 애가 어린 루블리안이라고.

“너 누구냐고. 대답 안 해?”

감상이 와장창 깨졌다. ……그 성격은 어릴 때부터 이어져 온 거였나. 젖살이 빠지지 않은 어린 루블리안은 껄렁한 분위기를 풍기며 인상을 팍 쓰고 있었다. 예의 그 웃는 낯은 없었다. 얼굴에서 모든 게 드러났다.

어릴 때부터 인상 쓰면 주름이 생긴다는데, 루블리안은 예외였나 보다. 무슨 연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를 과거로 보낸 루블리안을 상기하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괜찮겠지. 일부러 나와 같이 오지 않은 게 자명한데도, 힘이 강해졌기에 죽진 않을 텐데도 걱정이 되었다. 주변인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싸우지 않은 걸 앎에도 그러했다. 그만큼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막강했다.

“대답하라는데 왜 고개를 끄덕여?”

이상한 사람이네. 어린 루블리안이 중얼거렸다.

루블리안 생각에서 벗어난 나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 나 같아도 물음에 대한 답은 주지 않고, 갑자기 고개를 끄덕이면 열 발자국은 물러날 것 같으니까.

“그럼 이름은 뭔데?”

고개를 까딱이며 묻는 어린 루블리안은 서양 인형 같았다. 새초롬한 눈매에 큰 눈동자며, 날갯짓하듯 살랑이는 긴 속눈썹이며, 뽀얗고 말간 얼굴이며. 어느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심지어 얼굴 길이를 재면 황금비율이 나올 것 같았다.

“내 얼굴 잘난 거 나도 아는데, 정신 좀 차려.”

당연한 걸 말하는 듯한 어조였다. 이어 어린 루블리안이 검지로 내 볼을 콕 찍었다. 절로 시선이 돌아갔다.

작다. 내가 아는 루블리안의 손보다 훨씬. 앙증맞은 손가락을 보다 보니 정신이 들었다. 대답 한 번을 들려주지 않아, 조금 뚱해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뒤늦게 입을 열었다.

“……어.”

“다시 말해 봐.”

맑은 눈동자에 휘광이 돌았다. 바람에 일렁이는 나뭇잎이 그림자를 만들어, 듬성듬성 빛이 들어오는 곳에 서 있는 아이는 완연히 빛을 받을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똑같이 반짝였고, 천사 같았다. 성격은 여전해 보이지만.

……그런데 날 왜 여기에 보낸 건지. 루블리안의 어린 시절을 볼 수 있는 건 좋았다. 그러나 이동됐을 때의 상황이 상황인지라, 루블리안의 의중이 무엇인지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말해 보라니까?”

당시 상황에 대해 깊게 생각할 새도 없이 어린 루블리안이 재차 종용했다. 역시 성격은 그대로다. 아, 약간 더 제멋대로인 것도 같기도 하다.

“……뭐를.”

“역시 너 목소리 되게 좋네.”

어린 루블리안은 솔직했고 당당했다. 애교스럽게 말끝을 늘리는 말투가 없다는 것과 행동거지가 귀족적이지 않다는 것만 빼면 내가 잘 아는 루블리안과 똑같았다.

“이름은?”

불쑥 또다시 어린 루블리안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궁금한 게 참 많은 듯했다. 계속해서 끈기 있게 질문하는 걸 보니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백시현이라고 대답해도 되는 건가. 여기가 아스칼 대륙인지는 모르겠으나, 끝자락에 있는 힐스튼 대륙만 아니라면 루블리안 셀턴 같은 이름만 가득하지, 백시현 같은 이름은 없었다.

즉, 원래 이름을 말하기엔 상황이 좀 그랬다. 그렇다면 역시…….

“이름 없어?”

고민하느라 대답이 늦어지자, 어린 루블리안이 갸웃거렸다. 마치 그럴 리가 없다는 의심이 가득 서린 눈빛을 한 채였다.

“없으면 지어주기라도 하려고?”

역으로 묻자, 루블리안이 눈을 크게 떴다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라고 흔쾌히 답했다.

“내가 루블리안이니까, 내 이름의 뒤를 따서 리안 어때?”

어린 루블리안의 작은 입술이 둥글게 휘었다. 눈웃음을 지은 덕에 새초롬한 눈매가 한껏 유순해졌다. 마음에 안 들 리가 없다는 자신감이 묻어나오는 미소였다.

……이래서였구나. 용사가 되고 루블리안과 처음으로 마주했을 때, 나한테 ‘리안’이라고 부르고 먼저 다가온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어릴 적을 물어보면,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라 한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과거에 만난 적이 있어서 그런 거였다.

잠시만. 그러고 보니 얘도 루블리안이잖아. 이름을 들으니 아직 주술을 풀지 못했다는 게 떠올랐다. 루블리안은 자기 자신에게 주술을 걸어 상쇄시켰지만, 얘는 아니었다. 뭣도 모르는 애기였다.

대상이 루블리안인 이상, 어린 루블리안도 내게 생명력이 야금야금 빼앗기고 있을 터였다.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이렇다 할 대답도 해주지 않은 나는 곧바로 도주를 시도했다.

그리고 어린 루블리안은 어딘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따라왔다. 그렇게 때아닌 나 잡아 봐라가 시작됐다. 아니, 왜.

“왜 따라오는 거야!”

꽤 깊은 숲속인 건지, 나무와 풀을 제외하고는 다른 게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풀 내음과 꽃 내음이 코를 마비시킬 듯이 퍼져 있었다.

“네가 도망가잖아!”

주술이 걸려 있다는 걸 설명하자니, 시공간을 거슬러 과거로 왔다는 걸 말해야만 했다. 미래를 알고 있다고 말하면 어떻게 반응할지 예상이 갔다. 미래를 발설하면 무언가 뒤틀릴 수도 있으므로 피하는 게 상책이다. 나는 탐지 마법을 넓게 펼치고 감각을 넓혔다. 그러고는 바로 숨을 곳이나, 피하기 좋은 장소를 물색했다.

저쪽에 오두막 하나, 이쪽은…… 훈련장인가? 이 넓은 숲에 오두막이 하나인 걸 보니, 거긴 어린 루블리안의 은신처일 확률이 높았다. 여러 기구가 놓여있는 훈련장도 마찬가지인 것 같긴 한데 피하기엔 이쪽이 더 나았다.

나는 훈련장이 있는 곳으로 방향을 꺾었다. 뒤에서는 여전히 풀을 밟고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포기는 안 할 생각인가 보다.

“거기 서!”

“안 설 거야!”

이렇게 목청을 높인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나뭇잎 사이로 간간이 들어오는 햇빛을 맞으며, 아마도 훈련장일 곳에 도착했다. 다리는 멈추지 않고 여전히 넓은 보폭으로 움직였다.

베기 연습을 하는 듯한 통나무와 쿵푸*더에 나온 훈련실을 상기시키는 각기 다른 모형의 통나무도 한가득이었다. 이게 검술을 배우는 사람의 훈련장인지, 마법을 배우는 사람의 훈련장인지.

그리 생각하고는 마법을 쓰며 재빠르게 복잡한 곳에서 벗어날 때였다. 넓힌 감각과 탐지 마법에 복잡하게 섞인 통나무들을 능숙하게 빠져나오는 움직임이 잡혔다. 일순 마법사면서 늘 스태프에 마법을 걸고 가차 없이 휘둘러 머리를 깨버리던 루블리안이 떠올랐다. ……이런 곳에서 배우니, 스태프부터 나가지. 그간 보였던 행보들이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멈추라고!”

멈추라는 말을 무시하고 훈련장 안쪽으로 더 들어가니, 숲속에 가려진 함정들이 있었다. 마법으로 함정이 깔려있는데 상당히 섬세했다. 하나는 확실하다. 이건 대마법사인 이의 작품이다.

설치된 함정을 이용해 보려 최대한 마법진이 깔린 곳으로 유인했는데, 여기서 얼마나 구른 건지 어린 루블리안은 쏙쏙 잘만 피했다. 이대로 가다간 밤새도록 이 추격전을 하고 있을 기세라, 나는 고민해야만 했다.

“멈춰봐.”

“네가 멈춰!”

목이 나가진 않을까 생각될 만큼이나 큰 소리였다. 내가 멈추면 과연 어린 루블리안도 멈출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밤새 뛰어다니는 건 여러모로 좋지 않았다. 나는 괜찮다 해도 어린 루블리안이 감기 걸린다. 나는 뜀박질을 그만두고 자리에 멈춰 선 채 이내 뒤를 돌아보았다.

“너도 멈춰. 거기서 이야기하자.”

하지만 말을 잘 들으면 루블리안인가. 어린 루블리안은 바삐 움직이는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거리를 벌려야만 했다. 생명력을 닳게 만들 수는 없었다. 5초도 안 되는 그 짧은 새, 대책안을 찾아낸 나는 마법을 썼다. 내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 진작 이렇게 할 걸 그랬다. 아니면 순간 이동을 하든가. 어려진 루블리안에 정신이 팔려 도망치기 바빠 생각지도 못했다.

어린 루블리안은 손을 위로 뻗고 몇 번 콩콩 뛰어대더니 손에 잡히는 게 없자 성질내기 시작했다.

“하? 사람이랑 이야기할 때, 이렇게 멀리서 안 해!”

“난 해. 나랑 이야기, 안 할 거야?”

“……할 거야.”

눈썹이 퍽 찌푸려진다. 자존심 상한다는 얼굴이었다. 저 얼굴에 모든 생각이 드러나는 게 신기했다. 커버린 루블리안에게서는 볼 수 없는 순수함이었다.

“왜 쫓아왔어?”

“네가 이름 듣자마자 뛰어갔잖아. 마음에 안 들어?”

불퉁한 어조가 얼른 마음에 든다고 말하라는 것처럼 해석됐다. 실제로도 그게 정답이었는지, 고개를 저으며 이름은 좋았다고 하자 얼굴이 한결 풀렸다.

“그럼 왜 도망쳤는데?”

“갑자기 급한 볼일이 생겨서.”

“화장실?”

급한 볼일이 화장실로 치환되다니. 어린 루블리안은 묘하게 엉뚱하고 하찮았다. 물론 까탈스럽고 예의도 없었다. 순 제멋대로에 기분파인 고양이 같다.

“그건 아니고.”

“흐음.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화장실 가고 싶어서 그렇게 급하게 도망칠 수 있지.”

아니라는 걸 파악했으면서 통통한 입술을 비죽 올린다. 볼살도 같이 위로 움직였다. 귀엽지만, 성격 한번 나빴다.

그때였다. 어린 루블리안 근처에 커다란 마력이 감지되었다. 주술 때문에 거리를 벌리던 것도 내팽개치고, 나도 모르게 어린 루블리안을 낚아챘다.

“뭐, 뭐야!”

“……누구지.”

어린 루블리안이 있던 곳 바로 옆에, 앞이 보이나 싶을 정도로 로브를 푹 뒤집어쓴 사람이 나타났다. 귓속으로 심드렁한 미성이 흘러들어왔다.

“괜찮아.”

“괜찮다고?”

“어. 스승님이셔.”

아래를 보던 시선을 옮겨 어린 루블리안을 바라보았다. 어째서인지 심드렁했던 목소리와 다르게 뺨은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톡 건들면 터질 것 같았다.

아닌 척하는 태도와는 다르게 스승을 좋아하나 싶었다. 루블리안이 그럴 인간이 아닌 걸 알지만, 너무나 잘 알지만, 어렸을 때는 조금 달랐을 수도 있지 않나.

“스승님, 좋아하나 봐?”

그런 생각으로 물음을 던지자,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싸늘하게 식은 눈 또한 함께였다. 헛된 희망이었다.

2